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온] 어쩌면 1

백업 by 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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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1차 창작임을 밝힙니다.

* 본 글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합니다.

꽤 빠르게 달려와서 호흡이 불안정해졌는데, 이번에도 늦었다. 소통 수단의 한계인가. 수혁은 생각했다. 일본군들이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건만 눈에 보이는 건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회색의 매캐한 연기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었다. 진득한 피 냄새가 섞여 구역질 나게 만들었다. 수혁은 이내 한숨을 푹 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야속하게도 구름이 띄엄띄엄 있는 좋은 날씨였다. 원래 같았다면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았을 텐데. 이렇게 좋은 날에 땅에서는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으니, 조상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싶었다. 다시 지상으로 눈길을 돌리니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잃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죄책감이 수혁의 목을 조여와 이내 눈길을 거뒀다. 목숨이 나라 바치는데 그렇게 중요한가.

수혁은 독립운동가였다. 어린 독립운동가. 수혁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애국심이 남들보다 더 큰 아이. 다른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때 동화를 듣곤 했지만 수혁은 나라를 지킨 여러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곤 했다. 게다가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가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해 놀곤 했으니.

21살 때 조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괜찮다 말했지만 그는 느꼈다, 뭔가 숨겨져 있는 게 있다는 걸. 알고 보니 나라가 아예 일본 것이 되었단다. 조국을 잃는 게 이토록 슬픈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성숙했던 수혁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하겠다 나섰다. 처음에는 다른 동지들이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키만 훤칠하지, 딱히 잘 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혁은 나라를 지키고자,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에 총을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했고, 독립운동 단체 내에서는 수준급이 되었다.

어느 분야에서 수준급이 되었단 말은 그만큼 그를 필요로 하는 일도 많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거의 모든 전투에 나가 싸웠고, 부상도 종종 있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는 그저 몇 주가 지나면 사라질 신체적 고통이었으니. 그러나 일본군의 총알에 맞고 힘없이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면 마음이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아니, 타들어 간다는 표현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잘 지내고 있다가도 그 기억이 가끔 떠올라 괴롭히곤 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비명과 총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듯했고,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만 봐도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전투에서의 고통뿐만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도 쉽지는 않았다. 꽤 적당히 사는 집에서 태어난 수혁은 어렸을 적에 부족함 없이 삼시세끼를 다 챙겨 먹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독립운동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다른 사람들은 밥을 굶고 차라리 무기 등을 사자는 의견이 현저히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어린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면 조국을 위해 싸울 자격이 안 되는 것이었다.

수혁은 그저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에 이런 자신을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한 가지 방법을 택했다. 그건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이라면 얘기하되, 사적으로는 친분을 가지지 말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인가 싶었지만 아예 접촉이 없다기 보다는 정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그 사람을 아끼고, 정을 줬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긴 시간 동안 괴로워 할 게 뻔했으니.

그로 인해 수혁의 밝았던 성격은 조용하고, 차가운 성격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다가가려고 해도 말과 행동에 어설픈 가시가 돋아있어 이내 등을 돌리게 만드는 그런 성격. 수혁은 모순적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긴 싫었지만 한 명이라도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확실히, 어린 아이가 맞았다.

아무튼 간에 그는 조금 더러워진 이곳을 정리하고 발길을 돌렸다. 하루하루 일본군에 의해 대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슬픈 감정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혁의 머리에서는 슬프면 눈물이 나온다, 라는 공식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봐 가져왔던 작은 총은 사용하지도 못 한 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수혁이 임시로 정해둔 독립운동 단체의 건물에 오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말은 하지 않지만 무언가 기대하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수혁을 자리에 앉혔다. 죄책감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 앉으니 전에는 못 보던 얼굴이 보였다. 수혁이 머리를 쥐어짜며 자신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할 때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게 된 아이다. 어린 나이에 자발적으로 한다고 했으니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고... 어 자기소개?"

"정유온입니다. 나이는 23살이고 몸으로 뛰는 건 잘 못 하지만 계획을 짜는 일과 같은 머리를 쓰는 일을 잘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어렸을 때의 수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똘망똘망한, 자신감으로 차 있는 그 눈빛이 부러우면서도 이내 걱정스러워졌다. 아 쟤 나중에 무조건 상처 받는다. 수혁이 남들과 함께 박수에 동참하고 무기를 재정비하러 나가려던 차에, 말은 다시 이어졌다.

