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테오셀린] 사춘기의 부재

2020. 04. 11

기억의 조각 by 匿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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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C 타이만 시나리오 유리행성 2부작 <이데아의 유리행성> , <므네모시네 강변의 붉은 꽃>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탐사 예정이 있으시다면 열람을 가급적 피해주세요. 

  • <므네모시네 강변의 붉은 꽃> 특정 엔딩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끝났다. 너무 길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우라노스 교단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결코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죽고 가이아께서 사랑하는 대지가 면적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탔다. 그럼에도 피해가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은 모이라의… 폰토스의 가호를 받는 수호자들 덕택이리라. 불에 젖은 토양을 양분 삼아 새로운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죽은 땅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자가 누구인지도,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아니 전쟁이 끝났기에 세상은 시끄러웠다. 모두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22세기 마지막 수호자. 식물을 다루는 모이라의 대리자. 세계가 의지를 갖고 내게 그의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돌리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네가 유리행성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라고, 잊지 말라고. 주위의 모든 것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그를 잊은 적이 없다. 잊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그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 그게 더는 수호자가 아닌 클레리아 테밀론의 전부였다. 낮에는 언젠가 그가 알려 줬던 방법을 흉내 내 꽃을 돌보거나 그가 자주 읽던 책을 따라 읽고, 해가 지고 별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가만히 누워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그러면 내가 보게 되는 것은 늘 그였다. 열 살, 열네 살. 열한 살, 열일곱, 열다섯…. 시간순서는 엉망이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꿈을 꿨다. 다정한 눈빛이, 상냥하게 신경 써서 고르는 말이, 겹쳐지는 손의 온도가 너무나도 잔인했다. 꿈인데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다. 그는 꿈에서조차 내가, 온 세계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년이었다. 어떤 꿈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 한 순간을 제외하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꿈에서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부터 잠에서 깨면 꿈이 보여준 추억이 그날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곤 했다.

 그리고 그 얄팍한 안심이 깨어지는 날이 마침내 왔다. 나는 늘 그랬듯이 꿈을 꿨다. 낯선 꿈이면서도 잊을 수 없는 과거였다. 테오는 열일곱이었다. 그는 열일곱의 나를 안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그의 등에 손을 둘렀다. 스물네 살이 되어버린 나는 모든 걸 안다. 서서히 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마지막 대화.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 최후의 순간. 열일곱 살의 클레리아는 웃었다. 자연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테오도르가 기억하는 마지막 셀린이 우는 모습인 건 싫었다. 눈물을 보이기 싫은 게 아니다. 분명 내가 울었다면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다정한, 타인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그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테오도르 라미레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테오가 마지막 순간 어떤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는지 확인조차 못 하고 꿈은 그대로 끝이 났다. 우습게도 그것이 아쉬웠다.

 눈을 떠 바라본 현실 역시 꿈을 닮아 새벽이었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에 눈이 부셨다. 그를 닮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축축했다. 맺힌 지도 몰랐던 눈물이 그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게 끝이 났다. 그런 느낌이었다. 유리행성을 떠나고 7년 동안 매일 유리행성의, 그의 꿈을 꾸면서 어떤 순간을 봐도 울지 않았다. 아무리 애틋하거나 그리워도 꿈을 꾼 직후에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이 우리가 함께 보낸 7년을 흘려보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었다. 울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가장 눈을 돌리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을 보았기 때문인가. 나는 그 답을 안다. 애써 모른 척 해왔던 것이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려 천장을 본다. 천장에 자리하고 있는 건 독특한 형태의 달력이었다. 흩뿌려진 밤하늘을 닮은 아름다운 별무리 사이로 작은 새의 형태를 한 인공물이 한 자리에 멈춰 쉬고 있다. 새가 앉은 자리가 바로 오늘의 날짜였다.

 테오도르 라미레스가, 포르투나를 방문하는 날이다.

