꽃은 춤추고 바람은 노래한다 / 비센아도

책갈피 by 서
1
0
0

1

루델시아에 정착한 아도라가 신관이 되겠다고 말했을 때, 비센테는 최선을 다했다. 신학자를 두 번이나 권한 건 정말 그 당시의 그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에르셀라는 고작 그 정도로 무슨 최선이냐고 닦달할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 없었다. 연애든 결혼이든 사랑이든, 어쨌든 상대방이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재의 관계보다 중요한 건 상대의 의지였다. 아도라는 그럴 의지가 없었다. 보내온 편지를 수 번쯤 다시 읽고, 어떤 모습으로 활자를 꾹꾹 눌러적었을까 상상하고, 편지지에 적힌 글자가 귀여워서 좀 웃고, 그러다가도 그런 자신이 낯설어서 괜히 몸을 바로세우는 짓을 하는 건 비센테 홀로뿐이었다는 말이다.

비센테를 조금이라도 의식했다면 그가 답지 않게 두 번이나 권했을 때 고민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에게 말을 꺼냈을 리 없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비센테는 어쩐지 열이 올랐다. 스스로가 머저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건 아는데 그것보다 좀 더 잘할 순 없었는지 돌이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혼하기 싫다는데, 상대가 누구든 생각할 것도 없다는데 그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비센테를 괜한 희망에 빠뜨리는 그 혼인의 가능성이 그 신실한 영애에게는 고려할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모조리 의미 없는지 모른다. 전부가 자기위안이다. 설사 결혼을 생각한다 해도 아도라는 비센테를 염두에 두지 않을지 몰랐다. 결혼을 원한다고 해서 그가 선택 받을 수 있을진 알 수 없었다. 아도라는 자주 퉁명스러웠고, 그와 싸우기도 자주 싸웠으며, 그건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조금 멀었으므로. 하기야 비센테도 처음부터 아도라에게 살갑진 않았으니 그게 당연했을지 모른다. 사랑에 빠져 비이성적이 된 남자는 걷는 내내 또 후회했다. 처음부터 조금 더 다정했더라면 지금은 좀 나았을지 모른다는, 몹시 비논리적인 생각으로.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지났고 과거를 돌릴 수 없는 비센테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두 가지뿐이었다. 영영 포기하고 마음을 놓으며 여자의 행복을 빌어주거나,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라도 어떻게든 여자가 ‘그런 마음’이 들게끔 노력하거나.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선택지였다.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뭔가 바뀔 린 없었으니까. 사실 이대로 마음을 이어가는 건 아도라를 존중하는 선택도 아니었다. 마음이 접어진다고 해서 접어지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노력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도라가 원하는 대로, 그저 친구로 남자는 노력.

그걸 알면서도.

‘또……! 오고요.’

신전을 빠져나오던 비센테는 결국 우뚝 멈춰 섰다.

분명 안다. 아도라는 비센테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고, 그건 오로지 비센테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가 주었다고 해서 아도라가 돌려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되레 부담스러운 감정을 강제로 떠안길 판국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종종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관계가 나았다. 어색하게 그를 피하는 아도라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아는데도.

그러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져서.

‘심심하거든요.’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 이 모양인 것이다.

*

아도라는 지나치게 유려한 자신의 친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아니, 사실 친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면 나름 친구라고 불러도 좋을 사이 아닐까? 서로 이유 없이 근황도 알려주고, 안부도 묻고, 그러면 뭐 친구지.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 이제는 서로 퉁명스러운 말투라도 거리낌없이 대화하니 못해도 친한 지인쯤은 된다고 생각했다. 아도라 자신도 자신이지만 솔직히 비센테도 막 따로 친구가 많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점도 문제였다. 친구랄 게 없어서인지 비센테는 유독 아도라에게 다정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예의가 없진 않았지만, 느낌이 다르지 않나? 몸에 배인 듯 적절한 예의와 유독 신경 써주는 듯한 다정함은 판이하니까. 한두 번은 넘겼지만 곧 확신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비센테는 정말 아도라에게 다정했다.

그게 문제였다.

아니, 그런 얼굴로 매번 웃으면 아도라더러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런 목소리로 자꾸 부르면, 무슨 일이 있다고 할 때마다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오면 어떡하란 말인가. 그냥 햇볕 아래 얌전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홀릴 것 같이 생겨 놓고!

결혼하기 싫어서 여기까지 뛰쳐왔다지만 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마음에 닿는 사람을 만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결혼을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학은 흥미로웠고 충분히 인생 전부를 신전에서 보낼 의향이 있었지만, 또 완전히 신에게 삶을 바치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만큼은 아니었으므로. 사실 다른 기회가 있었다면 신학교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것도 문제였다.

