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록의 그늘에는
배우 세주르 x 화장품 기획자 모브 (드림주 설정 있음, 상수리나무 아래)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청량함에 비해 어딘가 낮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낯가림이라 표현했고 누군가는 타고난 차분함이라 말했지만, 무엇이 맞다 결정되기도 전에 그 표준치 이하의 조용함은 곧 폭풍에 묻혀 사라졌다. 누가 더 어릴 때 데뷔하는지 경쟁이라도 시작한 파란의 중심에서 그는 꼭 그런 폭풍을 모른다는 것처럼 나타났다. 데뷔와 동시에 슈퍼스타가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하게, 아무 탈 없이 자리를 지키면서 완곡한 상승곡선을 그리던 그는 아이돌로서는 조금 완숙하고 배우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릴 나이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법한 자리에 섰다. 그가 살아온 길에는 그 어떤 경사로도 없었던 것 같았다. 여름을 좋아한다지만 무더위를 모르는 것처럼 웃었으니까. 힘겨움이 없는 것인지 힘겨움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당사자 본인 말고는.
“배우 분이 명함을 들고 다니시는 건 드물지 않나요?”
“소속사 방침입니다. 저희도 영업을 뛰어야 하잖습니까.”
“농담도.”
“정말인데요. 저희도 누가 써주지 않으면 큰일 나요.”
창백하게 하얀 종이의 질감 위로 잉크가 스며든 부드러운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싫어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고. 보편적인 호감상, 그리고 작은 몇 가지의 사건은 그의 명성에 누를 끼치기보다는 화제성을 가져다주는 용도에 가까웠다. 그것이 계산이었는지 하늘이 내린 선물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일단 자리 배치부터 바꾸고 싶은데 왜 내가 가운데야. 왜 내가 저 사람 맞은편이야. 팀장의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눈치를 주고 싶은데 이 사람은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는 명목인지 신이 난 건지 입을 터느라 정신이 없다.
“놀랐어요. 저희가 글로벌 브랜드도 아니고 따지자면 영세한 편에 가까운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셔서요.”
“제안서를 먼저 보내셨잖습니까.”
“그야 보내긴 했지만, 설마 될 줄은 몰랐다고 해야 할지….”
“이놈이 보고 좋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골랐어요.”
“광고를 내보내게 된다면 그건 꼭 써야겠네요. 세주르 아렌 씨가 직접 선택한 브랜드라고.”
“하하.”
가벼운 부상과 피로로 마무리되었던 여름의 촬영은 즐거웠고, 그 후의 수습을 위해 해외 어딘가에서 쉬다 돌아왔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간만에 하는 업무 미팅인지라 머리도 자르고 나왔다는 너스레에 작게 웃음소리가 퍼진다. 프라이빗 카페로 잡길 잘했다. 이 사람, 눈에 띈다. 연예인인지라 잘생긴 거야 당연하지만 실물이 주는 느낌이 더 압도적이지 않나. 힐끔 팀장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그제야 팀장이 업무를 위해 가져온 파일을 꺼낸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 명함이 없으신가요?”
그게 저와 제 옆의 인턴을 말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언뜻 검어 보이기까지 하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와, 단정하게 다듬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카페의 노란 조명을 받아 어딘가 조금 밝게 보여 신기했다. 원래 저런 색인가. 재킷 주머니에서 케이스를 꺼내 그와 그의 매니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브랜드 총괄 매니저는 팀장님이십니다. 저는 기획 담당이고, 이 분은 인턴이시고 아직 명함이 제작 중이라 없습니다.”
“로고가 다르네요.”
“아직 이 회사 소속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부탁하신 업무를 함께 대행하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문 위원?”
그는 명함을 다시 바라보다 똑바로 시선을 들었다.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사람이 팀장과 대화할 때가 편했다. 곁가지로 옆에서 대화에 장작을 넣는 정도가 제일 편하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가 조금 부담스럽다. 조금, 많이.
“그… 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이 분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세주르 씨에게 제안을 넣자고 한 게 이 친구입니다.”
입 좀 다물고 있지.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자 그와 매니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는데, 팀장의 말이 이어진다.
“작년 여름부터 브랜드 방향과 마케팅 방향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컨셉추얼한 부분이 너무 약하고 막연한 것 같아서 브랜드 개편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가장 적합한 광고를 위해 오래 고민하다 제안 드린 겁니다.”
“저 말고도 제안은 몇 군데 넣으셨을 것 같은데요.”
“아직입니다.”
물어볼 줄 알았지. 이걸 미주알고주알 다 대답하면 어떡해. 방향키가 제 쪽으로 넘어온 것 같은데 이게 방향키가 아니라 꼭 폭탄 같다. 한숨을 삼키며 팀장의 파일을 제 앞으로 잡아당겨 펼쳤다.
“세주르 씨가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제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실패할 경우 광고 모델 없이, 하던 대로 리브랜딩을 끌고 갈 예정입니다.”
“이유는요?”
“아무나 될 수 있다면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습니다.”
파일의 첫 페이지로 푸른 숲이 나타난다. 언젠가 숲을 산책하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찍은 사진이다. 자칫하면 조난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풍경이 무섭도록 아름다웠던 기억이 났다. 하늘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무성한 숲과 한밤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운 길. 그리고 한 모퉁이에서 만난 모닥불이 주는 안도감.
사람을 안도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일상 속의 위안, 그리고 차고 시리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만날 수 있는 온기.
“지금의 세주르 씨가 필요합니다.”
“지금이요?”
“내년, 혹은 내후년의 세주르 씨는 모르니까요. 그리고 이전의 세주르 씨도… … 잘 모르겠습니다.”
“되게 솔직하시네요.”
