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우리는 피터팬을 부른다 / 상현이플

책갈피 by 서
6
0
0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잠시 짚어 보자면.

천이플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그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건 비단 곽상현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제 온 삶을 바쳐 어떻게든 그 애와 함께한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시간이 지나도 천이플은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했으므로. 그러니까, 천이플이 자신을 위해, 세계를 위해,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말했다면 울면서든 웃으면서든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내던질 사람은 그토록 많았던 것이다. 곽상현은 알고 있다. 그도 기꺼이 그럴 수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죽지 마. 너는 꼭 살아.'

'……왜 하필 너여야 하는데. 왜 네가 가야 하는데.'

'누군가는 가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러지 않았겠지.

차라리 대신 가게 해 달라고 빌어도, 살아남아 이후 나보다 많은 사람을 구할 건 너라고 말해도 소용 없었을 테니까.

그랬다. 천이플을 그런 사람이었다.

곽상현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환히 울리는 교문 앞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선다. 퍽도 화려하게 그 이름이 박혀 있다. 특수평등미래고등학교. 누군가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을…….

그들이 끝내 버리지 못 했던 어느 구간 앞에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천이플이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지긋지긋하게 늘어가는 사망자가 한 명 더 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는 여전히 있었다. 세월은 그저 흐르고만 있었다. 벽은 여전히 있었다. 여전히 하층 계급은 한국특수평등미래고등학교의 입시에 목을 맨다. 상류층 계급은 여전히 6계급을, 5계급을, 4계급을, 그 윗계급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가끔 멍청이처럼 사랑에, 신의에, 우정에, 제 밥벌이도 되지 않는 옳음을 향한 관철에 모든 걸 벗어던지고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어느 쪽에서든 비웃었다. 그러니까 벽은 여전히 있었다.

금이 간 그대로.

"이플아."

평등나무 앞.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곽상현은 가만히 읊조린다. 이제는 완연한 성인을 넘어 희미하기 짝이 없는 연륜이나마 자리잡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언젠가 최초로 입에 담았던 다정한 이름이었고, 기이하게도 놓치고 싶지 않아 망설여가면서 부드러움이나마 녹여낸 어조였다. 언젠가부터 곽상현은 그렇게 부드럽게도 천이플을 불렀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랬다. 그토록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목소리만큼은 똑같았다. 천이플을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열일곱 살의 천이플이 영영 똑같을 것처럼.

"……오늘도 꿈을 꿨어."

한참 침묵한 채 사진을 들여다보던 곽상현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는 어조. 다정한 부드러움을 덧댄 태도.

네 꿈을 꿨어.

꼭 울 것처럼 웃을 것처럼 그런 말을 했다.

"이젠 울진 않아. 언젠가……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네 꿈을 꾸고도 울지 않게 되는 날이 오더라. 시간이 길긴 했으니까. 백찬영이 저지른 거 봤지. 걔 그 짓도 이만큼 정도 안 흘렀으면 못 했을 거야. 너도 알겠지. 네 오빠니까. 다른 애들이야 뭐, 네 일이라면 뭐든지 발 벗고 나설 준비 된 애들이잖아."

그것은 백찬영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곽상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여전하다. 누구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으니까. 여전히 보다 어린 아이가 상처 받고, 여전히 보다 다정한 아이가 먼저 무너지고, 여전히 보다 약한 이가 도태된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그들만은 알았다. 천이플은 모든 세계는 구하지 못했더라도 아주 작은 세계만은 구했다는 걸. 그러니까 천이플은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 작은 세계를, 잔뜩 흐트러지고 더러워져서 의미도 영향도 없어 보이는 희미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 그 세계들을 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너는 이미 알았겠지. 곽상현은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사진을 앞에 두지 않아도 생생한 낯을. 야구모자를 대강 뒤집어 쓴 채 후드티를 입고,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온갖 것을 향한 애정을 담고 해밝은 목소리를 마구 던지던 그 애를.

아니, 어쩌면 몰랐을지 모른다. 의미 하나 없는 삶이었더라도 넌 구했을 테니까. 그래서 천이플이었으니까.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흐르고는 있다. 천이플이 사랑하여, 천이플이 선언하여, 천이플이 바라던 대로.

"네가 미래고에 있던 때랑 같아. 천천히 흔들리고 있어. 천이플답게."

천이플의 죽음을 곱씹었을 때 슬퍼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때 꿈을 꿔도 울지 않게 되었지만 잊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미지근한 호의 사이에 한결같은 너를 종종 떠올리며 울음보다 웃음을 짓게 되었을 뿐이다. 너는 유쾌한 사람이었으니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누구든지 사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러나 곽상현은 괜찮아지는 법을 알고 있다.

"네가 사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야."

천이플이 사랑해서, 천이플이 선언해서, 천이플이 바랐던 것들. 그런 사람들. 그들은 서서히 괜찮아질 것이다. 종종 울겠지만, 그리고 또 종종 웃겠지만, 침울해할지 모르지만, 잊지 않은 채 계속.

그것이 천이플이 남긴 세계이므로.

천이플이 남겨서, 이제는 곽상현이, 백찬영이, 오경아가, 강선규가, 진하윤이, 선우 홍빈이, 박준서가, 임현석이, 이경하가, 안윤지와 도강림이, 그리고 조아정이. 그들이 남겨서 천이플을 알지 못 하는 순간의 세계까지 남도록.

곽상현은 천이플을 사랑했다.

천이플이 남긴 세계마저 사랑했다.

"다 괜찮아지겠지. 너라면 어쨌든 후회 따위 안 했겠지만, 그래도 걱정은 할까 봐."

평등나무 앞. 어디에든 존재하는 천이플에게, 곽상현은 속삭였다. 어떤 느낌으로 그 말을 했는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우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난 계속 여기 있어."

앞으로도 여기 있을게.

돌고 돌아 다시 한 번 겨울이었다. 아직 꽃망울 돋아나지도 않은 그 벚나무가 바람결을 타고 얼핏 흔들리는 듯도 싶었다. 곽상현은 괜찮았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어서, 천이플이 그렇게 완성해냈기 때문에 괜찮을 수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