 몇 주 전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이었다. 긴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준 위대한 수호자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사람이 그였다. 제일 어리면서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세계의 사랑을 받는 청년. 바깥은 그 이야기로 부산스러웠다. 어디를 가든 그의 이름이 들렸다.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게는 그를 만날 자격도 없었다. 그는 신의 대리인이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그의 곁에는 분명 트라이던트가 있다. 트라이던트, 아니 폰토스께서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신은 잔인하다. 폰토스의 손길 한 번이면 테오가 정말로 나를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테오가 나를 잊는 건 두렵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한 번 각오했던 일이었다. 단지 테오가 빈 소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게 두려웠다. 두려웠는데, 그럼에도,

 그가 보고 싶었다.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말을 섞지 못해도, 눈을 마주치지 못해도, 테오가 내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해도 괜찮았다. 단지 보고 싶었다. 그를, 아주 멀리서라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마지막 기억을 새로 덧씌우고 싶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눈물을 닦았다. 거울에 비치는 눈 주변이 제법 붉었다. 드문 일이었다. 그 외에는 유리행성에서의 마지막 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열일곱의 클레리아와 스물넷의 클레리아가 보는 거울 속의 둥근 세상은 거울이 비출 수 없는, 방의 다른 방향에 테오도르가 있는지 없는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같아 보였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짐을 챙기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로브를 걸치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스물 넷의 테오도르. 7년의 간극을 넘어 그를 보러 가는 것이다. 자신이 아주 조그맣게 느껴졌다. 만나러 가지 않겠노라고 수십 번 되새겼으면서도 날이 밝자 이렇게 준비하고 있다니. 하지만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놓칠 수는, 없었다. 놓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집을 나서기 전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수호자 의식에 쓰기 위해 마련했던 므네모시네 강물이 담긴 병이었다. 신비한 힘을 품은 강물은 작은 병 속에서도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강에서 빌려온 지도 몇 년이 지나 양이 제법 줄어 있었지만 한 시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기에는 충분했다. 언제라도 마실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그것을 목걸이에 달았다. 작은 유리병은 오래전 그가 줬던 펜던트와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습관처럼 들여다본 팬던트 속의 작은 세계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포르투나 중심부는 그 어떤 날보다 복잡했다. 포르투나의 모든 인간이 전부 모인 것만 같았다. 그게 불편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다면 폰토스도, 테오도, 나를 쉽게 발견하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시간이 조금 비어 있었다. 광장이나 역 주변의 카페는 이미 그를 보러 온 사람으로 만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커피를 하나 사서 밖에서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에 나온 수도에는 생기가 돌았다. 사람과 섞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외진 곳으로 향했다. 날이 포근했다. 어딜 가나 떨어진 꽃들이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온연한 봄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도 이런 봄이었지. 시작도 끝도 결국은 봄이구나. 그런 안일하고 감상적인 감상에 젖은 채 걸으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맛이 제법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한 번 더 들려 원두를 좀 사 가야지.

 「수호자, 포르투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이었다. 무언가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서 나는 소리였는데도 똑똑히 들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유리행성에서 수호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을 때 알게 된 사실이다. 소리를 증폭하는 능력을 가진 수호자가 있다고 했다. 그래. 포르투나에, 테오가 온 것이다. 로브를 고쳐 쓰고 잠시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므네모시네 강물을 담은 병을 꺼내 강물을 입에 머금고 삼켰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이제 이 순간은 영원하다. 클레리아 테밀론은, 오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시야가 하얬다. 병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바닥에 떨어진 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7년 만에 테오를 보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아간다. 세계의 수호자를 향하여.