"유온이가 어리니까 수혁이가 같이 옆에서 도와줬으면 하는데. 괜찮지?"

"아, 네. 그럼요. 제가 뭘 가르쳐야...?"

"그런 건 딱히 없고 그냥 유온이가 너 따라다니고, 네가 유온이 따라다니고."

수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사람과의 접촉이 굉장히 많아지겠군. 수혁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건 다 조국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절대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만 잘 할 게 아니라 모두가 잘 해야 했고, 또 같이 협력해야 했기에. 수혁과 유온 빼고 모든 사람들이 좁디좁은 책상에서 일어나 자기의 할 일을 하러 갔다. 유온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마치 뭐라도 했으면 하는 눈빛으로.

수혁은 일어나 유온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가르칠 것도 없으니 제 할 일을 하러 가면 된다 생각했다. 무기들을 재정비하러 가는 동안에도, 다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에도 유온은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이 없는 건지 눈치가 보여서 말을 안 하는 건지. 수혁은 오랫동안 옆에 있을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어색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친해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윤수혁, 참 모순적이지. 결국 수혁은 총구 확인이 다 끝나갈 때쯤에 어쩔 수 없이 말을 걸게 되었다.

"총 다룰 줄 몰라?"

"... 네. 근데 배워보고 싶긴 합니다."

"그래?"

한 박자 늦은 대답과 그런데도 배워보고는 싶다는 대답. 뭐야 이건. 총을 다루지 못 하는데 그저 의지와 머리 잘 굴린다고 들어올 수 있나? 하긴 수혁도 의지, 용기, 자신감 이 세 가지 조건만 가지고 들어왔으니. 수혁은 유온도 참 별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대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싸운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유온이 한 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수혁은 유온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가까이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뭔 말이냐, 유온과 어느 정도 친해지되 사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는 마음이었다. 수혁도 참 복잡했다. 인간관계는 적게 맺을 수록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았기에 유온과 친해지지 않는 게 좋아 보이다가도, 그렇게 잘 안 챙기는 모습을 보이면 혼날 게 뻔했다. 그 어린 아이를 내버려 두고 뭘 한 거냐며. 나도 어린데 난 성숙해 보이나 봐? 수혁의 큰 키와 차가운 눈빛은 그를 성숙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도 고작 한 살 차인데 이렇게까지 대우가 다르다니. 이게 말이 되나.

수혁은 이내 유온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침대로 갔다.

유온은 다른 아이들과 어렸을 때부터 달랐다. 다른 아이들이 밖에서 뛰놀며 땀을 뻘뻘 흘릴 때 유온은 집 안에서 글을 읽고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온의 피부는 남들보다 훨씬 하얗고 부드러웠다. 남들 부모가 겪는 자식으로 인한 걱정들도 유온의 부모는 겪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온의 부모는 자신들의 아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우면서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 하는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했다. 게다가 유온의 관심사는 역시나 아이들과는 달랐다. 책이 비싸서 한 책을 닳도록 봐서 외울 정도였다. 유온은 그야말로 천재였다, 한번 본 것은 꼭 기억하고 머리를 쓰는 데 능한 아이.

이런 유온을 보며 부모는 그를 더욱 총명하게 키우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그저 농부에 불과했고 그 말인즉슨 유온도 나중에는 농사를 도우며 자신의 머리를 쓰지 못 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유온이 성인이 되고 1년 간은 농사를 도우며, 그저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는 그저 남의 꿈에 갇혀 사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으려던 때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다. 독립운동 단체.

그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남들보다 큰 것도, 나라 상황에 관심이 많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독립운동 단체인 것 같아 부모 몰래 집을 나온 것 그 이상은 없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대한 독립은 유온에게 있어서는 그저 공동의 목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독립운동 단체에 막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첫 날에, 수혁이라 불리는 남자가 물었다. 총을 다룰 줄 아냐고. 당연히 몰랐기에 몰랐다 대답했고, 자신도 모르게 배워보고 싶다고 얘기가 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머리에서 조종 하듯이. 수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온은 남들과 얘기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그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냈다. 특이하시네. 유온은 수혁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심지어, 전에는 생각 해보지도 않은 대한 독립까지도.