그는 설명을 듣는 내내 성실하고 진지했다. 특출나게 화려하지도 특색이 있지도 않고, 따지자면 이런 향조와 이런 제품을 파는 회사는 많다. 이제 와서 유니크한 감성 브랜드를 따라 하기엔 너무 많은 길을 와버렸고, 지금 와서 색조를 화려하게 셀링했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굳이 지금의 애매함을 없애지도 감추지도 않기로 했다. 애매한 구멍가게. 제 말에 대표가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장점이 될 수 있어요. 결국 여기를 믿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찰떡같은 사람을 쓰면 돼요. 애매한 구멍가게 같은 사람 말고,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지만 두루두루 괜찮아 보이고 과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여기를 왜 광고하겠냐는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요.
“… 해서, 정말로 세주르 씨가 저희 브랜드가 마음에 드셔야 광고를 진행하실 수 있는 만큼 회사의 모든 제품을 가져왔습니다.”
인턴에게 눈짓을 하자 큼지막한 쇼핑백 안에서 이것저것 제품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바디 제품 몇 종류와 메이크업 제품 몇 가지가 전부다. 그는 나열된 제품보다는 여전히 컨셉 아트와 파일 안에 기재된 브랜드 소개에 눈이 머물러있다.
“시즈널 이벤트로 코스메틱 브랜드와 광고를 해본 적은 몇 번 있는데, 한 해 이상의 계약은 처음이라서요.”
“저흰 시즌에 맞춰 신상을 만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광고의 분량도 생각보다 적을 겁니다.”
“향조가 주류인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색조도 판매하네요. 모델이 저라면 색조를 셀링할 수는 없을 텐데요. 이제 전 어린 아이돌도 아니고.”
장난스레 던진 말엔 뼈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절을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그저 떠보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 흰 셔츠의 소맷단을 접어올리며 그는 웃었다.
“셀링할 겁니다.”
“어떻게?”
“세주르 씨의 애인이 쓴다는 컨셉으로요.”
그의 눈동자에 잠시 웃음기가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짙게 웃음기가 맺혔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진부했을까. 애초부터 화장품 셀링은 내 분야가 아니란 말이야.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정적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그가 컵을 내려놓았다. 탁, 하고 맑은소리가 울렸다.
“이 파일,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
그의 말에 팀장이 선뜻 수락의 대답을 던졌다.
폭탄이 다시 넘어갔다.
***
광고 시안까지 있는데 주지 말 걸 그랬다, 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가 전화로 제품 카탈로그를 요청한 후였다.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한 이유가 있다. 아주 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예인으로서 활동하고도 구설수 없이 제법 유명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치밀하고 예리한 면이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사람을 상대로 설득할 자신이 없던 것뿐이지. 그의 팬이라는 호감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게 악수였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팀장이 잘하는 매달리기 전법이라도 쓰라고 할 걸 그랬나. 세상 모든 좋은 물건에만 둘러싸여 자랐으며 지금도 그러고 살 사람을 상대로 제안한 광고가 명품 라인이 아니라는 게 어딘가 부적합한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안 어울리나? …… 그래도, 하면 좋겠다. 작게 소원을 비며 카탈로그와 작은 샤셰를 함께 보냈다.
택배에서 좋은 향기가 나더라는 대답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같은 카페에서, 하지만 그날과 다르게 이르지 않은 아침 시간에 만난 그는 초겨울에 어울리는 오트밀 색의 니트를 입고 있었다. 매니저가 같이 나올 줄 알았건만 그는 혼자였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저도 혼자였다. 정확히는 입구까지 왔던 팀장이 급한 미팅으로 회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노트와 펜을 꺼내고 나서도 잠시간의 침묵에 어색하게 펜을 만지작거렸다. 독대로 사람을 대하는 건 매번 긴장한다. 그는 제 긴장한 손을 잠시 바라보다 웃었다.
“그날 주신 쇼핑백을 집에 와서 풀어봤는데, 새 제품들이 하나씩 더 있던데요.”
“운동도 다니시고 여행도 잦으시다고 하셔서요. 여행용도 챙겨드리긴 했지만, 며칠 동안 머무르거나 하면 작은 사이즈는 쓰기 번거로운 면도 있기에 본품을 더 드렸습니다.”
“그렇긴 해요. 친절하시네요.”
“… 감사합니다.”
“파일에 적혀있는 광고 시안이 전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잠깐 보자고 한 거고.”
그는 작은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돌려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준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일까. 긴장해 펜을 꼭 붙든 상태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광고 시안이야 이야기하면서 바꿀 수도 있는 거고.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런 향 제품이야 워낙 일 때문에 많이 써보긴 하는데, 지금까지 뚜렷하게 뭘 좋아한다, 이런 게 없었거든요. 워낙 금방 질려서. 그래서 저랑 안 맞는 거 아닐까 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의 말이 흐려진다. 긴장하지 말자.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뭔가 협상의 여지가 있는지도 몰라.
“제품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싶어서.”
그리고 그는 빙그레 웃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향수를 쓰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이런 향을 뿌린 걸까. 우디에 아주 옅은 시트러스 향조가 느껴지는 것이 그와 잘 어울렸다. 따뜻하고 포근해 보이는 느낌. 연상되는 향은 모닥불에 아주 약간의 위스키, 한겨울, 그리고 카페 라떼.
하지만 지금은 초겨울과 겨울의 사이이고 밤이 길긴 하나 아침에 가까운 오전이다. 두 잔 놓인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이고 이 사람은 자기 모습이 어떻게 남에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잘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다. 휘둘리면 안 된다.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사업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직접 봤잖아. 정신 차려. 펜을 두어 번 딸깍이다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가 직접 제품 소개를 해드리면 되는 걸까요?”
“본인 취향을 섞어서 말이죠.”
“그날도 말씀 드렸지만 따지자면 저는 기획이라 이런 류를 직접 홍보하고 셀링하는 데엔 서툴….”
“그래서 마음에 들었는데요. 솔직하게, 날것으로 대답하시는 것 같아서.”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화장품 쪽을 담당한 건 처음이라 도움이 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럼 오히려 판에 박힌 말만 하면 되잖아요.”
