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민폐혜리]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

2020. 05. 24


 노을이 부서져 구름과 구름 사이의 빈틈을 메우듯 쏟아졌다. 창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열린 틈새로 들어온 노을은 커튼도 무시하고 교실을 채웠다. 얇은 커튼도, 나무로 된 바닥도 온통 노을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교실은 조용하고 또 시끄러웠다. 남은 사람은 오직 나와 그 애뿐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남기고 간 허물에서는 북적이는 소리가 났다. 남은 흔적만 봐도 애들이 얼마나 급하게 뛰쳐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저녁에 돈까스 나온다고 했는데. 그게 이유였겠지.

 종이 치고 바로 교실 문을 호쾌하게 열어젖힌 수연이 잊지 않고 내게 밥 안 먹을 거냐고 물어봐 준 것도 고마울 정도로 다들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수연의 질문에 나는 크게 아니, 라고 외쳤다. 고개를 저을 수도 있었겠지만 수연은 뒤돌아볼 여유도 없는 듯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그녀는 쏜살같이 뛰어나갔으니. 아마 지금쯤 오늘의 첫 번째 돈까스는 수연의 식판에 올라가 위장으로 향하는 롤러코스터를 탔을 것이다. 수연을 필두로 아이들은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가고 나와 민폐만이 콱 박혀 자리를 지켰다.

 민폐는 책상에 고개를 박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종이 울리기 직전 몸에 밴 오래된 습관을 따라 흘끔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한창이었다. 저녁 시간의 소란스러움에 절로 눈을 뜰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옅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틀어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정수리가 보였다. 열린 창문으로 넘어 들어온 노을이 그를 어루만지자 곧 검은 머리칼 위로 저녁의 재가 부스스 내려앉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재를 털어내듯 그 새까만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쓸었다. 부드럽지도 까끌하지도 않은 오묘한 감각이 손바닥을 핥았다. 민폐는 깨어나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의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거기에 따라 숨을 토하고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제 일어날까. 슬슬 깨울까 싶다가도 그 눈 아래 짙게 자리하고 있을 다크서클을 생각하면 안쓰러워 내버려 두게 되는 것이다. 수면 부족 때문이 아니라 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 그냥. 사실 좋아하는, 남자 친구의 잠을 방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 것이다. 적절한 이유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그냥 잠든 이 애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중증이구나. 양혜리.
 그게 뭐.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부정할 리가 없고 또 부정할 수조차 없는 사실이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 겨울, 옅은 갈색의 쌉쌀하고 달콤한 액체에 마음을 녹여 건네기 전부터 틀림없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이상한 화제로 불이 붙어 논쟁했을 때는 뭐 이런 애랑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거냐고 집에 가는 길 내내 기분이 상해 있었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게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 이상한 애랑 같은 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다 무너지는 줄 알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또 한 시간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같은 공간에서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와 그 애는 어쩌다가 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친해지고 만 그냥 같은 반 친구였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의 곁에는 내가 항상 있기를 바랐고 결국에는 도박과도 같은 선택을 했다. 도박은 성공했고 나는 잠자는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어 정리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겨우 손을 떼어 냈다. 민폐는 아직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의자가 바닥을 긁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다. 그의 온몸이 나의 눈 아래 있었다. 지갑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 멀리서 웅성거림이 거센 물살을 타고 몰려들어 몸을 적셨다.




 오늘 매점은 유난히 한적했다. 하긴 저녁 메뉴가 메뉴인데 누가 급식 안 먹고 여기 오겠어. 나는 또 커피 두 캔을 샀다. 익숙한 파란색 캔에 담긴 익숙한 상표의 것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설 학교답게 계단에서는 불쾌한, 삐걱거리는 소음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고 복도는 잘 닦인 채로 아직 남아 반질거렸다. 복도 한 켠의 창문은 닫혀 있었으나 그게 무색하게도 노을은 투명한 유리에 장난스럽게 주황빛 물감을 쏟아붓고 깔깔댔다. 지금 이곳을 이루는 대부분이 어떤 날을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굳게 닫힌 창문과, 내 마음 정도였다. 따져 보면 마음도 비슷했다. 좋아한다는 감정 앞에 ‘너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전부였다. 문을 여는 손은 그날과 다르게 떨리지 않았다.

 “어, 일어났네?”

 문이 열리고 나는 깨어 있는 민폐를 본다.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흘러넘치는 노을에 흠뻑 젖어 가는 나의 소년이 끄덕인다. 아직 완전히 깬 건 아닌지 조금 몽롱해 보인다. 그게 또 귀엽다. 우리를 위해 샀던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네 거야, 라는 뜻으로 툭툭 몇 번 더 바닥에 내리찧었다. 나무와 알루미늄 캔이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나 언제부터 잤냐.”
 “몰라. 종 치기 전부터 아주 그냥 너희 집처럼 자고 있던데?”

 아씨,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캔을 따는 소리가 났다. 나도 자리에 앉아 그를 마주 보고 캔을 열어 한 입 마셨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갈색 액체는 변함없이 텁텁하게 쓰고 달아 입안에서 질척거렸다. 식사 전에 마시기에는 최악의 음료였다.

 “황민폐.”
 “뭐.”

 민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검고 깊고 날카롭고 아주 가끔은 끝도 없이 다정한 눈이 거기에 있다. 눈의 주인은 커피를 목구멍에 들이붓더니 기어이 다 마신 듯 캔을 내려놓는다. 저녁 먹을 생각이 아예 없나? 그런데 나는 그 모습까지,

 “네가 너무 좋아.”

 생각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감정을 떼어 내고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언어를 입혀 말로 형태를 바꾼다. 언젠가 절대 털어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나의 비밀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학교를 떠돌다가 끝내는 그와 나 사이를 맴돈다.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노을은 그를 전부 먹어 치워도 배가 고픈지 내 손까지 적셔왔다. 우리는 모두 저물어가는 태양의 그림자에 먹혀 붉은빛을 토해냈다.

 “나도.”

 그 말과 함께 민폐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도 홀린 듯이 몸을 일으킨다. 우리가 발을 옮길 때마다 뒤로 노을색 액체가 뚝뚝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복도의 등은 꺼져 있었으나 타고 남은 태양의 재가 길을 밝혔다. 재와 바닥을 양분과 토양 삼아 긴 그림자 두 개가 피어올랐다. 그들의 몸은 두 개였으나 영혼은 하나였다. 보이는 세계에 속한 두 사람의 그림자는 곧 섞여 하나가 되어 긴 복도를 가득 채우고 보이지 않는 세계 속 우리의 마음 역시 녹아 오롯이 한 개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를 잡는다. 바닥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잡아끌고 실체를 갖는 두 주인도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 복도만이 변함없이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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