 중앙 광장은 이미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로브를 벗어도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벗지 않았다. 두려웠다. 누군가가 또 능력을 썼는지 수호자가 있는 공간만 빛이 났다. 다른 사람은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곳을 본다. 테오가, 있다. 테오도르 라미레스가 있다. 스물네 살의 그가 있다. 키가 조금 더 큰 걸까. 이 거리에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바람이 불자 그의, 어딘가 추수가 끝난 가을 밀밭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고동색으로 빛나는 두 개의 눈은 여전히 찬란했다. 선(善)라는 개념이 어떠한 식으로든 형체를 가지게 되면 분명 저런 것이겠지. 테오도르는 변한 것이 없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다는 감상은 있었다. 그래도 테오는 테오였다. 그는 7년 전과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웃고 있다. 따뜻하고 상냥하고 선한, 좋음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수식어를 가져와도 단어가 모자랄 정도로 완벽하게 좋은 사람. 그게 내가 아는 테오였고 그는 정말로 변함이 없었다. 그 변하지 않음을 사랑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내가 아는 그가 아니게 되었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얼마나 테오를 지켜봤을까. 시간의 흐름조차 그의 빛 탓에 왜곡되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수십 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자칫 지루할지도 모르는 수십 분에 달하는 연설이었는지 그것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일그러진 세계 속에서 그의 모습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눈을 비벼도, 깜빡여도 테오만이 빛났다. 우습게도 그제서야 자리를 뜰 결심이 섰다. 깊은 바다에서 느릿느릿 헤엄치는 심해어처럼 파도와 같이 끝없이 밀려오는 인파를 헤치고 천천히 광장에서 벗어난다. 두고 온 자리에서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화와 화합을, 모이라의 뜻을 읊는 다정한 것. 뒤통수가 스며드는 빛 때문에 따끔거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손에는 아까 들렸던 카페의 원두가 예쁜 종이봉투에 담겨 쥐어져 있었다. 가게 점원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번화한 수도에서 이 외진 레테 강변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갔을 텐데 모든 순간이 희미하다. 므네모시네 강물을 마셨기에 그때 겪은 것을, 품어버린 감정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오직 테오도르의 모습뿐이다.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까지 더 짙게 떠올라 나의 공백을 천천히 메워 나간다.

 봄바람이 불자 그것을 따라 이름 모를 꽃잎이 흩날리며 그의 주변을 감쌌다. 은은한 빛에 꽃잎이 섞여 들어간다. 성스러운 풍경이었다. 주변의 모든 이가 경외를 담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를 온전히 숭배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품은 감정은 숭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를 보는 나의 시선에 담긴 것은…. 굳이 어떠한 단어로 바꿔 말을 통해 표현하지 않아도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안다. 므네모시네 강물을 마시고 겪은 일이라서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것이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클레리아 테밀론은 테오도르 라미레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결이 다 보일 만큼 투명하고 예쁜 수정과도 같은 연심이 아니라 늪을 닮아 아주 질척하고 깊은, 한 번 빠지면 돌이킬 수 없어지는 짙고 음습한 것. 그것이 나의 사랑이었다.

 언제부터 그를 마음에 품었나. 그 질문에는 의미가 없다. 너무 오래되었다. 처음 본 자신에게 살갑게 대해 줬을 때부터? 그가 알세이스에서 가져온 호두나무 씨앗을 두고 어떠한 약속을 나눴을 때부터? 아니면 그에게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토해냈을 때 무모하게도 안아도 되냐고 묻던 그를 끝내 밀어내지 못했을 때부터? 묻어 두었던 사실을 마음속 바닥 저편 유리행성에서 파낸다. 그래. 테오도르는…. 언제나 그 존재만으로도 내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그간 외면해온 것들이 므네모시네 강물을 타고 올라와 목 깊은 곳을 헤집는다. 속이 메스껍다. 가까스로 밖으로 기어 나온다. 기다시피가 아니라 정말로 기어 나왔다. 강물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중심축을 잃은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뿐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반겨준다. 낯선 레테 강변의 모습이다. 늘 서서 바라보던 풍경을 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서면 레테 강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잠시, 곧바로 속을 게워낸다. 불가항력이었다. 역겨운 소리가 퍼져 나간다. 멀건 액체만이 새어 나와 이 땅에 흔적을 남겼다.

 끝도 없이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아 보였던 액체가 멎었다. 속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한결 나았다. 고개를 들어 레테 강을 보았다. 에메랄드를 녹여낸 듯 반짝이는, 마치 이곳에 매여 있는 것처럼 잠잠한 수면. 그 수면에 입을 대고 한 입 마시면 지난 하루를 잊고 두 입 마시면 지난달을 잊고 세 입 마시면 지난해를 잊게 된다. 강물을 몸에 더 들이면 겪어온 과거를 전부 잊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강변에 다가가 몸을 숙여 녹은 보석을 두 손으로 떠올린다. 서늘한 감각이 몸의 말단부를 통해 전해져 온다. 손안에 가둬진 그것은 투명하기만 했다.

