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려림] 작별 인사는 가장 효율적으로

2020. 06. 30

  • CoC 팬메이드 타이만 한서님의 <Golden Ocean> 이후, 이느티님의 <우주해> 이전의 두 사람을 다루고 있습니다.

  • 두 시나리오 <Golden Ocean> <우주해>의 개요에서 열람 가능한 정보가 일부 반영되어 있으나 시나리오의 직접적인 스포일러 요소는 없습니다.




 창밖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문 위를 장식한 얇은 천 위로 빗물이 고이더니 이내 후두둑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일부러 이 자리를 골라 앉았다. 인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땅, 그 일부를 보란 듯이 차지하고 들어앉은 우스운 카페였다. 좁은 땅 어드메에 원두를 재배하기 적합한 기온과 습도와 토양을 가진 땅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값이 조금 비싸긴 했으나 이 시기에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식도를 따라 미적지근한 검은 액체가 몸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간다.

 우려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창 바쁜 시기에 이전의 몇 배나 되는 값을 치르며 커피를 마시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려가 늦은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너무 빨리 왔을 뿐이었다. 약속 시각까지는 앞으로 23분. 나는 눈을 감았다. 곧 감은 눈꺼풀 사이로 이제는 볼 수 없는 건조한 사막의, 신기루를 닮은 기차의 환상이 스며들어왔다. 몇 번이고 보았던 것이다. 눈만 뜨면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위에 눌린 사람마냥 눈을 꾹 감았다. 낡고 어지러운 기차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탑승객은 두 사람이었다. 먼 듯 가까운 듯 알 수 없는 거리에서 빗줄기가 창문을 세게 때리는 소리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예림아.”

 우려였다. 기차는 곧 사막 한복판에 나 하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영영 뜰 수 없을 것만 같던 눈이 쉽게 열렸다. 려는 앉지도 않고 몸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던가. 그는 머쓱하게 웃음을 내비친다.

 “많이 피곤했으면 약속, 미뤘어도 되는데.”
 “아니…. 잠깐 졸았던 것뿐이야. 주문하고 와.”

 우려는 말없이 제 짐을 의자에 적당히 내려놓고 카운터로 향한다. 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로 된 발자국이 자취를 그린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본다. 우려는, 처음 만났던 날 이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와는 열 네 살 무렵 교육원 산하 연구실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동갑이라고 했다. 연구실에서 내 또래와 만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올해 초부터 일하기 시작한 국립 연구소에서도 내가 제일 어렸다. 다섯 살 때 이미 교육원 소속이었기에 나는 평범한 아이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그때 우려는 열 네 살 남자아이가 짓기에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조숙한 아이라는 평을 듣고 자랐으나 나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려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품은 내가 그를 좋아할지 싫어할지 결정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려가 싫었다. 아니다. ‘싫다’는 말은 너무 직설적이다. 그래. 나는 려가 껄끄러웠다. 이쪽에 가까울 듯하다. 5, 6년 남짓,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는 내게 친절했다. 오직 나에게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우려를 꺼리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려는 교육원 모든 사람에게 표면적으로 다정하게 굴었다. 마치 다정이라는 이름의 얇은 막이 그의 발성 기관 위에 한 겹 덮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우려를 꺼리는 이유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넓고도 좁은 교육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친절을 연기해야만 했다. 나 역시 연기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려는 내 앞에서는 다정을 연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싫고 불편했다. 어떠한 연기도 거짓도 아닌 진짜. 모조품은 진짜 앞에서 힘을 잃었다. 우려와 함께 있을 때면 친절한 사람인 척하는 내 가면이 스르륵 벗겨지곤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네가 급하게 연락을 다 하고.”

