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우가 활을 쏠 뿐인 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 류청우+박문대 NCP
1
박문대가 이변을 느낀 건 새벽이었다.
그 밤에는 모니터링이 유난히 길었다. 굳이 그러려고 하던 건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오후에 있을 개인 스케줄에 맞추려면 아슬아슬했다. 앞으로는 인터넷을 좀 줄여야겠다고, 누구도 믿지 않을 생각을 하며 노트북을 정리하던 차였다.
낯선 소리가 들렸다.
그건 바람소리와 흡사해서, 박문대는 한 박자 늦게서야 위화감을 잡아냈다.
창밖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류청우?”
고요한 방 안에 목소리가 던져진다. 들은 이가 없었으므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썹을 찌푸린 박문대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초침이 째깍거리며 새벽 한 시를 향해 있었다.
2
“일찍 자야지, 문대야. 애들이 걱정하겠다.”
인공적으로 꾸며진 산책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숙소 바깥 정원에 서서, 류청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박문대가 숙소 밖으로 나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태도다. 달빛이 고요하게 쏟아지는 풀잎이 반짝거리고, 이미 어둠이 번진 바깥에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주위를 힘없이 밝히고 있다. 다 아는 놈이, 단둘인데도 애 취급하는 저의가 또 뭔가 싶어 박문대는 인상을 찡그렸다. 평소에도 큰세진과 함께 아닌 척 놀려먹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애초에 이 새벽에도 먼저 나와 있던 게 누군데? 걱정할 거 알면 본인도 잠이나 잘 것이지…….
그 수많은 반문의 나열에서, 퉁명스러운 심정 그대로 단어를 뱉지 않은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지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둠 아래로도 류청우의 손에 들린 것이 선명히 보였기 때문에.
“……여기서 혼자 뭐 하십니까?”
간신히 조합해낸 문장도 썩 좋은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류청우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활이었다.
“글쎄.”
하고, 류청우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듯이 웃었다.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박문대는 알 수 없었다.
3
말하자면 그렇다. 박문대에게는 간절히 바라던 일이 그다지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표현하긴 뭣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루고 싶은 일은 분명히 없었다.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강제로 놓아야 했던 적도, 그 상태로 일상을 영위해 본 적도 없다. 차라리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문대 또한 시스템에게 삶을 저당 잡힌 적이 있으므로. 차라리 지금의 박문대에게서 ‘테스타’를 빼앗아간다면 유사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문대는 이곳에 서 있다.
그러므로 박문대는 류청우를 이해할 수 없다.
퍽도 당연한 명제를 의미 없이 되새기면서.
“……활 쏘시게요?”
“음.”
이미 본 걸 무시할 수도 없으므로 결국 다시 물었다. 류청우는 여상한 낯으로 웃는 소리만 냈다. 이 새끼 활 봤다고 멘탈 터진 건 아니겠지. 아니, 본 수준이 아닌 것 같긴 한데……. 흘금 눈치를 봤지만 매끄러운 낯은 변함이 없었다. 그게 더 아리송했다. 번아웃 땐 차라리 대놓고 티라도 났지, 속 곪아들어가면서 모른 체하면 케어하는 게 더 힘들다.
“그냥 운동 삼아 잠깐.”
한참 뒤에야 류청우는 단정히 대꾸했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느린 대답은 아니었지만 박문대는 답답해졌다. 그 답답함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는 점이 제일 답답했다. 팔짱을 끼고 서자 류청우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시간을 의식한 웃음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거든. 내가 계속 활을 쐈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
“알아. 불가능한 이야기지.”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딱히 덧붙일 대답도 없었다. 박문대가 입을 다물자 류청우는 덧붙였다. 그냥 다들 하는 생각이나 후회 같은 거야.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문대 너도 아이돌이 안 됐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지 않아? 그야 그렇긴 했지만, 박문대와 류청우는 결이 달랐다.
대답하지 않는 박문대를 재촉하는 대신 류청우는 씩 웃었다. 미소는 단정했고 목소리는 덤덤하다.
“들어가서 자, 문대야. 벌써 새벽인데.”
“청우 형은요?”
“나도 금방 들어갈 거야.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거든. 한 발만 쏘고 들어갈게.”
어쩌다 보니 상념이 길었지만, 중얼거리면서 류청우는 바닥에 놓인 화살을 집어 들었다. 박문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먼 나무에 걸린, 류청우가 걸어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녁판을 들여다볼 뿐이다. 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다. 달빛 아래서 류청우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서 있는 박문대를 보고 류청우는 다시 웃었다.
그건 분명히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라, 박문대는 그의 뜻대로 해 줄 수가 없어졌다.
“같이 들어가죠.”
“음, 정말 한 발만 쏘고 들어갈 건데.”
“그 정도면 바람 좀 맞아도 상관없고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제아무리 류청우라도 불쾌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류청우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을 뿐이다. 바람 소리만이 선명하고 고요한 풀잎 위로는 알알이 달빛이 맺혔다. 검은 머리칼이 스치는 풀잎을 따라 흔들리고, 난처해하는 기색조차 없이 그가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승낙이나 마찬가지다.
짧은 호흡 끝에 그가 활시위를 당긴다.
걸려 있는 화살은 불빛을 받아 선명하고, 류청우보다 두어 걸음 뒤에 선 박문대가 볼 수 있는 건 어둠 속에 묻힌 흐릿한 과녁판뿐이었다.
그리고,
4
바람소리가 선명했다.
5
“이만 들어갈까?”
처음 정원 안에서 마주했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류청우는 웃었다.
박문대는 류청우의 손에 들린 과녁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굳이 그 표정을 명명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조금은 후련한 것처럼 활을 챙기는 남자의 얼굴이 정말이지, 무어라 말 붙일 것 없이 평소와 같아서.
6
정중앙에 꽂힌 화살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새벽이 고요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고 류청우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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