 이 정도 양이면 몇 모금일까. 어디까지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이 물을 마시면 유리행성에 오른 적이 없는 클레리아 테밀론이 될 수 있어? 순간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진다.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외면하려 했던 사고의 끝이었다. 지쳤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도 신물이 났다. 7년이다. 일부러 틀리게 셈을 해봐도 2500일이 넘었다. 더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의 꿈을 하루도 빠짐없이 꾸며 살아가는 건 지옥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꿈은 변함이 없었다. 좋다는 약을 종류대로 찾아 꾸역꾸역 입속에 털어 넣고 눈을 감아도 꿈속의 나는 항상 유리행성 속 수호자였고 옆에는 늘 테오가 있었다. 벗어날 수 없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테오는 끔찍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영영 나를 향할 일이 없을 테오의 모든 조각이, 비수가 되어 사정없이 나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열일곱 살도 열 살도 아닌 스물넷의 테오도르를 보기 전까지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게 방아쇠였다. 절대 잊고 싶지 않아 므네모시네 강물까지 마시면서 먼발치에서나마 눈에 담은 그가, 내 세계의 기폭제가 되었다.

 손안에서 침묵의 강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랑대지도 않고 밖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고 아주 참을성 있게. 그 소량의 강물 너머로 어머님이 비쳐 보였다. 세기의 천재였으나 레테 강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이곳을 떠나지 않으셨던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 학문과 이 강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분은 네레이스의 이방인과 사랑에 빠져 버렸다. 나는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서거하신 뒤 살아있는 두 딸을 두고도 레테 강물을 마셔 아버님을 잊어버리는 길을 택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는 것만은 안다.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어머님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너희는 누구냐고 묻던, 서늘하고 낯선 음성. 그토록 애정을 담아 돌보던 레테 강변도 발표 직전의 논문도 사랑한다고 매일 밤 안아주었던 두 딸도, 어머님은 전부 내버려 두고 이곳을 떠났다.

 눈을 감았다 뜬다. 여전히 강물은 내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강에 비치는 인영이 나였음을 알았다. 어머님의 선택이 왜 그것이어야만 했는지 늘 상상 속에서 묻곤 했다. 답은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셨으리라. 모전여전이라고 했던가. 여기는 오래전 어머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의 출발점이다.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얼마나 마셔야 할까. 성급하게 적은 양을 삼켰다가 유리행성의 기억이 애매하게 남는 건 싫었다. 만약 14년 전 그날에서 끊기기라도 한다면.

 14년 전 그날.

 거침없이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싹을 틔우던 생각의 성장은 네레이스의 이름 모를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눈을 감아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고 마는 아주 오래된 노을색 기억이다. 그러나 전혀 퇴색되지도 왜곡되지도 않고 마주했던 순간 그대로 깜빡거리며 은은한 빛을 토해내고 있다. 지나치게 선명한, 잊히지 않고 잊을 수도 없는 기억의 조각. 므네모시네 강물을 삼킨 두 사람의 맹세. 나를 안아오는 작은 손. 맞닿은 두 개의 몸에서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게 들려 오는 삶의 소리. 시야를 가리는 눈물 너머로도 확실하게 보이는 테오도르의 모습. 나의 빛. 나의 태양. 겹쳐지는 손. 여전히 선명한 과거의 편린.