"총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수혁씨한테요."

"뭐?"

수혁이 유온과 같이 다닌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였다. 크게 사고를 일으키는 성향은 아닌 것 같아 내심 좋았는데. 이른 아침에, 야외에서 총 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와서는 하는 말이, 뭐? 총 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나한테? 수혁은 권총을 내려두고 유온을 훑어보았다. 자신보다 조금 작은 체구에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몸. 아니, 애초에 밖에서 뛰어논 적이 있기라도 한가? 수혁은 이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일은 없을 거라 신신당부하던 게 생각나 분했다. 그러나 수혁은 유온의 저 초롱초롱한 눈빛에 약했다. 결국 수혁은 또 조국을 향한 마음 하나로 그에게 총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로 결심했다.

"가르쳐주긴 할 텐데, 너 뛰어놀긴 해봤냐?"

"아니요. 없습니다."

"근데, 그 체력으로 총 쏘면서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난 절대 너 그거 못 한다. 체구도 작고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인데 그 체력으로 뛰어다니면서 총 쏘면 너 쓰러져. 그런데도 배우고 싶은 이유는?"

공격적으로 들어오는 수혁의 말에 유온은 당황한 듯 보였다. 이유라, 딱히 생각해본 적 없었다. 대놓고 자신과 친해지기 싫은 듯 억지로 말을 거는 수혁에게 다가가고 싶어 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 한 것인데. 그건 수혁이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것 같았다. 유온은 짧은 시간 그 똑똑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첫 번째, 나가 싸우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신빙성이 너무 없어서 탈락. 두 번째, 사실 지인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해 복수하고 싶어서. 거짓말 잘못 했다가 아예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 탈락. 세 번째,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약간의 거짓말이 섞이긴 했지만 가장 그럴 듯해 보였다.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서입니다. 제가 대한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진심을 봐주시고 절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쪼끄만 게 말은 잘 하네? 알겠다. 이따가 아침에 회의하고 알려줄게."

수혁은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유온이 신나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수혁은 차가웠던 얼굴이 더 굳고, 아무도 못 듣게 혼자 중얼거렸다. 머리 존나 잘 굴리는 새끼. 수혁은 사실 눈치가 굉장히 빠른 사람이었다. 그제야 수혁은 알아챘다, 정유온 쟤 독립에 관해서는 진심이 하나도 없다는 걸. 진짜로 대한의 독립을 위해 배우려고 했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을 터인데 유온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대답했기에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뭐 들키면 알아서 하겠지."

수혁은 남을 속이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유온은 궁금했다. 저 어차피 다 들킬 거짓말을 하면서도 총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독립에 대한 갈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이 단체에 제 발로 들어온 이유를.

"수혁아 유온이 잘 챙겨 다니네, 아까는 총 다루는 방법 알려준다고 해서 애가 신났더라. 은근히 정이 있어?"

"아 저야 뭐 맡기고 주신 역할이니 열심히 해야죠. 약속한 시각이 돼서 이만."

수혁은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뒤돌았다. 내가 진짜 독립운동만 아니었으면 저 사람부터 죽였어. 맨날 속이고 나한테 다 떠맡기고 아주 그냥 악마야 악마. 수혁은 별의별 생각을 하며 권총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는 딱히 열심히 가르쳐줄 마음이 없었기에 대충 하고 나오려 했다.

"수혁씨 늦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한테 고마워해야지 인마."

수혁은 이내 희미한 웃음을 짓고는 유온의 뒤에서 그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너 운동 안 해봤지? 유감스럽게도 네. 너 진짜 뼈밖에 없다. 저도 압니다. 수혁은 대충 자세를 잡아주고는 유온에게 말했다. 한번 쏴 보라고. 수혁은 유온이 그 총의 힘을 못 버틸 걸 알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체구로 버틴다면 그건 진짜 박수쳐줄 만한 일이었기에.