“… 그걸 원하고 저를 부르신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맞아요. 정확하네.”
그는 몸을 당겨 앉았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톡톡, 하고 원목 테이블을 두드린다. 컵에 맺힌 물방울이 유독 영롱하게 빛나는 건 이 자리에 햇빛이 잘 들어서일까. 그날과 다른 시간이라서인지 햇빛이 바닥으로 깔리는 곳에서의 그는 그날보다 조금 더 어른 같았다. 서른 살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유감스럽지만 그 제품 관련 이야기는 저희 팀장님이 훨씬 더 잘하실 수 있는데, 하필 오늘 부재시라서.”
“이레네 씨의 개인적인 평가를 듣고 싶다고 하는 건데요. 그건 제 광고 수락 여부와는 관계가 없어요. 그냥 흥미인 거지.”
“좋다고는…… 생각합니다.”
“제품이 몇 종류인데 그렇게 퉁쳐서 말을 해요. 그렇게 말하는 타입 아니면서.”
“…….”
차라리 압박 면접이 낫겠다. 거짓말에 재주가 없다는 게 이렇게 슬플 줄이야.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여전히 테이블을 느릿하게 두드리며 저를 바라보다 턱을 괴었다. 매니저 없이 나온 건 이런 이유였나. 그러니까 팀장이 있었어야 했다고. 내적 절규를 지르기를 몇 초. 이 사람에게 말을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는 향이 들어간 제품을 즐기지 않습니다.”
“흐음. 그럼 색조는요?”
“보시다시피 색조도. 오늘 같은 날은 하긴 하지만 즐긴다기보다는 해야 하니까 쓰게 된 것들뿐입니다.”
“재밌네.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데 화장품에 관심이 없어요? 이러니까 더 궁금하지. 그럼 오늘은 향수도 안 뿌렸어요?”
“누군가를 만날 때는 향수를 뿌리지 않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날도 오늘도 정장이신데, 이것도 클라이언트 때문에?”
“네. 격식을 차려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대화가 이렇게 오가는 게 맞는 걸까. 대화의 중심이 되는 걸 반사적으로 피하는 편이라서인지 말실수라도 할까 싶어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궁금한 것을 잡았다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웃음의 농도가 짙어진다. 종종 이런 순간 고민하곤 한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게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 타이밍은 끌려가야 하는 걸까, 고삐를 잡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무게추를 놓아도 공평하지가 않다. 고작 제 개인의 취향이 내주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기에 마지못해 이야기를 풀었다. 대체 이런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이 카탈로그 라인업 중에 뭐가 제일 좋았어요?”
“여기, 이 녹색의 라임 향이 좋았습니다.”
“이유는요?”
“여름에 쓴 거라 더운 계절이랑 잘 어울렸거든요. 거품이 잘 나고 상큼해서.”
“여기서 미는 건 이 시그니처잖아요. 우디에 바닐라 베이스.”
“…… 제 취향은 아닙니다.”
“아, 진짜 재밌네. 전 이 중에서 따지자면 그게 제일 좋아서 시그니처가 맞구나, 했거든요.”
“저어. … 제가 제 회사 제품을 까는 것처럼 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맞나요?”
“맞습니다. 아, 저 광고 모델 할 거예요.”
“네. 광고모델 하… … 네?”
“응. 할게요.”
그는 산뜻하게 웃으며 커피잔을 집어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빨대로 음료를 쿡쿡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 거예요. 일단 첫 광고는. 그리고 이레네 씨에게 뭔가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호기심에 물어보는 거니까 겁은 먹지 말고.”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겨울에 진행할 마케팅 시안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그건 나중에 매니저 나왔을 때 해요. 지금은 재미없어.”
“아까 광고가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있는데 지금 얘기하긴 싫다니까요. 케이크 먹어요? 저기 크리스마스 한정 케이크가 나왔던데.”
“… 저는 세주르 씨를 모델로 기용해 이 회사를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은 나랑 놀아줘야겠네. 클라이언트 비위 맞추는 것도 일이잖아요?”
기가 막혀. 말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져나갈 구석 없이 철통처럼 굴 줄은 몰랐다. 꼭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만난 표정이 아닌가. 제멋대로 몸을 일으키더니 커피 두 잔과 케이크를 담은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갑질을 한다면서 왜 이런 걸 사는 거지. 새 커피가 반갑긴 했으나 어딘가 불안해져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커피를 받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왜 이렇게 긴장해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고 가면 되는데.”
“저어, 호의는 감사하지만 법인카드가 있으니 이런 건 제가 결제하게 해주세요.”
“…… 진짜 재밌네. 진심이에요?”
“이럴 때 말곤 외근도 없는 사람이라 법인카드 쓸 일이 없거든요.”
“아메리카노만 먹어요?”
“네. 아이스로.”
“나돈데. 통하는 면이 있네요, 우리.”
그는 작고 가느다란 포크를 제 쪽으로 놓아주고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비닐을 벗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맞춘 디저트는 생크림 위로 빨강과 초록이 상징이라는 것처럼 화려하게 데코 되어 있었다. 달겠지. 아마 맛도 있을 것이다. 애초부터 이 카페를 고른 게 커피를 좋아한다던 그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였으니까. 위태로울 만큼 높게 쌓아 올려진 케이크가 접시째 제 쪽으로 조금 밀려오며 흔들렸다.
“사진도 안 찍어요? 이런 거 많이들 찍잖아요.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인스타그램을 안 해서요.”
“저도 안 해요.”
“그럼 그 계정은 누가 운영해요?”
“매니저, 소속사 스탭 셋 정도? 물론 내키면 가끔 하긴 하는데 매니저 폰 빼앗아다 사진 찍고 올리는 정도죠. 리브랜딩 할 때 중점이 뭐였어요?”
