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키도 다케말란 > 츠바사 하야토 [답변로그 백업]
이렇게나 속절없이 빠져 버릴 줄은 몰랐는데.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걸어온 추억들을 꺼내 볼까.
붉은 장미와 푸른 물망초. 품 안에서 흐드러지게 핀 꽃다발은 네가 할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네. 네가 준 것이 너무 많아 전부 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우리가 남긴 자취야.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네가 남긴 온기가 손에 잡힐 듯 그리운데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을 되살려 나무 위에서 시간을 때우던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그 마저도 질려 돌아갈까 하던 참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우리의 첫 만남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던 발, 날개처럼 하느작거리던 옷자락. 놀라 크게 뜨인 금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난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휘청이는 널 잡아 올렸다. 형편없는 근력을 갑자기 사용한 탓에 팔이 후들거렸으나, 난 그것을 최대한 숨기고 평소대로 웃어 보였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글쎄. 널 들어 올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나.
“원숭이도 아닌데 나무에서 떨어지기나 하고 말이야.”
그 같잖은 도발에 그저 몬드의 환경이 생소해서 그랬을 뿐이라며 바락바락 항변하는 너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너와의 만남을 나도 모르는 사이 기대하게 된 게.
덤벙거리는 넌 확실히 귀엽지만, 부디 조금만 조심해 줘.
너를 잡으려 언제고 손을 뻗을 테지만, 언제나 안전하게 끌어올려 줄 순 없거든.
평화로이 돌아가는 풍차 옆, 높게 세워진 벽에 걸터앉아 있던 너를 보았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너의 곁으로 향했다.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좋다며 미소 짓는 너의 얼굴에서 어쩐지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딱 달라붙어 짓궂은 농담을 했을 때, 역시나 발끈하는 널 보며 간질거렸던 기분은 네가 낭떠러지로 기울어지는 순간 추락했다.
“왜 이렇게 항상 위태로워.”
심장이 선뜩하게 뛰었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더욱 능청맞게 굴었지만, 사실 네가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에겐 너를 지킬 만한 힘이 없어서. 이렇게 너를 끌어당기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약해서.
“조심하라니까….”
그래서, 고작 이런 말밖에 못 해 주니까.
아. 지독하게 무력했다.
부드럽고 따뜻했어.
음, 내가 뭘 말하는 걸지는 네 판단에 맡길게.
많은 사람들이 주최 측에서 준비한 물약을 마시고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던 날, 너 또한 그 물약을 들고 있길래 지켜보고 있었다.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것을 쭉 들이킨 너는 새 한 마리로 변했었지. 부리를 쩍 벌리고 충격받은 듯 서 있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네게 다가갔다.
“몬드 성 한복판에 새라. 그것도 수상해 보이는 물약을 들고?”
기이한 현상에서 어느새 관심을 끈 사람들은 조심성 없이 걸어 다녔고, 그들의 발길을 피하기엔 너는 너무 작아 보였다.
그러니,
“내가 도와줄게.”
이때까지만 해도 오로지 호의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
기막힌 타이밍에 새에서 인간으로 변한 네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달아나기 전까진.
“…아.”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에서 세찬 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널 좋아하고 있었구나.’
붉어진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린 채,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어쩌지.”
네가 날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지, 답지 않게 자신이 없어져서. 결국 그날 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때늦은 첫사랑의 열기는 지독하게 더웠다.
그 거리엔 사람이 꽤나 많은 편이었는데. 대범했지.
아니, 사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할 수도 없었고.
그날은 나로선 꽤나 운이 좋은 날이었다. 이른 시각부터 너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행복에 깊이 잠겨든 날이기도 했다.
“자세가 꽤나 로맨틱한데. 이 주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샀겠어.”
만나자 마자 휘청거리는 너를 지탱하고, 부러 짓궂게 놀렸다. 여기에 조금의 사심이 담겼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얼굴을 붉히며 내 볼을 잡아당기지만 않았다면, 아마 거기서 멈췄겠지.
“귀엽게 굴기는.”
내가 항상 그 이상을 기대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너의 반응이라고 변명해도 될까. 너는 내가 타인에게 그어둔 선을 성큼성큼 밟고, 넘어서고, 금세 이렇게 가까워져서,
“이제부터 자기야. 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자꾸 원하게 된다.
거절당하면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손을 뻗게 되는 건, 네가 이미 내 안에 너무 크게 자리잡아서.
그래서 나는 허락의 뜻이 담긴 네 입맞춤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만큼. 물론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전부 네 덕분이야.
네가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이 먹어치울까, 걱정을 닮은 하찮은 소유욕에 답해 주는 네가 사랑스러웠다. 참 중증이지. 그러나 전혀 예상도 못했던 네 집으로 초대받은 순간, 온갖 잡다한 생각은 한데 뒤엉키다가 축포처럼 터져나갔다.
평정을 찾는 데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마저도 완전히 찾지는 못했고, 그런 척만 한 거지만.
“이러니까 꼭… 신혼 같다. 그치?”
앞치마를 두른 너를 보고 장난스레 던진 물음에 곧바로 부정이 돌아오지 않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아찔한 기분이다.
네가 날 위해 준비해 온 술로 잔을 적시며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예쁘게 플레이팅된 접시와 날 보며 헤실헤실 풀어진 표정 등에서 과분한 애정이 읽혔다.
올라온 술기운에 네가 잠들고 나서 욕심껏 차지한 그 옆자리는 조금 좁았지만, 그래서 안온했다. 가능하면 평생토록 지키고 싶은 작은 평화였다.
네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니 이건 조금 더 나중에.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을 미래에 반드시 말해줄게.
윈드블룸 축제의 마지막 날. 함께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흥미로운 빙고판 한 장을 건네받았다. 커플들을 위한 게임이라. 너와 닿아 있고 싶은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꽤나 마음에 드는데.”
빙고판을 한 칸씩 칠하는 동안 끊이지 않던 웃음소리는 심장께를 간질였다. 상냥히 불어온 바람은 꽃향기를 싣고 우리에게 닿았다.
‘평생 네 곁에 있고 싶어.’
너 몰래 속으로만 삼켰던 말. 하지만 변함없이 진심이다. 바람처럼 찾아온 너는 순식간에 내 안에 자리잡고, 결국 꽃처럼 화려한 감정들을 피워냈다. 여태껏 맞이한 모든 윈드블룸 중, 가장 완벽한 폐막이었다.
이쯤이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도 짐작 가지?
내 기억 한켠에 깊게 박혀들 순간이라.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그랬다고 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미 소중한 추억들을 쥐여 주고도 더 많은 미래를 선물해 주려고 하니, 내가 어떻게 너를 거부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나도 사랑해. 네가 걸어갈 모든 길에 함께하겠다고 약속할게.”
찬란히 미소짓는 네게 마주 웃어 보이며, 이만 내 이야기를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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