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셀린] 당신의 하트는 무슨 색?
클레리아 테밀론만 모르는 사랑의 시작 / 2020. 05. 07
슈가슈가룬AU
인간 테오도르 X 마녀 클레리아
“클레리아.”
교실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수많은 웅얼거림 사이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 하나만이 선명했다. 고개를 들면 그것의 주인은 이미 눈앞에 와있었다. 어딘가 세 번째 계절을 닮은 소년. 나는 그를 안다. 반장이다. 내가 전학이라는 형태를 빌려 이 학교에 다니게 된 지도 어느새 3개월이 지났으므로 그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방해해서 미안. 담임 선생님께서, 잠깐 교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반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멋쩍게 웃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시계를 흘긋 본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치기까지는 5, 6분 정도 남아 있었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축구부 주장의 하트를 점검하러 가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던 날 희미한 분홍색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니 운이 좋다면 전부 분홍빛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간계에 내려오고 나서는 거의 보지 못한 색이었다. 어쩌면 바로 오늘이 그 드문 하트를 손에 넣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담임과의 면담으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가야 했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말 전해줘서 고마워, 반장. 지금 바로 갈게.”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교실 문으로 향한다. 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교실은 워낙 시끄러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 문을 닫는다. 문은 닫혔어야 했다. 그러나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하얀 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와 문을 열어젖혔다.
“그, 나도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같이 가도 돼?”
그는 화사하게 웃었다. 망설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기에는 오히려 지금이 적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말을 끝내 골라내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가까이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었다. 우리는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는 햇살에 녹아 아주 얇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처럼. 흘끔 본 창문에 우리가 엷게 비쳐 보였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한 겹 더 얹고 있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오묘한 웃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야 할 침묵에, 목이 모래로 메워진 듯 묘하게 답답했다.
나는 이 애가 불편하다. 이 애라는 말에는 반장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도 이유 없이 건네는 호의도 불편했다. 처음 전학 왔을 즈음에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리 여겼을 것이다. 이름조차 생소할 정도로 멀리서 온 전학생에게 과할 정도로 이것저것 챙겨주는 소년은, 막 마계에서 인간계로 내려와 이제 겨우 한 사람 몫을 할 자격을 얻은 마녀에게는 한 입 베어 물면 혀가 녹아버릴 정도로 달콤한 애플 시나몬 타르트처럼 감미로워 보였다.
그의 앞에 누가 서 있든 그 선량하고 나긋나긋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말로 그 애는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그래서 그 애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결정인 하트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특정한 상대에게 바치는 감정의 결정체. 만약 그 감정의 끝에 누군가가 없다면 하트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나 같은 어린 마녀조차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사실 그 애의 하트는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슨 색을 띠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버리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 같았다. 반장, 테오도르 라미레스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의 증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 외에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한 번 정한 상대로부터는 반드시 하트를 빼앗아왔다. 그만이 예외였다.
“그럼, 반장. 나중에 보자.”
영원히 문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길게 뻗어 있던 복도도 겨우 끝이 났다. 오늘따라 교무실의 건조하고 투박한 목제 문이 반가웠다.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지만 문이 열리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사랑스럽게 들렸다. 그만큼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반장을 뒤로하고 익숙한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굳이 반장까지 시켜 나를 부르셨던 담임 선생님께서는 거기 없었다. 완전한 헛걸음이었다. 그래, 점심시간에는 교무실에 오지 말자. 죄송해요, 선생님. 그렇지만 마녀의 본분은 하트를 빼앗는 일이라서요. 마음속으로 작은 사과를 남기고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다시 열었다. 복도 어딘가의 창문이 닫혀 있지 않았는지 엷게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복도는 유난히 고요했다. 종이 칠 때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교무실에 올 때와 달리 지금은 혼자였으므로 기분 좋게 정적이 몸을 감쌌다.
“클레리아. 빨리 끝났네? 별말씀 없으셨어?”