“많은 부분을 손댄 건 아니었습니다. 제품 자체는 질이 좋았거든요. 뭐, 요새 상향 평준화가 하도 심해서 어디가 제품이 별로겠냐만, 대충 만들었다거나 성의가 없진 않았어요. 시장 트랜드가 너무 빨리 바뀌는데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고 봤죠.”
“흐음.”
“오브제나 네일 오일 같은 부분까지 내려고 하시길래 그걸 다 쳐내고 있는 제품에 집중하자고 했어요. 시그니처를 강조하고 제품별로 상징하는 이미지나 분위기를 조금 더 명확하게 담아야겠다 싶어서 포장이랑 사진을 새로 찍었고요. 제가 한 건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브랜드랑 저랑 무슨 연관성이 있어요? 지금의 제가 좋다면서요. 따지자면 제 리즈는 제작년이라고 많이들 말하거든요.”
“우연히 잘 나온 사진 한 장, 영상 몇 초 만으로 리즈 시절을 함부로 재단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레네 씨, 욕먹을 말 잘하네요.”
“…… 지금이라도 팀장님 불러올까요?”
“돌아가서 내가 광고 땄다고 떠들면 되잖아요. 이레네 씨 혼자 와서 성공한 거라고 꼭 해요. 그리고 자꾸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화제 피하지 마요.”
“…….”
“좀 자세하게 듣고 싶거든요. 커리어가 굵직해지고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그룹보다 개인 활동에 주력하기 시작한 오 년 전, 드라마에서 자리 잡은 게 삼 년 전, 그리고 영화가 괜찮게 잡힌 건 이 년 전. 단순히 저를 쓰고 싶어서 지금의 제가 좋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뭐가 되었건 지금의 제가 제일 낫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요. 갑질이라면 갑질이겠지만, 너무 궁금해서.”
“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취향과 제 생각은 정말 다른데요.”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그는 즐거운 것 같았다. 그의 팬이었다면 그가 얼마나 신났는지 알 수 있었을까. 호감이 있는 사람이었고 항상 성실하게 작품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종종 사건이 있었지만 결코 그게 그의 본업에 해가 되는 방향이 아니었으며 조용하고 덤덤하게 자기 일을 맡았다. 이런 사람의 팬을 한다면 힘들진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 좋아한다고 말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
머뭇거리다 휴대폰 갤러리에서 사진을 한 장 띄워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봄에 찍은 사진이네. 소속사에서 올렸던 거잖아요. 이거 초점도 나가고 해서 금방 지웠다고 했는데.”
“아직 인터넷 여기저기에 남아있긴 해요.”
“초점도 나갔고 좀 흔들리기도 했고. 이 사진이 마음에 들었어요?”
사진 속의 그는 경계가 모호하게 보였다. 연예인이 천성이라고 할 만큼 무대 위에서나 순간순간이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분으로 끝나는 스포트라이트에서 그라운드를 바꾸겠다 선언했다. 차근차근 성공했다. 그 과정이 지나치리만치 평온하고 안정적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저게 쉬울 수가 있을까? 아버지는 정계 거물에 형은 기업인, 본인은 연예인. 자신의 행보가 그들의 잡담 주제일 수도 있고 공격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실패 없이 성공을 이어간다는 게 정말 쉬웠을까? 모든 환경이 유리했기에 그가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기엔 생각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보니까 실패한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렇기에 처음으로 그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의 예민함을 잡아냈다. 그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는 하냥 무던한 것처럼 웃으며 어디에서나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게 쉬울까? 예민한 사람들이 자신의 예민함을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무던한 연기를 잘 한다고 하던데,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사진 속의 그는 평소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고 어딘가 피곤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베이지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미간이 조금 찡그려져 있었다. 소속사가 이사진을 지운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이미지와 지나치게 상반된다고 판단했겠지. 올린 이유도 알 것 같다. 이것 또한 제법 멋지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그 순간의 날카로움이 좋았다. 홀로 있을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 드러나는 모습과 감각들이 있지 않나. 저 모습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부 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 또한 그다. 딱히 홍보하고 자랑하고 내보일 필요는 없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숲의 그늘.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저희 브랜드에서는 너무 완벽하기만 한 향보다는 다양한 면을 담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제품에서 나는 향은 우디와 바닐라죠. 한밤의 모닥불 앞에서 마시는 바닐라 라떼를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조향사가 말하셨어요. 이 샤워젤의 잔향에서는 나무껍질의 향이 아주 조금 납니다. 못 느끼시는 분들도 많지만요. 나무 껍질의 향을 넣으신 이유는 그래야 바닐라와 우디의 부드러움이 더 두드러져서라고 해요.
향으로 어떤 장면과 순간을 온전히 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부분이 꼭 필요합니다. 소위 말하는 디테일이라는 것인데, 저는 이 단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
“… 말이 길어졌네요. 그러니까, 이 사진에 담긴 세주르 씨의 분위기나 감수성이 좋아서 제안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보다는 조금 더 폭넓고 개인적인 분위기를 저희 제품에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 죄송합니다. 왜 얘기가 여기로 새지.”
이래서 되도록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듣는 그의 시선이 부끄러워져 허둥지둥 커피로 붉어진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그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아무 반응이 없다. 흐음, 하고 작은 대답을 대신하더니 그는 가만히 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지기에 실언을 한 걸까, 싶을 때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저 때, 기분이 안 좋긴 했어요. 원래 아이돌이나 배우나 허락받은 타이밍 말고는 어지간하면 남이 볼 때는 웃고만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저 날은 팬 하나가 저한테 웃으라는 말을 좀 거칠게 해서 기분이 불쾌했던 날이에요. 그래서 표정 관리도 안 하고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또 까이기도 했고.”
“아….”
“며칠 있다 사진 올라온 걸 보고, 또 저걸 셀링 포인트로 잡길래 뭐 어쩌라는 건가 했어요. 안 웃었다고 까이고, 안 웃은 사진으로 홍보하고. 불쾌한 걸 티를 낸 내 잘못이니 머리로는 알면서도 괜히 앙금이 남았었는데. 뭐, 그날 기분이 나빴어요. 이유 없이 짜증 나는 날이었겠지.”
