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온] Like it 1

백업 by 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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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창작

* 퇴고 안 함 

Like it

w. 은월

"...엄마, 여기야? 우리가 이제 살 곳이?"

열여덟살의 소년 수혁은 엄마에게 약간은 공격적이게 물었다. 가을이라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없었기에 낡은 집에서 눈을 떼고 엄마를 건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의 엄마는 수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짐들을 착실히 옮기기 시작했다. 수혁은 믿을 수가 없어 제 눈앞에 있는 집을 다시 뚫어져라 봤다. 서울에 있을 때 살던 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파란 대문은 낡고 녹이 슬어있었고, 집은 겉으로 대충 훑어보면 '음, 그래도 괜찮군.'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이 파란 대문의 집이 굉장히 낡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당은 이 집이 주인이 꽤 긴 시간 동안 없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길게 자란 풀이 마치 정글 마냥 있었고, 나무로 된 마루는 기분 나쁜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수혁은 이런 집이 자신이 엄마와 단둘이 살게 될 집이라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했다.

수혁이 이런 시골에 엄마와 단둘이 오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수혁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딱히 좋았던 시절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전에는 서로 수혁이를 위해 이해를 해보려 노력하고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수혁이 조금 컸다라는 느낌이 들자마자 그 둘은 그동안 참아왔던 마음 속의 불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고 결국에는 둘다 지쳐 이혼하게 되었다.

수혁이 이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니, 수혁은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수혁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리 가족이 이제 떨어져서 살게 될 거라는 걸. 어쩌면 수혁과 부모는 단 한 순간도 '우리'였던 적이 없었다. 그저 생물학적 가족일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 애정을 표현하지도 않고, 부모는 수혁의 학교생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상담이 있다하면 가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정이었다. 수혁은 이런 불편한 가족관계보다는 차라리 빨리 그의 부모가 이혼하기를 기도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그는 딱히 기쁘지도 않았다.

그날은 아마 수혁의 아빠가 집에서 나가고 수혁과 그의 엄마가 이사를 결심하던 날이었을 것이다. 수혁은 그가 그의 조부모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슨 들어보지도 못한 시골로 간다했다. 그쪽에 그의 친척이 있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럼 그쪽이 무슨 장점이라도 있는가? 딱히 없었다. 수혁은 그런 인터넷도 잘 안 터지고 지루할 것 같은 시골로 이사가는 게 싫어 엄마에게 말을 공격적으로 내뱉은 적이 있었다.

"아니 엄마 왜 시골로 가는데? 이해가 안 되서 그래. 굳이 그 시골로 가야겠어? 나 학교도 가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되서 최소 30분이야. 게다가 엄마가 그나마 관심 가지는 내 음악. 거기 작업실 그런 거 없어. 진짜 왜 그래 엄마?"

수혁이 말을 끝내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시선을 돌리고 보이는 건 난생 처음 본 엄마의 눈물이었다. 아무 말 없이 눈물이 흘러 수혁은 당황했다. 오히려 그의 엄마가 화를 나며 눈물을 흘렸더라면 나았을 지도 몰랐다. 수혁은 어정쩡하게 엄마를 안았다. 수혁이 생각해도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그날이었다.

이쯤 되면 윤수혁이란 사람이 궁금해질 법하다. 그는 눈을 찌를 듯한 앞머리에 뒷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있었고, 눈은 약간 찢어진 날카롭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고작 나이는 열여덟섯이었지만 키는 이미 180cm을 조금 넘는 키였고 여전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옷은 항상 대충 흰 티에 편한 회색 폭이 넓은 바지, 거기에 회색 후드집업을 입고 다녔다. 이렇게 보면 그의 겉모습은 그저 평범했다. 문제는 그의 성격, 즉 내면이었다. 그와 친했던 그 누구도 그의 진짜 성격을 모르겠다고 전했다. 평소에는 자주 공격적이고 예민하지만 가끔씩 부드러운 말투가 나왔다. 물론 그 부드러운 말투는 수혁이 진심으로 마음을 연 사람 한정이었다. 그리고 윤수혁은 사람을 놀리고 장난치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그의 집안은 어느 정도 부유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도 그의 아버지가 한 달의 한 번씩 얼마를 보내준다고 합의했다나 뭐라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수혁은 게이였다.