수혁의 예상은 딱히 다르지 않았다. 유온이 방아쇠를 잡아당기자 유온은 총알이 나가는 힘을 못 버티고 넘어졌다. 약해 빠졌어 저 새끼는. 수혁은 넘어져 아파하는 유온을 뒤로하고 유온이 쏜 과녁을 보았다. 타격률은 나쁜 편은 아닌데, 역시 힘이 부족한 건가. 그는 이내 유온이 나뭇가지에 긁혀 팔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는 연습을 뒤로하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자금을 모으려 근처 식당에 일을 하러 나가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되새기려 나간 터라 수혁과 유온밖에 없었다. 수혁은 말없이 유온의 피를 지혈했다. 사실 피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피는 생전 처음 본다는 얼굴이어서 귀찮지만 지혈까지 해줬다. 수혁은 이내 어딘가 구석에 박혀있던, 상처가 났을 때 쓰면 된다고 얘기했던 즙 비스무리한 게 떠올라 발라주고는 눈길을 돌렸다. 유온도 이런 나름의 다정한 수혁이 신기했는지 말없이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수혁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유온이 짜증 났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데 이런 특별 취급 받는 것도, 총 하나 다룰 줄 모르는 것과, 체력은 하나도 없는 것도, 작은 상처에도 자신이 치료해줘야 되는 것도, 그냥 모든 게 짜증 났다. 수혁은 자신만의 규칙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되 안 좋은 감정을 만들지는 말자. 수혁은 문득 이 규칙이 정유온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수혁은 이내 유온이 뭘 하는지 보려고 밖에 나가보았다. 유온은 가느다란 체구를 가지고, 힘든 듯 뛰고 있었다. 유온이 수혁을 발견하자 유온은 달리는 걸 멈추고 수혁를 바라보았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걸 보니 그가 꽤 노력했단 걸 알 수 있었다.

"정유온, 뭐해."

"아. 체력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약간의 달리기를..."

"간절해?"

수혁은 유온의 말을 끊고 물어봤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간절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간절함을 물었다. 수혁의 눈에는 유온은 그저 겉으로만 의욕이 넘치고 속은 텅 빈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유온의 눈에는 꼭 독립이 아니더라도 다른 목표를 향한 독기가 차 있었다.

"전 수혁씨한테 꼭 배우고 싶습니다. 수혁씨는 아직 제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바라는지 모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혁씨가 제 간절함을 알아보시고 절 진심으로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말 하나는 아주 잘 해. 그래."

수혁는 이번만큼은 경계를 버리고 그를 진심을 다해 총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기로 마음 먹었다.

수혁이 유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다음 둘의 관계는 이러했다, 한 쪽은 살짝 밀고, 한 쪽은 많이 당기는 사이가 됐다. 수혁는 유온이 귀찮으면서도 없으면 허전했다. 어떻게 보면 수혁도 단순했다, 짜증 난 마음 가득이었는데 노력하는 정유온을 보고 그 마음이 단순에 풀렸으니. 게다가 기초 체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유온인데 지금은 전투에 나갈 만큼은 나지만 긴급한 상황에 자기 자신을 보호할 정도의 실력은 된 것 같았다. 수혁은 그런 유온을 바라볼 때마다 흐뭇했다.

수혁과 유온은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성향이 안 맞아 고생하던 둘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옆에 없으면 찾게 되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전생에 최소 부부였다는 둥 장난삼아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 둘 사이에는 몇몇 변화가 있었다. 수혁씨는 수혁이 형과 형으로 애칭이 바뀌었고, 수혁은 그런 유온을 애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유온은 이에 꽤 큰 반발을 했지만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귀여운 말투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쓰던 다나까 말투는 그저 편한 존댓말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생기자 수혁은 문득 두려울 때가 있었다. 수혁은 그야말로 인간 폭탄이었다. 우연이겠지만 그와 친해진 사람 대부분이 큰 부상을 당하거나 영원히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쩌면 그가 마음의 문을 닫았던 이유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 걱정은 유온과 같이 있을 때도 문득 생각났다. 내가 이 아이를 죽이면 어떡하지. 물론 수혁은 이런 미신은 안 믿었지만 아무래도 독립운동과 주위 동지들의 부상과, 턱없는 독립자금으로 인해 예민해져 있던 수혁이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신경 쓰였다. 게다가 자신이 가진 이 행복을 누군가 가져가 버릴까 봐 무섭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온과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활짝 웃은 것 같았다. 게다가 차가웠던 마음도 서서히 유온의 온기로 녹아가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수혁은 느꼈다. 아, 나 정유온 좋아하네.