그렇게 말하지만 그는 더없이 산뜻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짜증이라곤 세상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햇빛이 바닥에 잔잔하게 깔리던 아까와 달리 차츰 물처럼 차올라 그의 니트 어딘가에 내려앉는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더 삼키곤 포크를 가져다 케이크 모서리를 푹 찔러 한 입 가져갔다. 그리고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근데 이게 이렇게 이어지네.”
“… 불쾌하신 건….”
“응? 좋은데요. 칭찬이잖아요. 케이크 맛있는데 안 먹어요?”
“네? 네, 네. 잘 먹겠습니다.”
“여기 커피도 맛있더니 케이크도 맛있네. 이레네 씨가 골랐어요?”
“네.”
“작년까진 단 거 싫어했어요. 작년의 이레네 씨는 어땠어요?”
화제가 휙휙 바뀐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하고 거리를 좁혀야 하는지 잊어버릴 것 같아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다. 물을 한 모금 삼키지만, 이 사람의 질문은 도무지 어디까지 대답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뭘 궁금해하는 걸까. 어디까지를 바라는 걸까. 어디까지 말하면 이 사람의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말하면 제게 관심이 식을까. 어떻게 해야 다음 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계산속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이건 내 재능 밖이다. 아까도 그러했듯 영민한 사람에게 내밀 수 있는 영민하지 않은 사람의 무기는 솔직함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굉장히 바빴습니다. 회사를 옮기기 전이었거든요.”
“다들 바쁘죠. 이레네 씨는 원래 기획 일을 오래 했어요?”
“본업은 다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만 기획 일을 한 거고, 원래 직종은 따로 있어요.”
“뭔데요?”
“…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 하하하. 다음 계약서에 사인하면 알려준다 이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요. 말하기 싫을 수도 있지. 전 작년엔 촬영 때문에 해외 여기저기를 쏘다녔는데, 사실 반 정도는 촬영을 핑계로 거기서 쉬었어요. 들어오기 싫었거든요.”
“그러셨구나.”
“네. 작년의 저는 그랬고, 지금의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한 입 더 케이크를 먹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자신의 손목을 잠시 만지작거리다 시선을 들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경고이자 칭찬인 셈이었다. 현재의 그를 붙잡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그것은 언제나 형태와 모양을 바꾸어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원하는 형태를 잡아보라고. 그녀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모양이 다소 흐트러지긴 하였으나 용케도 그 커다란 케이크가 무너지지 않고 똑바로 서 있다.
가느다란 포크를 집어 들어, 가장 뾰족한 모퉁이를 큼직하게 잘라내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럽고 새콤했다.
***
좋은 기회, 좋은 인연, 원래부터 쓰던 브랜드라서. 뻔한 말과 진실도 거짓도 아닌 말을 한 줄도 쓰지 않은 그는 산뜻한 소개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제안서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으며 제품은 몇 가지가 마음에 들고 몇 가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만 광고할 예정이라는 거침없는 말투였다. 합의되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사실 그가 시그니처 제품 하나만 광고해준다 하더라도 회사 입장에서는 땡큐인 입장인지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계약서를 쓰는 과정은 순탄했으며 그는 자기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어떤 모습을 연출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이미지와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의 합의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쓸 생각은 없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왜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날 단독 미팅을 스스로 평가하자, 말재주도 없는 데다 상황을 말아먹기 딱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것 같다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여 컨택 담당자를 팀장과 인턴에게로 넘기고 나서 몇 주가 지났을까. 첫 시작인 만큼 조금 더 고전적이고 조용하게 진행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한창 광고 시안을 짜고 있을 무렵이었다. 인터폰이 울려 반사적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준 게 화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팀장이나 대표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매니저와 함께 두 손 가득 음료며 무언가를 들고 나타난 사람이 하도 낯익고 하도 낯설어 반응이 늦었다. 제 등 뒤에서 아렌 씨, 라는 말과 함께 작은 탄성이 터지고 나서야 얼른 달려가 그와 매니저의 손에서 짐을 받아들었다.
“이게 대체 뭐… 뭔가요?”
“역조공.”
“네?”
“커피차 보냈잖아요. 저번 촬영 때는 쿠키 세트 보내줬고.”
아, 그랬었지. 화장품 회사라 여직원이 많으실 것 같아 단 종류로 사 왔다는 그의 다정한 말투에 사무실이 순식간에 들뜬다. 몇몇 사람은 벌써 휴대폰을 꺼내 찍고 있고, 그는 찍으라는 것처럼 넉살 좋게 브이까지 그리며 웃어주고 있다. 역조공이라니. 산처럼 쌓인 쿠키와 커피를 바라보다 인턴을 부르니 오늘 저녁에 인스타그램에 올리겠다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모처럼 오셨으니까 대표님 잠깐 뵙고 가시겠어요?”
“제가 왜요?”
“… 그럼, 저희 광고 시안 초안이라도?”
“그건 매니저 줘요.”
“…… 역조공이란 말이 부담스럽긴 한데, 잘 먹겠습니다.”
“이레네 씨 보고 가라는 말은 왜 안 해요?”
“제가 연락처를 안 드렸었나요?”
“담당자를 바꿨잖아요.”
이거 맛있나? 중얼거리던 그는 쿠키 하나를 뜯어 작게 조각내 삼키더니 아주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버터 맛이네. 버터 맛을 싫어하는 걸까. 반사적으로 휴대폰에 그것을 메모하는데 그의 말이 추궁하듯 따라붙는다.
“제 담당자가 왜 바뀐 건가요, 이레네 씨?”
“… 해명해도 됩니까?”
“네.”