자꾸 나한테 왜 이렇게 구나 고민하게 되니까.

짜증 나! 아도라는 침대에 냅다 머리를 박으면서 이불을 뻥뻥 찼다. 아무런 사심도 없을 말들을 이리 꼬고 저리 꼬아서 듣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틀린 말은 아닌가? 진짜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그게 3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아악. 신음이 비명이 되는 걸 느끼면서 아도라는 아예 이불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비센테가 들으면 정말 무슨 생각을 했느냐 경멸할지 모르지만, 아도라가 르나스에 머무른 건 그의 탓이 컸다. 조금 많이 컸다. 아니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학문이 재미있다고 해도 인간관계는 중요했다. 그놈의 관계 쌓기 때문에 신학교로 온 아도라로서는 특히 그랬다. 자꾸 열받게 구는 이들 사이에서 꾹 참고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건 적성에 맞는 공부만큼이나 비센테의 덕이 컸다. 에르셀라와의 관계가 걱정스럽기도 했고, 어쨌든 그들은 친구고…… 무엇보다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자주 보려면 여기에 남아야 했으니까.

물론 전부 비센테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얼굴도 모르는 작자와 결혼하기는 싫었고, 또 숨겨둔 연인이 있을까 의심하게 만드는 놈들을 만나는 건 더 싫었고, 신전 일은 충분히 좋았다. 비센테의 비중이, 막, 작진 않아서 그렇지.

“하…….”

간신히 터지려는 비명을 한숨으로 막았다. 아도라는 이불로 제 얼굴을 꾹 누르면서 오늘 만난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신전의 새하얀 벽 앞에 서서 순순히 여자의 말에 대답하던 목소리를.

심정이 간질간질했다.

그래서 아도라는 좀 울고 싶었다. 그쪽은 아무런 관심 없을 텐데. 그야 비센테는 누가 봐도 인기 많을 상이고, 대놓고 우리는 친구 사이고, 둘 다 파기됐지만 아무튼 서로의 약혼자도 봤고, 그랬으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신학자 같은 걸 권해서 괜히 기분 묘해지게 만드냔 말이다. 왜.

진짜 그 얼굴로 그렇게 좀 안 굴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생각하며 아도라는 눈을 감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게 그뿐이 없었다. 꿈에는 그 얼굴이 안 나오길 기도하기. 나오면 진짜 중증이라는 거니까. 성서 구절을 애써 되뇌며 오늘도 간신히 잠을 청할 수밖에.

*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건 얼마 후였다.

눈치가 빠르고 생각의 고민이 깊다는 죄로 파문당한 영애는 쿵쾅쿵쾅 신전을 빠져나오며 속으로 수십 번의 욕을 짓씹었다. 그나마 충동을 막아주던 신에 대한 사랑을 모조리 박살내버리는 신전의 횡포였다. 몰라! 신관이고 신학자고 죄다 망해버려라, 그냥!

*

그리하여 한달음에 꽃밭까지 달려온 남자를 마주하고, 아도라는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고작 정이 떨어졌다는 의식, 그뿐이었는데.

온통 푸른 꽃잎이 선명한 들판 위에서, 자각조차 하지 못 한 마음 위로 기이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얽히며.

"……."

"……."

푸른 꽃에 둘러싸여 새빨갛게 물든 남자를 보면서 아도라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아, 정말이지.

자꾸만 사람을 오해하게 만든다고.

*

오해해도 괜찮지 않을까?

당혹감에 젖은 보랏빛 눈동자와, 그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달아오른 뺨을 보면서 비센테는 무심코 생각한다.

‘이제 아니에요.’

신관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던 목소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불에 덴 듯 멀어지는 시선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아주 조금 정도는.

아주 조금 정도는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되뇌는 얼굴은 사랑에 전염된 것처럼 붉었다. 그러니까, 사랑에 전염된 것처럼.

*

“오빠, 가장 예쁜 걸 골라달라고 했지?”

그리고 돌고 돌아 봄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훌쩍 자라는 아나엔은 모자를 눌러쓰고 성실하게 오빠를 돌아보았다. 후원 한켠에 그림처럼 서서, 소담하게 피어난 꽃망울을 보면서 비센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로 바람이 흘러와 꽃향기가 짙어진다. 아나엔은 신이 나서 다시 물었다.

“누구한테 줄 건데?”

웃음을 흘린 비센테가 무릎을 굽히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통 새하얀 꽃밭이 바람에 따라 휘날리고, 그가 다정히 대답했다.

“고백을 할 거야.”

미루고 미뤄 온 문장들.

돌고 돌아서,

이젠 정말 봄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