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헌] 사랑의 균형

백업 by 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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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우리 헤어져요. 나 너무 힘들어."

"그래, 잘 살고. 고마웠어."

내가 거의 일주일을 고민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용기 내서 했어. 계속되는 훈련과 연애의 균형을 맞추기는 쉽지가 않았거든. 난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형이 당황할 줄 알았어, 왜냐하면 형은 나에게 애정을 많이 줬잖아. 근데 형은 그 전에 본 적도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고 그 흔한 눈물을 보인다거나 마지막으로 안아주고 입맞춤 해준다는 행동도 없이 그저 미련 없이 가버렸어. 그것도 고마웠다는 말을 끝으로. 내가 좋아했던 따뜻한 미소도 없었어.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차가운 형의 눈빛 그 이상은 없었어. 그렇게 헤어진 첫날에, 난 비참해졌어.

왜 형 그런 말이 있잖아.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더 아픈 거라고. 난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더 사랑하는 쪽이 늘 형이라고 생각했어. 난 별로 안 하는 다정한 행동을 하곤 했잖아. 게다가 맨날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줬는데. 나도 형을 사랑했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내가 너무 방심했나 봐. 난 어쩌면 형이 다정이라는 가면을 쓴 채, 이 사랑의 결말까지 알고 있는 채로 하는 연극에서 조종당한 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형은 날 안 사랑했을 수도 있겠다. 결국 나만 진심이었던 거야. 우리의 사랑은 균형이 맞지 않았어.

헤어진 날에 집에 갔을 때 공허함이 너무 심했어. 집 곳곳에 남아있는 형의 흔적들이 내 가슴을 누르는 듯했어. 어딘가 답답하고 숨 막히는 느낌에 집에서 쫓겨나듯이 나왔던 것 같아. 사실 집에서 나왔으면 안 됐지. 거리에 나오니 형과 함께한 추억들이 더 많았어.

저기 보이는 공원에서 형과 밤늦게 산책했었고 저기 골목에서는 첫 키스를 했어. 이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미치는 줄 알았어. 그때 문득 생각나더라, 형은 지금 어떨까? 날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파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고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형에게서 문자가 왔어. 그냥 '형'이라고 저장해둘 걸 굳이 '현이 형♡'이라고 저장해서 더 짜짜증 났어 마음 같아서는 그 문자를 보보고 싶지않았는데 손은 이미 형과의 대화창을 눌렀어. 그 찰나의 순간 동안 많은 기대가 들었어. 혹시 미안하다고 날 붙잡지는 않을까,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지는 않을까. 근데 형에게서 온 문자는 너무 무미건조했어. '너 집에 있는 옷 나한테 안 줘도 돼'. 이게 끝이더라. 너무 허전해서 대답을 보내지도 못 했어. 그날은 아마 공원에서 펑펑 울다가 지쳐 들어간 것 같아.

커플링이 문제였어. 형과 내가 100일이 됐을 때 같이 가서 골랐던 반지야. 굳이 다른 것들보다 조금 비싼 걸 골랐어. 그때는 뭐가 그리 좋았는지 웃으며 반지를 맞대곤 했어. 난 이 형과의 추억들과 함께한 반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 그냥 바로 상자에 넣고 구석에 넣어 먼지가 쌓일 때까지 잊고 살고,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 버티는 건 너무 싫었어. 아직 형과의 추억이 뚜렷한데. 근데 그렇다고 헤어졌는데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도 웃기잖아. 그러면 아주 그냥 구질구질한 전남친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는 거니까. 결국 난 이 반지를 내 침대맡에 두기로 했어. 평소에는 안 하다가 자기 전에만 한 번 보고, 형과의 추억을 한 전 떠올리고는 잠이 들게. 물론 나는 알아, 형은 헤어지자는 말을 듣자마자 뒤돌아가면서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은 거. 그리고 형은 모르겠지, 지금은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근데 형,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게 있어. 우리는 어차피 선수촌에서 만나야 됐어. 난 우리가 우연히 만난다면 형이 잠깐이라도 멈칫하고 내 눈치를 볼 줄 알았어. 적어도 내가 알았던 형은 날 진짜 사랑해서 나와 떨어져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영상통화를 하곤 했으니까.