수혁은 놀랍게도 커밍아웃을 이미 했다. 그 전에 그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게 된 건 열세살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고도 혼란스러운 건 없었다. 그저 '나 게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는 커밍아웃이란 걸 일년 후에 알게 됐고 가족들이 다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하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말소리 없이 그저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는 저녁이었다. 수혁은 거의 처음으로 애기를 꺼냈다.

"엄마, 아빠. 나 게이야."

수혁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부모는 놀란 듯했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는 그에게 관심은 없었기에 그저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알겠다는 말로 커밍아웃은 끝났다.

수혁이 음악을 한다고 말했던가. 수혁은 음악 말고는 딱히 잘 하는 게 없었다. 그저 다른 걸 피해 이것저것 하다보니 적성을 찾은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수첩을 꺼내 곡을 쓰고 있었고, 하교할 때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음악 시간을 좋아항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 시간에는 틀에 박힌 음악만 했기에 오히려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의 부모님은 수혁의 재능을 더욱 밝게 빛내주기 위해 그에게 작은 작업실을 선물해 주었다. 물론 이사오게 되면서 없어졌지만.

여기까지가 수혁의 이야기다. 아무튼, 수혁은 짐을 옮기는 엄마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기에 이어폰과 핸드폰, 그리고 곡을 구상할 때 쓰는 수첩과 펜을 가지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따분했다. 이 시골 구석에는 제 또래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수혁은 한숨을 쉬고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앉았다. 노래를 들으려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핸드폰은 잘 터지지 않았다.

수혁은 왜 이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해보았다. 괜히 볼펜을 돌리면서 멍하니 있었다. 사람이 한 명쯤은 다닐 법도 한데 아무도 없었다. 와 겁나 지루하네. 그때 수혁의 어깨를 누군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엄마일 거라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고 보이는 건 시골과는 많이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키는 자신보가 조금 작아보였고, 눈은 속눈썹이 길게 있는 게 남자아이인데도 많이 예뻤다. 자신을 건드린 손가락도 하얗고 가늘어서 예쁘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수혁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그 애한테 말을 걸었다.

"누구?"

"형이 그 파란 대문에 이사 온 형이에요?"

"그치. 근데 너 여기 살아? 시골 토박이?"

"네. 저 여기서 계속 살았어요. 형 할 거 없으면 저랑 놀아요. 여기 할 거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여기 마을에 10대는 저랑 형밖에 없어요."

수혁은 하얀 피부로 자신에게 말을 건내는 그 아이가 괜히 궁금해졌다.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이곳에 자신 또래는 둘밖에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 아이와 얘기를 하다보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름은 정유온, 나이는 수혁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살,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타를 한다고 했다. 수혁은 그가 기타를 한다는 게 조금, 아니 많이 솔깃했다. 수혁이 유일하게 배우다가 포기한 악기가 바로 기타인데, 유온이 기타를 잘 다룬다고 하니 곡을 쓸 때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얘기하다 보니 음악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곡의 소재도 유온이 정해주었다. 수혁은 그런 유온이 고마우면서 동시에 귀찮았다. 

"형 서울에서 왔죠? 그럼 형 음악하니까 작업실도 있었겠네요. 그건 부럽네요."

"여기는 작업실 그런 거 없어. 조금 그렇네."

수혁이 원래 처음 본 사람과 살갑게 대화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다가오는 유온이어서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수혁은 유온과 굉장히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느낌과 마음은 달랐다.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굳이 친해질 필요는 느끼지 못 했다. 그저 많이 엮이지 않았으면 했다.

"윤수혁, 왜 이제 들어와."

"아 뭐... 여기 내 또래 애가 한 명 있더라고? 그래서 얘기하고 왔지. 덧붙이자면 별로 친해질 생각은 없어 아직은. 늦게와서 미안. 엄마, 내일 내가 여기 싹 정리할게. 엄마 쉬고 있어. 저녁 내가 할게."

"얼씨구? 윤수혁 양심은 있네. 엄마 방에서 쉬고 있을게. 너 짐은 다 너 방에다 있으니까 정리해. 아 그리고 좀 친해져."