“하나, 저는 이 회사 소속이 아닙니다. 둘, 원래 클라이언트 담당은 팀장님이시고 인턴은 아이돌 코디 출신이라 이런 고객 응대에 능합니다. 저는 클라이언트와 직접 만나는 직업과는 거리가 멀어서 누를 끼칠 것 같아 자진해서 제안 드린 사항입니다.”
“내가 그날 이거저거 캐물어서 그래요?”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거리며 저와 그를 훑고 지나간다. 저야 사람들을 비스듬하게 등지고 있고 너는 가볍게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기껏해야 예상할 수 있는 대화의 화제는 덕담, 안부, 혹은 다음 광고에 대한 기대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물어뜯기네 마네 하는 치열한 상황이 아니라.
“… 조금요.”
“불쾌했으면 말을 하지.”
“불쾌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말을 요령 있게 하지 못하는 편이라서요.”
“혹시 법조나 회계 쪽에서 일해요?”
“…… 묵비권.”
“아니구나. 이레네 씨, 거짓말은 서투르네요.”
그는 웃으며 테이블에서 커피를 집어다 제게 하나 건네주곤 제 몫의 빨대에서 비닐을 벗겨내고 한 모금을 삼켰다. 저번에 갔던 그 카페의 홀더다. 큰 사이즈의 얼음컵이라 제 손엔 꽉 차는데 저 사람의 손에서는 이렇게 작아 보이는구나. 손이 큰가. 저런 것도 살리면 좋겠다 생각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 그러니까, 고양이인 척 하는 호랑이 같지 않나. 배가 부르긴 하지만 주변에 뭐가 어쩌고 있는지 정도는 빤히 파악하고 있는.
“아니, 내가 뭐 실수했나 해서 찾아왔죠.”
“… 정말 실수했다고 생각하면 찾아오는 게 더 실수 아닌가요?”
“사실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얼굴 보니까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닌 것 같고. … 아닌가?”
“그러니까, 적합한 사람에게 일을 넘긴 거라니까요.”
“갑 의견도 들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는 조금 뾰로통하게 대답하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한참이나 높은 곳에 있던 시선이 조금 낮아져, 그제야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조금 편해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힐끔거리며 조금씩 살피지만, 그는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주변 상황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이렇게 지낸 기간이 길어 완전히 무시하는 게 가능한 걸까. 다행히 그나 제 목소리가 낮아 대화 내용은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다.
“호옥시, 내가 오해하게 했나 싶기도 해서.”
“오해요?”
“내가 뭐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고.”
… 아무래도 으름장과 뻐김으로 노선을 바꾼 것 같다. 투덜거리며 커피컵을 만지작거리는 커다란 손에 작은 밴드가 감겨 있다. 다친 건가. 저번 예능에서 가벼운 스포츠 미션 같은 게 있다더니. 제 시선이 그 밴드에 머무르는 걸 눈치챘는지 그는 제 눈앞에 손을 흔들곤 투덜거리는 말을 이었다. 의외로 미주알고주알 말을 잘하는 편이네. 이건 몰랐는데.
“그런 착각을 할 만큼 제가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나요?”
“그럼 담당자는 이제 이레네 씨로 낙찰. 무르기 없어요.”
“제 의사는요?”
“계약을 결정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담당자라고 했잖아요. 이제 와서 당신이 빠지면 곤란하지.”
매니저가 무어라 멀리서 손짓하자 알았다는 것처럼 그가 손을 흔들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훌쩍, 시선이 높아진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곤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책임져요. 나 울게 만들지 말고.”
…… 기가 막혀.
아무래도 그에 대한 코멘트에 뻔뻔함, 을 한 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
그는 괜찮은 모델이었다. 카메라에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 멋진지 잘 아는 편이라는 말은 정확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본인의 취향이나 방향을 결정할 줄도 알았다. 이걸 이용하면 분명히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가져온 그의 쇼핑백 안에는 낡은 카메라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는 형태의 사진기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자 만져보라며 건네준 게 화근이었다. 내키는 대로 찍어보라는 말과 함께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손에 들어왔다. 인턴에게 이럴 때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자 그냥 걸릴 때까지 찍는 거라는, 도움은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조언이 돌아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 촬영이었다. 작은 섬에 자리한 예쁜 펜션을 빌렸고, 거창하게 화려하고 세밀하면 너무 과한 느낌을 줄 수 있으니 되도록 있는 그대로 찍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군데군데 작고 부드러운 간접조명을 두는 것만이 연출의 전부였기에 너무 어둡게 나오지 않을까, 후에 보정을 하거나 할 때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의 선택이 맞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약간의 반짝임과 실내의 어둑함이 대비되어 분위기가 고요하고 아늑해 보였다. 그리고 그 고요함을 두르고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휴식과 고독 사이에 비스듬하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애초부터 화려한 장비와 팀을 꾸리고 사진을 찍을 생각도 없었지만, 소수 인원으로 촬영을 할 수 있었기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테이블에 올라오는 간단한 간식이며 커피는 스텝들에게도 한 잔씩 쥐어졌으며,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던져지는 이야기들에 그가 살풋 웃는 순간이 카메라에 잡히자 인턴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함을 두른 그는 서늘하고 온화하지만 예민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진에 담아내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숲이 푸르른 창밖, 실내는 원목의 가구가 자리해 조용하고 아늑하지만 조금 춥다. 온기라고는 벽난로와 컵에 담긴 바닐라 라떼 한 잔이 전부이고. 이 사진을 이대로 내보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최종본을 앞에 두고도 망설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은 부족한 것처럼 내보는 게 좋아요. 과하면 손대기 힘들어지니까.
“내 말이 맞죠?”
등 뒤에서 떨어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회사는 상승 기류에 탑승하는 것에 성공했다. 정확히는 크게 나락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성공도 하지 못한 애매한 지표에서 화제성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정말로 존재할 법한 일상을 찍은 것 같은 스냅샷과 현장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까지 입소문을 탔으며 그는 그 사진이 제품과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은 없었고 그 또한 그 제품이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 것까지 한데 묶여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진을 잘 찍었다던가 포토제닉하단 말이 제법 나왔지만 거기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아주 잘 알고, 그걸 그대로 구현하는 사람.