“…선생님께서 지금 안 계셔서. 나중에 다시 올까 싶어.”
아주 짧게 숨이 멎었다. 적막은 처음부터 없던 존재처럼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의 목소리가 공간을 압도한다. 반장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 낡은 문에서 떠난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묘한 상황이었다.
그는 여기에 없어야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교무실에 왔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자리를 비워 내가 먼저 나오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설령 그의 용건이 빨리 끝났다고 해도 그가 나를 기다려 줄 이유는 없었다. 아니다. 있다. 그는 누구에게나 상냥한 사람이었으므로 같이 온 반 친구를 두고 돌아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3개월 남짓 곁눈질로 지켜본 테오도르 라미레스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세상을 이루는 구성 요소의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 단 한 사람을 향한 감정을 양분으로 삼아 살아가는 마녀와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더더욱 그가 불편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을 그렇게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어. 마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그 다정함을 쏟았다면 그에게도 뺏어 올 하트가 있다는 뜻이었을 테니 이렇게까지 그를 꺼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모두를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하트가 생길 리 없었다. 내가 그에게 품은 이 묘한 감정은 마녀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기, 반장.”
“응?”
“반장은, 어떤 선생님 뵈러 온 거야?”
“…”
침묵이 돌아와 그와 나의 간극을 채웠다. 그는 입을 꾹 닫았다. 그래. 대답하기 싫을 수도 있지. 언뜻 시야에 차는 테오도르의 옆얼굴이 마계의 하늘을 닮은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가만히 그를 올려다본다. 착각이, 아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얼굴 위로 두른 표정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늘 보여주는 안정되고 차분한, 때로는 조금 상기된 미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 너도, 너 역시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다음으로는 그늘진 염원이 흐느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욕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당황을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그 낯빛을, 나만 알고 싶다는 기이한 독점욕. 마녀들은 욕심이 많았다. 어쩌면 지금은 그에게도 하트가 생겨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다른 감정을 제쳤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엿보기 안경을 만든다.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뚜렷한 분홍.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수줍음의 하트. 지금까지 본 결정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엿보기 안경이 고장 나기도 하나? 아니다. 그런 사례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다. 마법이니까. 마법은 고장 나지 않는다. 천천히 손을 거둔다. 테오도르의 얼굴은 여전하다. 하트를 가져와야, 하는데. 손 끝이 낯설게 저릿했다. 주문을 외우면 저 애가 품은 마음은 내 것이 된다. 그는 누구에게나 항상 다정했으므로 하트를 뺏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하트를 가져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르다거나 그 마음을 잃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다. 테오도르의 마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갖고 싶었다. 그저 지금이 아니었다. 선명한 분홍이 좀 더 짙어져 진홍색이 되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어질 때. 진실한 사랑을 나타낼 때. 그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하트를 거둘 거야. 단지 이 순간이 적기가 아니었으므로.
“…테오도르. 괜찮다면 오늘, 카페테리아에서 같이 점심 먹을래?”
“그래도 돼? 나는 당연히 좋지만, 클레리아는 점심시간마다 바쁘잖아.”
“테오도르에게는 전학 온 뒤로 계속 도움만 받았는 걸. 내가 살게.”
“그럼, 기꺼이.”
테오도르의 마지막 말 뒤로 작게 미소가 묻어나오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초콜릿이 녹아 있는 듯한 두 눈이 나를 향해 있다. 그를 따라 웃는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먹으면 웃음이 나오도록 주문이 걸려 있는 마계의 사탕처럼, 테오도르의 환한 표정을 보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을 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테오가 불편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멀리서 쳤다. 다른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는 우리에게로 왔다. 테오도 나도 웃음을 내려놓지 않고 발만을 빠르게 움직여 교실로 향했다. 창문에 설핏 비친 내 얼굴은 마치 마계의 하늘로 세수를 한 것처럼 온통 분홍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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