형을 헤어지고 5일 정도 뒤에 마주쳤던 것 같아. 형은 한 여자 선수 분과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얘기를 하며 내 쪽으로 오고 있었어. 난 형을 보고 솔직히 움찔했어. 형은 날 발견하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다시 그분과 웃으며 얘기했지. 마치 형이 날 모른다는 듯이. 당황해서 가만히 서 있는 날 지나치면서 난 그분을 보는 형의 눈빛을 봤어. 늘 나에게만 보여주는 줄 알았던 다정한 눈빛이었어. 형은 나한테만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그때 느꼈던 것 같아. 우리가 진짜 헤어지고 남이 되었구나.

솔직히 많이 후회됐어. 내가 왜 그저 힘들다는 이유로 헤어지자 했을까. 전에 그랬듯이 형에게 힘들다고 말하고 위로 받았을 걸 그랬어. 굳이 헤어지자고 생각하고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다른 길을 걷게 된 거잖아. 형은 날 지우는 게 그저 문자에 잘못 쓴 오타를 지우듯이 쉽고 망설임이 없었겠지만 난 달랐어. 난 형이 내가 자각하기도 전에 내 안에 너무 깊이 스며들어있어서 한 번에 지우기가 힘들었어. 가슴에 형이라는 별이 너무 깊숙이 박혀있어서 빼내기가 힘들고 아팠어. 형은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 간절한 건 아니었나 봐. 형이 미련 없이 날 떠나 돌아서서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질 때 난 제자리에서 자책했어. 난 아직 형한테 못 해준 게 너무 많은데.

주위 사람들은 다 놀랐어. 특히 내 친구들이. 내 친구들이 다 안 믿더라. 나랑 형이 헤어진 게, 너무 이상했나 봐. 내가 형과 사귀게 됐을 때 애들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드디어 날 아껴주고 나란 사람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았다고.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형이 날 진짜 사랑하는 줄 알았지. 아무튼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훈련 때문에 늘 미루던 술을 하면서 말했어. 헤어졌다고. 술이 조금 들어갔다고 눈물이 그렇게 나오더라.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날까. 형을 붙잡고 싶었는데 형에게 있어서 나란 사람은 그저 한 장의 종이처럼 가벼운 존재라서 쉽게 떼어낼 수 있고, 자신을 붙잡으려는 게 보여도 그저 한 번 웃어 보이고 무시할 수 있었나 봐.

이별의 충격 때문인지 훈련도 잘 되지 않았어.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실수를 하고, 몸도 잘 안 풀고 늘 긴장이 돼서 자잘하게 상처들이 많았어. 우습게도 내가 다칠 때마다 치료해주던 형이 생각나더라. 형은 내가 다칠 때마다 속상한 표정을 보이며 치료해주곤 했는데 이제는 나 혼자 치료하고 얘기해. 다음부터는 다치지 말자. 근데 그거 알아? 뭔가 다칠 때마다 형의 이별이 생각나지 않았어. 아픈 것에 정신이 쏠려있어서 그랬나 봐. 그럴 수록 난 더 망가졌어.

언론들은 아직 몰랐어, 국가대표 커플 이재현과 박도헌이 헤어진 걸. 갑자기 생각난다. 우리가 그렇게 숨기면서 사귀었는데 언론들은 우리가 사귀는 걸 알더라. 그리고 그걸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두려웠고 그랬거든. 근데 그때도 날 달래준 건 형이었어. 생각해보니 항상 내가 힘들 때마다 날 달래주고 위로해준 건 형인데 이번에만 형이 없어. 형, 이번에는 나 안 위로해주는 거야?

형을 잊어보려 많이 노력했어. 그러다 보니 내 몸이 점점 망가지는 길을 택해버렸지만. 나는 어느덧 가장 먼저 와서 훈련하고 가장 늦게 가는 사람이 됐어. 난 그렇게 열심히 형을 잊으려 했어. 나의 실력은 계속해서 늘었는데, 나는 제자리에서 한 세 걸음 나의 길로 걸어간 것 같아. 그래도 그때 난 생각했어, 이 정도면 형을 많이 잊었다고. 이 정도면 형을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고.