다음 광고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이렇게 된 거 아예 모든 계약을 담당하라는 대표와 팀장의 제안이자 강요로 다시 한번 이 사람과 독대하게 되었다. 두어 달 만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신제품도 아닌 상품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그렇게 많이 빗발치는 건 처음이라 대란을 수습하는 데만 해도 몇 주가 꼬박 걸렸다. 다음 광고까지 이 수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사람이 과연 함께할 것인가. 사실상 이 수요는 그가 전부 끌어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초겨울의 계절이 한겨울로 바뀌었을 무렵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작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너무 유명해지면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구간이 있다나. 이런 작은 회사에선 너무 유명해져서 느끼는 고충이 뭔지 평생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는 어떤 고집이 있었다.
“계약 때문이죠?”
“…… 잘 지내셨냐고 물을 틈은 주셨으면 하는데요.”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이레네 씨가 더 잘 알잖아요. 저번 주 라디오에 커피랑 쿠키 보냈으면서.”
“그거야, 저희 갑님이시니까요.”
“덕분에 잘 지냈어요. 아주 살뜰하게 챙겼던데, 혹시 이레네 씨가 직접 했습니까?”
“네. 제가 아렌 씨 담당이라서.”
“좋네.”
짧은 촬영을 마치고 왔다던 그는 감색 재킷 아래로 옅은 푸른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보석 촬영이라 조명이 너무 화려해 눈이 힘들었다던 그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가린 채로 잠시간 얼굴을 찡그린 채로 쉬었다. 이곳의 조명이 화려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소를 바꿔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피곤한 것처럼 눈을 쓸어 비비던 그가 턱을 괴며 웃었다.
“다음번 광고 시안이… 이거였죠. 기프트 세트랑 색조. 흐음.”
“다섯 개 정도 제안을 만들어 왔는데, 이 중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시면 좋겠네요.”
“저번 촬영이 마음에 들긴 했거든요. 어지간하면 촬영이나 취향도 다 나한테 맞춰주기도 하고.”
“워낙 감각이 예리하셔서, 저희 쪽에서도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계약서 앞에서 약해지지 마요, 이레네. 재미없잖아.”
“…… 정말인데요. 세주르 씨가 선택하신 연출이 좋았고 호평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시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시선이 이쪽으로 똑바로 떨어진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 사람은 종종 사람을 떠보는 건지 정말로 궁금한 건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처럼.
“제 애인은 어떤 사람일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마시던 커피가 걸릴 것 같았다. 간신히 무사히 삼키는 것에 성공하고 나서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뭐가 문제냐는 것처럼 얼굴을 기웃거렸다. 함께 활동하는 배우 혹은 가수와 잘 어울려 종종 이야기가 나오긴 해도 공식적인 열애 인정이나 스캔들은 한 번도 없던 그였다. 사생활이 깔끔하다는 평가는 아직도 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 같은 말이었기에 그가 비공식적으로 연애를 할 수는 있어도 상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냥 예상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여자가 어울릴 것 같다던가.”
“… 좀 스토커 같으시겠지만 지금까지 이상형 언급한 자료를 취합하면 키가 크고 부드러운 분을 좋아하시는 걸로 예상했는데요.”
“그걸 조사했어요?”
“예능이나 잡지사 같은 곳에 있는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거 소속사에서 시키는 대로 대답한 거 꽤 많은데.”
“그래도 믿을 건 그거뿐이라서요.”
“이레네 씨 생각은 어떤데요?”
“… 뭐. 아렌 씨가 키가 크시니 키 큰 여자분이 어울리시긴 할 것 같네요.”
“이레네 씨도 이상형이 있을 거잖아요.”
그의 질문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조금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그날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녹는 오후였다. 시간은 저녁이 아닌 밤에 가까웠고, 둘 다 디카페인 음료를 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담한 케이크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네요.”
“여자들은 보통 키 큰 남자 좋아하지 않나? 더 말해봐요.”
“딱히 없어요.”
“마지막 연애는 언제였어요?”
“… 아렌 씨도 대답해 주시나요?”
“그런 게 궁금해요? 진작 물어보지.”
“그냥 됐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됐어요. 안 묻고 안 들을래요.”
제 질린 말투에 그는 작게 웃으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오른쪽 귀퉁이를 푹 떠올려 입으로 가져가고 웃었다.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이쪽 일이 이러다 보니까, 연애를 해도 속상할 일밖에 잘 안 생기는 것 같던데.”
“일단 들키지 않기도 쉽지가 않잖아요.”
“뭐, 정말 피치 못한 사정으로 들키는 애들도 있지만 자기가 치밀하지 못해서 들키는 애들도 많아요.”
맛있네.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케이크를 작게 한 입 더 삼키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재킷 아래로 떨어지는 커다란 손에는 여전히 밴드가 감겨있다.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더라. 독립하고 나서는 연애할 짬이 별로 안 났어요. 사귀어도 오래 못 갔고.”
“애인이 있으면 잘 대해주실 것 같은데요.”
“예의상 하는 말이에요, 진심이에요? 제가 그렇게 섬세한 구석이 있진 않아요. 일이 먼저인 사람이라.”
“… 그건 저도 그래요. 바쁘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 하는 타입이라.”
그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궁금하시다 이거지. 본인의 이야기를 내어주는 건 아마 내가 이만큼 카드를 깠으니 너도 까라, 이런 뜻일 거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레몬 버터 색의 크림 케이크가 카페 조명을 받아 화사하다.
“당분간은 연애하긴 힘들 것 같아요.”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
“아니면 정말 개같이 데였던가.”
“……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네요.”
“아, 불쾌했으면 미안해요. 그냥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건데.”