수혁은 유온과 얘기를 하다가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들어왔다. 시간만 보면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3시쯤에 나갔다는 걸 감안하면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오는 길에 길을 잃을 뻔 했으니. 수혁 치고는 굉장히 조심성 없는 행동이었다.

수혁은 서울에서 챙겨온 라면 두 개를 꺼내고는 구석에 대충 쳐박혀있던 냄비도 꺼냈다. 가스레인지를 발견하고는 수혁은 이 집이 그래도 완전 구식은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수혁은 집에 가스레인지도 없고 가마솥이 있으면 어쩌지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물을 받아 라면을 끓이면서 엄마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이사오기 전처럼 지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와 그래도 친하게 지내야 될 것 같았는데, 저녁을 하겠다고 한 건 그래도 엄마에게 한 발짝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저녁 식사가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넘어갈 것 같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몇 마디가 오고갔다. 대화가 그다지 영양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음악에 관한 얘기였다. 작업실과 관련된 얘기도 나왔고 수혁은 괜찮다고 했다. 수혁이 아무리 엄마와 친하지 않았다고 해도 남을 무안하게 만드는 것이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수혁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 마당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자를 생각에 막막했다. 농사를 하려고 오지도 않아서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수혁은 책임감 있게 설거지까지 마치고 이장님의 댁에 찾아갔다. 아무런 음식도 없이 찾아가는 건 그래서 냉장고에 있던 샤인머스켓을 들고 찾아갔다. 여기는 또 왜 이렇게 깨끗해. 비교되네.

문을 조심히 두드리니 문 뒤에서 나오는 건 이장님이 아닌 정유온이었다. 얼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쟤가 왜 여기서 나와? 분명 여기가 맞는데... 수혁이 핸드폰에 메모한 걸 보면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유온이 말했다.

"형, 이장님이 제 할아버지세요. 여기 왜 오셨어요?"

"아, 뭐... 그냥 톱? 칼? 낫? 아니 뭐냐. 그 풀 깎을 때 쓰는 거 받아오려고."

수혁이 당황해 말이 엉켜 설명을 이상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잘 가져다주었다. 수혁은 손에 있던 과일을 건네주고 고맙다고 중얼거리고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뭔가 정유온이랑 지독하게 엮일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랑 많이 친해지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윤수혁은 정유온이 싫었다.

다음날에는 새벽에 닭의 쓸데없이 우렁찬 소리에 반강제로 일어나게 되었다. 수혁은 눈을 비비며 핸드폰 속 날짜를 보았다. 분명 추석 연휴인 듯 했는데 이곳은 너무나도 한적했다. 여기 사람들 안 지루한가?

수혁은 7시쯤 되서 엄마를 깨우고는 오늘 하루종일 정리를 할 거니까 읍내에 나가서 놀다 오라고 얘기했다. 그의 엄마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알겠다고 했다. 수혁은 아침부터 열심히 일을 했다. 고작 열다섯인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선선한 가을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 보니 벌써 해는 머리 위에 있었다. 집을 둘러보니 마치 새 집 같았다. 페인트칠만 다시 하면 정말 깔끔해 보일 것 같았다. 수혁이 마루에 대자로 누워있는데 문을 누가 두드렸다. 수혁은 무시하려 했지만 그랬다는 걸 저녁에 엄마가 알게 된다면 한 소리 듣게 될 게 뻔했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파란 대문을 열었다.

"왜 왔냐?"

문을 열고 보이는 건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또 정유온이었다. 수혁은 어이가 없어 땀에 젖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넘겼다. 유온은 수혁의 앞에 서서 여전히 뭐해요라는 얼굴로 있었다. 분명 어제 자기는 내향적이라고 자기가 소개했던 것 같은데, 날 속인 건가. 수혁은 마지못해 유온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유온은 목표를 이뤘다는 듯 환히 웃었다. 수혁이 마루에 앉자 유온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유온이 어무 말도 없자 수혁은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왔냐고."

"형 점심 안 먹었죠? 같이 먹으려고요. 형 오늘 집 정리했잖아요. 힘들어보여서 왔는데."

