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왕
로드 오브 히어로즈 / 프라로드
“그래도 질릴 때까지 모셔 주겠다고 했잖아, 프라우.”
날 좋은 오후에 로드는 그런 말을 했다. 순진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프라우 레망은 포도사탕을 까먹으며 빙글빙글 제 주군을 놀리다가 그 말을 듣고서 멈춰 섰다.
어쩌다 그런 말이 나왔던가? 방금까지만 해도 휘하 영웅들 이야길 하며 시시덕대고 웃지 않았던가.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기억이 어긋났다. 말을 잇는 로드의 얼굴 위로 낯선 색감들이 덧입혀졌다. 매번 그랬다. 이전의 기억을 언급하는 로드를 마주하면 어딘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프라우 레망은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했었지만.
그랬어. 고대의 엘프는 중얼거린다. 질리지 않았다고 했지.
다시 널 찾을 거라고 했지.
앞으로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었지, 로드.
“로드는 그 말을 듣고 어땠어?”
충동을 참지 못하고 말을 뱉어내자 로드는 눈을 깜박였다. 프라우 레망은 피어 오르는 모닥불에 비치는, 의중을 모르겠다는 낯을 보다가 다시 습관적으로 웃었다. 제 앞에서는 놀랄 만큼 유순해지는 그 얼굴이 전장에 가면 단단해지는 걸 안다. 단단해지는 것 같다가도, 꼭 중요한 부분에서는 다시 약해지는 것까지 안다. 모든 걸 껴안고 가려고 들고, 감히 바라지 않는 구원을 읊으면서, 결국은 그게 자신을 갉아먹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면서도.
로드. 그날 햇볕에 온갖 색으로 빛나던 머리칼을 기억해. 짙은 검은색이다가도 붉어지고 시야를 가릴 만큼 길었다가도 한 손에 잡힐 듯이 짧아졌다가, 그보다는 조금 더 길어졌던 머리카락 말이야. 눈색도 비슷했지. 비가 올 때면 짙어 보였고 구름 아래서는 옅게도 보였어. 언젠가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색이었어, 눈이 오던 날에 온통 흰빛이 범벅되어 있는 것 같다고 네가 그랬잖아. 웃는 얼굴로 그랬어, 로드.
그리고 프라우 레망은 그 모든 걸 기억한다.
다른 모든 이와는 다르게 그랬다.
“기뻤어, 로드? 내가 질릴 때까지 모신다고 해서?”
넌 참 약해, 로드. 남들은 동시에 강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프라우 레망만은 일관적이었다. 로드는 지극히 유약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프라우 레망은 강함을 숭상하고 무엇보다 흥미를 중시하지만 결국 그의 옆에 왔다. 그건 강약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라우 레망은 질리지 않을 테고 질리는 건 오직 당신이므로.
“로드가 나한테 질리는 날이 와도 내가 로드한테 안 질렸다고 매달릴지 모르잖아.”
아주 무겁고 무서운 말이라고, 사실은. 부러 흉포한 척을 하자 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프라우 레망을 온전히 다 이해했을 린 없다.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았다면 제아무리 로드라도 웃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 로드는 짊어진 것이 아주 많고…….
“그런 걸 걱정했어?”
프라우 레망과 ‘이 세계’는 사실 짊어진 것에 속하지도 못하는 단순한 흥미의 구성이므로.
“내가 네게 질릴 일은 없어, 프라우. 네가 내게 질릴 일은 없어도.”
거짓말.
우리는 오로지 당신의 손 아래에서 움직이고 죽어갈 텐데.
“……약속이다, 로드?”
그러나 혀뿌리 아래 문장을 내려두고 프라우 레망은 단지 그 말을 한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걸 알아. 혹여 뱉어도 로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로드는 내 세계에 가장 처음으로 움직인 사람이고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걸 알진 못하니까.
로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물론이지.”
고요하고 잔잔한 웃음이 내려앉는 걸 보면서 프라우 레망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아, 그래. 로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쩌겠어. 결국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법이다. 무슨 관계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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