빈말은 아니다. 그저, 호기심이 아주 많이 앞서는 사람일 뿐. 케이크를 한 입 마지못해 가져가 삼켰다. 부드럽고 달지만 조금 무거워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덧씌우듯 삼켰다. 입에 맞지 않는다.
“일로 워낙 바빴던 시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바빠서 연애는 고려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군요. … 제 팬들은 제가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근데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든요. 정말 아무 이상형이 없다고 하면 열애 중이라 대답을 회피한단 말이 나오니까 무슨 특징이라도 붙이는 거거든요. 물론 이러면 키 큰 여자들이랑 죄다 엮이기도 하지만. 하하.”
“근데 키가 워낙 크시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해요. … 뭐, 컨셉에 꼭 아렌 씨의 이상형의 요소가 반영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게 반영되면 셀링 포인트가 될까요?”
“팬들에게는, 분명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꼭 진짜 이상형을 담진 않아도 내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의외로 계속 말이 나오는 것 같으니까.”
그는 파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형이라. … 애인. 양 뺨을 문지르듯 감싼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아렌 씨와 사귀었던 분들이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런 건 있을까요?”
“다 착했죠. 이해 못할 구석도 있었고 내가 좀 바빴고.”
“… 무심하신 타입이시군요.”
“찔리네요. 여자들이 이런 부분에선 예리하다니까.”
“거의 휴식기 없이 지내셨잖아요. 활동기에 얼마나 바쁜진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데이트는 거의 집에서 했어요. 사람들 눈 피하기도 좋고, 자기도 좋고.”
그가 의외로 사생활을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 떠올랐다. 많은 것을 말하고 알려주고 대답해 주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아주 작은 조각이고, 그것을 그와 직접 연결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작고 둔탁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줄 때 작고 둔탁한 것을 주는 것처럼 건네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모든 것을 언제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렌 씨의 애인이라는 컨셉을 차용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시안이 또 십수 개는 되니 그때 결정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그치. 일단 결정도 안 한 거니까요. 이레네 씨. 저 이거 할까요 말까요?”
“피곤하신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셔서 푹 쉬시고 맑은 머리로 좋은 소식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 단호한 거 봐. 혹시 체온도 낮아요?”
“… 손이 좀 차긴 해요.”
“근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어요? 이러다 오래 못 살아요.”
그는 웃으며 대답하다 시계를 잠시 확인하더니 슬슬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먼저 밖으로 나섰다. 계산대에 다가가자 가격 대신 계산이 끝났으니 또 방문해 주시라는 직원의 상냥한 말에 얼굴을 돌렸다. 그는 이미 카페 밖에 나가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어리는 겨울이다. 촬영을 진행했던 펜션은 주변에 숲과 크리스마스를 위한 아주 약간의 조명 장식 말곤 아무것도 없어 눈앞이 까맣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은 도시 한복판이니 그런 어둠은 온데간데없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이 이리저리 뒤얽힌 인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높은 코트 깃 하나로 의외로 손쉽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갔다.
“의외로 사람들이 몰라보네요.”
“조명이 없으면 사람이 좀 후져 보이거든요. 솔직히 연예인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거라고 봐요. 특히 남자들은.”
신랄한 자기 디스에 가까운 말을 내뱉는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제법 근사했다. 그보다 잘생긴 사람도 많고 그보다 키가 큰 사람도 많다. 그보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교집합에서 그를 한 번 좋아하게 된다면 굳이 싫어하거나 식게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절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지필 줄 알았다. 그것이 본능적이건 학습의 결과건 적절한 시기에 그가 터득한 것임이 틀림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이런 사랑을 받는 거겠지.
천천히 그를 따라 골목길 안쪽으로 붙어 걷기 시작했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조금 협소해 무섭던 차였다. 하늘에서 눈이 옅게 내리는 것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내일 출근이 이르고 퇴근이 늦으니 쌓이지 않으면 좋겠다 빌었다. 그리고 그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자 저도 따라 멈췄다.
그의 진밤색 머리카락이 까맣게 보이는 날이었다. 하지만 조명 덕에 그의 머리카락에 감도는 붉은 기는 여전히 빛을 따라 맺혀 있었고, 베이지색 코트 위로 보이는 체구가 크고 단단해 보였다. 코트 깃 위로 느긋하게 기울어진 눈매가 옅은 웃음기를 띠고 있다. 종종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하지 못해 조마조마한 순간이 있다. 지금처럼. 언제나 항상 큰 파문을 물고 오는 것은 아니나 그 파문의 크기를 짐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가히 괄목할 만한 공격수였다. 몇 걸음 앞서 있던 그는 다시 제 쪽으로 다가왔다. 두어 걸음 앞에 선 그에게서는 상쾌한 모히또의 향기가 났다. 겨울에 쓰기에는 춥다고 느껴질 시원하고 덧없는 향기였다.
그는 잠시간 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우리 집. … 가볼래요?”
…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와 저 사이에는 그 어떤 화학반응도 없다. 그저 그는 요령 없지만 의외로 사고를 잘 저지르는 저를 좋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고, 저는 이 사람을 이용해 회사를 성공시킬 생각밖에 없다. 아마 이 사람이 가진 모든 종류의 호기심은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사람만 보다가 간만에 만난 풋내기를 보고 즐거워하는 고양이의 마음과 다를 바 없겠지. 그렇기에 내보여진 호의이다. 그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가본 적 없다는, 그리하여 제게 주어질 리 없는 찬스가 지금 발밑에 뚝 떨어졌다. 비기너스 럭키처럼.
그는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도 생색도 않은 채로, 그날처럼 한쪽으로 얼굴을 기울인 채, 제가 명확히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느긋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저는 이 사람의 속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한 건지, 이러다 덜컥 승낙하면 도망갈 생각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도시의 혼잡함과 와글거리는 소음 속에서 그 하나만이 고요함을 꼭 독점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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