나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형의 행동 한 번에 사라졌어. 그날은 아마 내가 또 처음으로 도착해 훈련을 했어야 하는 날이야. 이상하게 그날따라 불이 켜져 있어서 봤더니 형이 벽에 기대고 서 있었어. 형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려 했고, 난 형을 지나쳐서 갔어. 그랬는데 형이 내 손목을 잡고 말하더라.

"도헌아, 나 피하는 거야?"

"우리, 헤어졌잖아요. 진짜 왜 그래요?"

"넌 나 아직 못 잊었잖아. 너 아직도 나 사랑하잖아. 너 사실은 나 많이 원망했으면서 나 좋아하잖아. 너 아침에 일찍 나와 훈련하는 것도 나 잊으려고 하는 거잖아. 나가 모를 것 같아? 도헌아 사람이 마음이 하나로 딱 정해야지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본인이 힘들어. 안 그래?"

웃으며 형이 한 말은 너무나도 잔인했어. 어찌나 그렇게 날 잘 아는 걸까. 분명 뇌에서는 형의 손을 뿌리치고 가라고 하는데 바보같이 심장은 두근댔어. 이게 내가 아는 형이었는데.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어. 형은 참 모순적이야. 눈빛은 그렇게 다정한데 말은 어떻게 그렇게 날카로워. 내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불었어. 지금까지 꽤 형이라는 별을 많이 빼냈는데 다시 묻으려고 하잖아. 그래, 난 그 순간에도 형이 많이 원망스러웠어.

"형 잘 아네. 나 형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거 맞아. 근데 형 갑자기 왜 이래요? 이렇게 말하고 형이 달라져요? 형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요, 나도 알아요ㅡ"

"사랑해."

억울해서 미친 듯이 말을 내뱉고 있었는데 형이 갑자기 내 말을 끊고 말했어. 사랑한다고. 난 형의 그 말이 거짓말이고 날 시험하려는 말이었단 걸 알았지만 무시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어.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스스로 해주다니, 이걸 좋아해야 되는 거야 싫어해야 되는 거야? 근데 내 눈과 빨개진 볼이 보여줬나 봐. 내가 형의 그 말을 듣고 홀렸다는 걸. 형은 한번 웃고는 내게 입을 맞췄어. 두 달 만에 닿은 입술을 달았어. 형은 입술을 떼고 말했어. 훈련 잘 해. 그리고 난 바보처럼 고맙다고 대답했어.

형은 왜 항상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걸까. 헤어졌는데 꼭 이렇게 행동했어야 되는 거야? 이렇게 내가 착각하게 만든 다음에 형은 또 나한테 상처를 주잖아. 사랑해라고 말하고 다음 날에 전에 봤던 그분이랑 손을 잡고 내 앞을 지나가면 어떡해. 어쩌자는 거야. 형이랑 손을 잡은 그분을 보자마자 헛구역질이 났어. 내가 이렇게 더러운 사람이랑 사귀고 있었다는 게, 자신이 한심했어. 화장실에 갔는데 위액만 나올 뿐, 다른 건 없었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아프고 괴로웠어. 형이란 사람 한 명 때문에.

형은 내게 그렇게 큰 상처를 주고서 죄책감이라고는 없는 듯 행동했어. 기억 나? 형이랑 나랑 드라마를 봤었는데 딱 형 같은 사람이 나왔어. 나는 그 사람을 욕했는데 형은 그 사람을 보고 그저 웃기만 했지 다른 반응은 없었어. 이제야 이해 된다. 형의 행동들이.

우리는 사랑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거야. 형이 더 사랑을 많이 주는 듯 보였지만 결국 떠나갈 때 미련 없이 떠나간 건 형이었어.

사랑의 균형이 맞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도헌아, 내가 사랑했던 도헌아. 사랑을 할 때 방심하면 안 돼. 너만 상처 받고 힘들잖아. 난 네가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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