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려림] 필요성

2021. 05. 02

  • Golden Ocean의 어떤 선택 

  • "너 같은 건 처음부터 필요도 없었어" 에서 파생


 열차를 가득 메운 공기는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덥고, 습하고 축축한 입자가 몸을 감쌌다. 사방에서 시체가 썩어들어가며 풍기는 묘한 냄새가 났다. 나는 이 냄새를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사막을 헤매며 숱하게 맡은 것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내장이 역했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이보다 더한 상황도 만나봤지만 내게 지옥은 이곳뿐이었다. 네가 여기에 있으므로.

 네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콱 주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은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원래 이렇게 하얬나. 문득 생각한다. 기억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이기적이라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계속 머릿속에 투영한다. 그러므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희멀겋게 웃고 있는 네 모습뿐이다. 안경을 올리는 손가락. 이쪽을 돌아보기 전의 등. 나를 부르는 목소리. 뻗어오는 손, 손, 손…. 그놈의 손이 문제지. 여전히 네 손목은 내 손 안에 있다. 네 뼈가 망가지면 너를 보호하기 위해 그 기이한 벌레들이 기어 나올까.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시도할 생각이 없다. 너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곧 너를 살리겠다는 뜻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예림보다는 우려가 더 잘 아는 이야기겠지.

 눈부신 눈동자가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누군가가 아니다. 나였다. 그의 눈은 틀림없이 나를 담고 있다. 내 눈은 그를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이 열차에 오른 뒤 대부분의 순간 우리는, 껍질을 뒤집어 쓰고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을 책망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과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구분선은 이 텁텁한 공기 속에서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산에 노출된 사람의 피부처럼. 가장 날것의 감정을 담은 채 우리는 서로를 마주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했는데. 네가 입술을 달싹인다. 마르고, 건조한 입술. 마치 아픈 사람 같았다.

 “너, 같은 건…. 처음부터 필요도, 없었어.”

 네가 손목을 뒤튼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완력으로 이길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성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환자와 일반인. 그것뿐이었다. 손목을 쥐던 손을 서서히 올린다. 손과 손이 맞닿는다. 손바닥의 얇고 넓은 표피가 비벼진다. 그런 말을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해야지. 마지막은 거의 흐느끼듯 들렸다. 한숨이 절로 났다. 이렇게 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분명 예전에는 좀 더 강했던 것 같은데.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했던 걸 철회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무심코 비교하고 만다. 그럼에도 눈앞의 너는 틀림없이 내가 ▪▪했던 너였다. 창백한, 아니 하얀 볼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닦아주고 싶어도 손이 모자랐다. 바닥에 떨어지게 내버려 둔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잘됐네. 처음부터 필요 없었으면 편하게 이용하면 되는 거 아냐?”

 뱉는 목소리가 생경했다.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너는 얼굴을 숙인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네 손은 내 손 안에 있었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네가 조금, 더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너를 살리는 대가로 내가 죽어도, 그것도 나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묘한 주문을 손에 넣은 순간. 어차피 네가 살려준 목숨이니까 그게 맞는 길일 것이다. 나보다는 네가 사는 편이 이 세상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면 좀 더, 좋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억지로 말을 쥐어짜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화가 났다.

 “예림아….”

 흐느끼는 듯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 내가 아는 너의 음성.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짓고 있을 표정은 알 수 있었다. 열차의 나무 바닥 위로 둥근 얼룩이 하나둘 생겨났다.

 “같이 살자. 같이 살아서 돌아가자, 응?”

 네가 뭐라고 말을 뱉었으나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은 여전히 놓지 않는다. 내 어조가 누그러진다. 천천히 노래하듯이 낯선 주문을 외운다. 붙들고 있던 손의 온도는 같았다. 네 손이 마치 내 손처럼 느껴졌다. 분간할 수 없었다. 한 음절을 뱉을 때마다 세상으로부터 유리되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나의 것이 더는 나의 것이 아니게 되는 감각.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 주문을 읊는 입술 사이에서 피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났다. 그럼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닿아있던 손이 이내 떨어지다가 이번에는 네가 다시 쥐어온다. 그게 못내 기뻐 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더는 차갑지 않은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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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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