"아 그래? 점심 뭐 먹을 건데. 그냥 알아서 해라."

앞서 말했듯이 수혁은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것에 취미는 없었지만 유온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귀찮았다. 귀찮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냥 제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유온은 알아서 하라는 말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르겠는 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장님이 챙겨주신 듯한 음식들이었다. 수혁은 작은 상 하나를 가져와 유온이 챙겨온 음식들을 올렸다. 음, 쓸데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가져왔네.

그들의 점심식사는 음식을 씹는 소리와 수저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 수혁이 너무 힘들어한 것도 있었고, 유온이 그걸 알아채고 말을 일부러 안 한 것도 있었다. 수혁은 이런 유온의 배려가 딱히 좋지 않았다. 이 근래에 그가 이사오기 전까지 애들이 없었어서 그런가. 수혁은 이 불편한 적막을 깨려고 유온에게 의미없는 질문을 했다.

"너 왜 점심 나랑 같이 먹냐."

"형 혼자 있으면 안 챙겨 먹을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가 챙겨주래요. 물론 제가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 것도 있어요. 불편해요?"

이장님이 챙겨주라 했다는 얘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지만 불편해요라는 질문에 진심이 들킨 것 같아 수혁은 사례가 들렸다. 그런 수혁에게 유온은 물을 건네주었다. 수혁은 물을 급히 마시고는 유온을 바라보았다. 정작 불편하냐는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혁은 어이없어 그에게 대답했다.

"전혀 안 불편하거든? 그리고 나 마저 정리해야 되니까 밥 다 먹으면 가. 도와줄 생각 하지 말고. 이해 완?"

"형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나 싫다고. 아무튼 알겠어요. 갈게요."

수혁이 밥을 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유온은 남은 반찬과 밥을 챙기고는 떠났다. 문을 나가기 전에 살짝 손도 흔들고. 수혁은 유온의 인사를 못 본 척 했다. 다시 보니 정유온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수혁은 추석 연휴가 끝나고 저기 읍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등하교를 유온과 같이 해야됐다. 그곳에 가는 방법은 버스밖에 없었는데 유온과 겹치지 않게 가려면 완전 꼭두새벽에 나가서 학교에 매우 일찍 도착해 미친놈 취급을 받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수혁은 아침마다 유온과 버스에 같이 타게 되었다.

정유온도 정말 불편한 게 차라리 바로 옆자리에 앉았으면 말이라도 했을 텐데 굳이 자신의 몇 칸 뒤에 앉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수첩을 끄적이려고 하니 시선이 느껴졌고, 창문 밖을 보면 시야에 정유온이 들어왔고. 참 뭐 할 것도 없었다. 수혁은 그렇게 하루에 총 1시간을 불편하게 지내야 했다.

수혁은 학교에서 친구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와서 애들이 기껏 관심을 줬는데 점심시간에 애들이 축구를 하자고 할 때는 무시하고, 혼자 다녔다. 적응을 하지 못 해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한 사람 같았다. 수혁의 반 친구들은 그와 같은 마을에 사는 유온에게 물었다. 쟤, 도대체 뭐냐고. 도대체 뭐길래 뭐 대단한 게 있으면 저렇게 혼자 다니냐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유온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넘길 뿐이었다.

유온은 수혁이 너무 궁금했다. 윤수혁, 키는 훤칠해서 체육을 잘 할 것처럼 생겼는데 정작 뛰어다니는 건 싫어하는 사람. 전혀 음악할 것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항상 이어폰을 끼고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는 사람. 말을 또 어찌나 없는지. 게다가 얼굴에는 그의 감정이 다 드러났다. 또 궁금한 것, 집안은 도대체 얼마나 부자이길래 서울에 작업실이 있었다는 건가.

사실 유온의 작업실 질문은 그를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하도 부유한 집이 왜 이런 곳에 오냐고 중얼거리길래 직접 떠본 것이었다. 땅값 비싼 서울에 개인 작업실이 있었어? 그것도 열여덟살이? 그리고 엄마는 농사를 안 하고 항상 책만 읽고 있어? 이야 부자 맞네. 유온은 수혁이 자신을 조금씩 드러낼 때마다 헷갈렸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하루는 수혁이 너무 불편해 유온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 버스타고 갈 때 항상 나 불편하게 몇 자리 건너서 앉냐고. 수혁은 인간관계 하나쯤 망쳐도 상관 없었기에 물었다. 생각 외로 유온은 바로 대답했다.