 려는 어느새 커피를 들고 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미 다 식어버린 내 것과 달리 그의 것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우려의 안경 너머에서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예쁜 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꺼려졌다. 감히 봐서는 안 되는 미지의, 아주 오래된 것을 담은 그릇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예쁜 것들은 대부분 하나쯤 위험한 요소를 가졌다. 아마 그런 것이리라. 곧 나는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해서 려의 눈을 피했다. 질질 끄는 건 싫다. 시간도 없었다. 본론을 말해야 할 때였다.

 “나, 우주 정거장에서 일하게 됐어.”
 “거기 간 사람들…. 다들 바빠서, 지구로 잘 안 돌아오잖아.”
 “맞아. 나도 아마 당분간 지구로 오긴 힘들 것 같아서.”

 커피를 한 입 더 마신다. 우려는 제 몫의 액체를 마시지 않았다. 식었는데도 이렇게까지 맛있는 커피는 드문데. 아깝게도. 나는 그를 앞에 두고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한다. 우려에게서는 늘 건조한 사막의 향이 났다. 쏟아지는 비를 헤치고 왔는데도 우려는 그 냄새를 두르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사막의 향이라는 걸 알았을까.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사막에 가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았다. 마치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어미 젖을 빨듯. 뻐꾸기 새끼가 둥지의 다른 알을 밀어 깨트리듯.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그런 원초적인 감각이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만나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연락했어.”


 남은 커피를 단숨에 속으로 털어 넣는다.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선다. 우려를, 내려다본다. ‘작별 인사’라는 말에도 려는 평온해 보인다. 그런 사람이었다. 제법 긴 시간 알고 지냈는데도 우려가 당황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함께 며칠을 밤을 새워서 정리한 데이터가 사라져도, 아직 연구가 채 끝나지 않은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모르모트가 달아나도, 그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는 척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래. 언제 떠나?”

 통유리로 된 창문 옆에 바짝 붙여 두었던 캐리어를 끌어낸다. 이직을 결정한 이후로도 꽤 시간이 흘렀다. 짐 대부분은 이미 우주 정거장에 도착했을 것이다. 캐리어에는 지구에서 지내는 데 필요했던 최소한의 물건만이 담겨 있었다. 려는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꺼냈다.

 “지금.”

 우려의 얼굴에서 아주, 아주, 옅게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잠깐이었다.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우려가 나와 같은 열아홉 살처럼 느껴졌다. 인간에 가장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때로는 인간과 가장 멀게 느껴지던 소년이 마침내 사람의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이 더 보고 싶어졌다. 우려의 앞에 조금 더, 앉아 있고 싶어졌다. 그러나 곧 떠나야 할 시간이었고 오늘이 하필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후의 인사를 하기로 했다.

 “안녕, 우려. 그동안 고마웠어.”
 “나도, 고마웠어. 서예림.”

 우리는 진부하면서도 상황에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말로 이 연구를 종결지었다. 려는 평온하게 웃어 주었고 나도 답으로 그를 흉내 내었다. 떠나기 직전 흘깃 본 그의 커피잔은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지구에 남겨두고 가는 것 중에 가장 아까운 것을 꼽으라면 아마 그 커피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는 꽤 거셌다. 우산을 펴도 바람을 타고 빗물이 들어와 옷을 적셨다. 인류의 남은 땅까지 먹어 치우겠다는 경고라도 보낸 것처럼 온 세상이 축축했다.

 지나가는 무인 택시를 잡아탔다. 적당히 목적지를 입력하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 틈새로 사막과 기차의 환영이 재차 비집고 들어 왔다. 목적지도 종점도 모르고 오직 끝만을 향해 달리는 기차. 몇 번이고 내 손을 잡아끌어 올려주는 건 누구일까. 수분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건조한 모래 입자가 입안을 메운 듯 텁텁했다. 혀로 샅샅이 내부를 훑어도 모래 알갱이는 찾아낼 수 없었다. 쓴 커피 맛만이 선연했다. 환영 속에서 멈추지 않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의 냄새가, 우려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여기까지 와서 했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려는 내가 지구에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마지막 사람이었으므로. 택시가 달칵 멈췄다. 우주로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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