유온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에는 관심 없던 독립이 수혁과 함께 있으면서 얘기하다 보니 관심이 갔고, 공동의 목표에서 그치는 게 아닌 유온의 목표가 되었다. 전에는 잘 웃지 않았던 수혁이 웃는 걸 볼 때면 유온도 웃음이 났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서로의 소원에 관하여. 유온이 호기심에 수혁에게 물은 것이었다. 물론 대답은 알고 있었다만 그저 궁금했다. 수혁의 가치관이.

"첫 번째 소원은 독립, 두 번째 소원은 대한의 독립, 마지막 소원도 대한의 자주독립."

"진짜요? 뭔가 멋지네요."

"난 진짜 대한의 독립만을 보고 살아온 사람이야. 애기는 아직 모르겠다~. 이런 진지한 대화를 꺼내도 그저 웃고. 너 소원 세 가지 다 독립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근데 난 너 믿음직스럽다. 그냥 뭔가 나 없으면 네가 잘 할 것 같은 느낌?"

수혁은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유온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소원이 대한 독립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저렇게 말한다는 게 조금은 무서웠고 걱정 되었다. 그러나 웃음을 보이는 수혁을 보자 그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조금은 대한 독립이 목표가 되었다.

"... 형?"

저 멀리 수혁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전투를 끝내고 오는 길처럼 보였다. 분명 낮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완전히 진 밤이었다. 유온은 수혁에게 달려가서 수혁을 살폈다. 입술은 터져서 피가 묻어 있었고 손과 팔 곳곳에 피가 있었다. 보아하니 수혁의 피가 아니라, 동료들의 피인 것처럼 보였다. 유온은 그제야 자신과 수혁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유온아 왜 기다렸어."

"형..."

수혁은 애써 유온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유온은 알았다, 저 눈빛은 자신은 멀쩡하고 일본 군을 이겼지만 동료들이 떠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유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혁은 유온의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괜히 수혁 앞에서 어린, 생각 없는 모습 보이기는 싫었지만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계속해서 흘렀다.

"왜 울어."

"형, 형은 이렇게 목숨까지 바쳐서 나라 위해 싸우는데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냥 형 다치는 게 속상해요. 전..."

유온은 말을 이내 끝내지 못 했다. 괜히 좋아한다 섣불리 말했다가 관계가 안 좋아질까 봐 두려웠다. 유온은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입술을 깨물고는 유온에게, 약간 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잠깐 얘기할래?"

둘은 조용한 적막이 흐르는 식탁에 앉았다. 저번에 유온이 다쳤을 때처럼 그와 수혁밖에 없었다. 둘다 말을 안 꺼내고 몇 분이 지났을까 수혁이 나지막이 얘기를 시작했다.

"나 사실 독립운동 하면서 많이 힘들었어. 사람 친해지는 것도 그렇고 그냥 인간관계에 있어서 모든 게. 사실 너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했어.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잘 해줘야 하는 그저 그런 관계 그 이상은 아닐 거라 생각했어. 근데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그냥 편해. 굳이 내가 마음을 꼭 닫을 필요가 없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냥 힘들었는데 네가 도움 돼줬어."

"... 저도 많이 힘들었는데 형 있어서 괜찮아요."

"많이 좋아해 유온아."

갑작스러운 고백에 유온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 웃으며 유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둘이 사실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게 안심이 됐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 사랑이 결코 이 단체 내에서 순조롭게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무서웠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그와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내 유온도 용기 있는 대답을 했다.

"저도 좋아해요. 많이."

수혁은 유온의 대답이 끝나자 유온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포개지자 수혁의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또다시 주책맞게 유온은 한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의미 없는 눈물이었다. 입술을 떼고 수혁이 유온에게 말했다.

"나 너무 좋아하지 마. 나 너 곁을 언제 떠날지 몰라. 그래도 내가 좋은 거야?"

"네. 형이라면 모든 게 좋은 걸요."

유온의 따뜻한 말과 미소 하나에 하루의 피로가 다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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