"형이 저 불편해하잖아요. 제가 그거 모를 것 같아요?"

"미안한데, 난 니가 내 옆에 안 앉는 게 더 불편해. 나 배려하고 싶으면 차라리 내 옆에 앉아. 그리고 배려하는 거 나 동정하는 거냐?"

"동정이라뇨. 전 형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해요."

수혁은 당당하게 나오는 유온이 짜증났다. 분명 학교에서 다른 애들이랑 있는 걸 보면 항상 말도 별로 없고 먼저 대화을 주도하는 편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말 걸면 같이 대화하고, 말을 하는 쪽보다는 듣는 쪽. 이런 애가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참... 수혁은 생각을 거듭할 수록 어이가 없어 웃었다. 정유온, 그렇게 나랑 친해지고 싶냐?

수혁은 이상하게도 유온의 친해지고 싶다는 말이 거슬렸다. 유온이 수혁을 잘 챙겨줄 때마다 이상하게 날이 갈 수록 마음이 이상해졌다. 윤수혁은, 정유온이 조금씩 신경 쓰이는 자신이 싫었다.

수혁이 유온에게 뭐하고 하든 유온은 항상 수혁이 다니는 곳에 따라다녔고 수혁의 엄마가 가끔씩 일이 있어 서울에 갔을 때마다 그를 챙겨준 것도 유온이었다. 수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옆에 유온이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원래 수혁은 유온을 많이 귀찮아하고 또 밀어냈지만 계속해서 옆에 있는 유온에게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말투는 전과 달라진 게 별로 없었지만 행동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이런 감정을 호감이라고 정의하던데 수혁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저 한순간의 호기심이라고 타협했다.

그날은 평소와 같은 월요일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 시간에 유온이 나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 '정유온'이라고 저장된 번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혁은 유온과 번호를 교환한 후 연락을 한 적이 없어 2초 정도 빤히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유온의 목소리를 잠겨 있었다.

- 형... 저 아파요...

"기다려."

수혁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 기록을 보니 10초 정도 전화 했지만 그가 아프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수혁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온 길을 걸었다. 학교는 째야지. 수혁은 빨라지는 걸음에 짜증났다. 정유온이 뭐라고 이리 신경 쓰이는지. 맨날 옆에 있던 사람이 아프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한 건 맞았다. 근데, 수혁은 이런 식으로 그가 신경 쓰이고 걱정 되는 건 싫었다. 지금까지 이토록 귀찮은데 신경 쓰인 적이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숨 가쁘게 온 유온의 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안 무섭나 문도 열어놓고. 수혁은 중얼거렸다. 유온은 누워 있었고 수혁은 유온 옆에 앉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아파 보이지 않는데, 얘 거짓말 했나? 유온은 곧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안 아프다고 단정 짓기에는 약간 붉어진 볼과 귀가 아프다는 걸 보여줬다.

"너 어디 아픈데."

"목 아프고 열 나요. 약 먹었는데?"

약을 먹었다고? 수혁은 되물었다. 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한 놈, 수혁은 어이가 없었다. 학교까지 째고 왔는데 이미 약을 먹었다 이거지. 수혁은 이내 핸드폰 화면 속의 시각을 봤다. 8시... 이미 늦었네. 수혁은 핸드폰을 거칠게 가방 속에 쑤셔놓고 벽에 기댔다. 학교 짼 거 알면 엄마가 날 죽이겠네. 이런 의미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유온이 수혁에게 물었다.

"내가 아프다고 했는데 형이 바로 달려올 정도면, 형이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뭐래."

수혁은 훅 들어오는 유온의 질문에 당황했다. 질문은 또 잘 해요. 수혁은 바로 나오지 않는 자신의 대답이 싫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걸 굳이 마음을 정하지 못 해서 잠시 생각하다 말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날이 갈 수록 정유온에 대한 마음이 한쪽에서 커지고 있었다. 수혁이 자각하지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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