 새삼스레 두려움이 몸을 채운다. 레테와 므네모시네.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거대한 해일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레테의 권능 아래에서도 므네모시네가 감싸고 있는 기억은 파편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개의 기억이 살아남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두 기억 사이 비어 있는 십수년을 곱씹으면서 나는 테오도르라는 이름의 낯선 사내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망가질 수 없도록 므네모시네의 힘까지 빌려 결계 속에 숨겨 둔 과거가 결국 나를 그 속에 가뒀다. 어차피 잊지 못할 것이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레테 강물을 마셔서 내가 누구였고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클레리아 테밀론의 도서관에서 몰아내도 테오도르만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뭘 선택할 것 같냐고 묻던, 어린 테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테오, 테오는 지금의 내가 뭘 고를 것 같아? 테오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품고 있던 강물을 돌려보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강물이 미지근했다. 테오. 잠깐이라도 너를, 테오를, 잊으려고 해서 미안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테오도르를 잊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이 세상이 지옥을 닮았다고 해도 어딘가에는 네가 있어. 그거 하나만으로 나는, 이제는 됐어. 닿을 수 없는 사과였다. 어떤 방법을 써도 잊을 수 없다면 끊임없이 모든 순간을 반추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었고 동시에 어떠한 속죄이자 참회였고 끝내는 내 사랑의 증명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어머님과 아버님과 언니를 모두 떠나보낸 곳. 이곳에 죽을 때까지 머물러도 나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이 작은 강가에 고여 있을 것이다. 고인 것은 마르고 썩는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고요한 강물에 제 몸을 스스로 적시게 될 날이 올까 두렵다. 에메랄드를 녹여 만든 강물에 몸을 담가 그 투명함에 흠뻑 빠져 감히 강물의 일부를 빼앗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 될 날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언젠가 틀림없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물을 마셔버린 나는 그 분노도 잊을 것이다. 두 가지 기억만을 결계로 감싸고 그 외의 오래된 과거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녹여버릴 터였다. 그러니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뒤를 돌아본다. 망령과도 같은 저택이 있다. 천천히 손을 뻗는다. 애써 의식하거나 힘을 불어넣지 않아도 얇고 서서히 투명한 막이 나타나 곧 저택을 완전하게 품어낸다. 먼 훗날 이곳을 찾을 타인과 나를 위해 아트로포스에서 그랬듯이 결계를 쳤다. 저택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했다. 14년이라는 시간의 실을 엮어 만든 작품이었다. 유리행성에 오르기 전 마무리하지 못한 유년기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사춘기를 뛰어넘어 유년기만 거쳐 나는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 성인식이었다.

 “갈 시간이야.”

 바깥 세계에 울리는 목소리가 생경했다. 내가 읊는 것이 분명한 단어의 조합조차 막연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내 것이었다. 그래,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어디로 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핑계로 포르투나 밖으로는 오랫동안 나가지 않았었으나 이제는 그것도 쓸모를 다했다. 네레이스도 알세이스도 좋았지만 두 번째 선택지에 더 마음이 갔다. 테오의 고향. 테오가 사랑하던 곳.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알세이스에 가볼 이유는 넘쳤다.

 알세이스로 떠나기 전에 포르투나에서 들릴 곳이 있었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므네모시네 강이 나의 목적지였다. 갖고 있던 기억의 강물도 이제는 끝이 났으니 부족한 양을 채워야 했다. 테오가 지키고자 한, 그가 사랑했던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처럼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다시 7년 뒤가 된다고 해도 좋았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므네모시네 강물은 온전히 그때만을 위한 것이었다. 신께서 내 존재의 흔적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억을 잊게 만들어도 남아 있을, 세 번째 기억을 위함이었다. 레테 강을 떠나면서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택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므네모시네 강가는 계절에 맞지 않게 서늘했고 짙은 안개가 새벽처럼 산발적으로 흩어져 땅 위를 떠다녔다. 7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풍경에 향수와도 같은 감정이 몰려들었다. 어딘가를 향해 분명하게 흘러가고 있는 강물 주변으로 붉은 꽃이 듬성듬성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겨울이라고 착각할 법한 몸을 얼리는 차가운 공기에도 대지는 온기를 잃지 않았는지 몇몇 개체는 이미 꽃을 활짝 피웠다. 지상의 식물이 아닌 듯 아름다운 붉은 꽃. 그 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손을 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난 일을 새삼스럽게 곱씹어 볼 뿐이었다.

 꿈을 꾸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유리행성 아트로포스에서의 마지막 날. 멀리서 해가 찬찬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테오도르. 나의, 클레리아 테밀론의 기억을 잃지 않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속삭이는 테오. 말라가다가 곧 흩어지는 꽃잎들. 테오는 후회하지 않아? 신께서, 뭐든지 이뤄주겠다고 하신 건데. 세계 평화라던지, 영생이라던지,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던지…. 그런 걸 빌 수도 있었을 거 아냐. 아주 오래전에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곳에는 없는 테오를 향해 털어놓는다. 이 므네모시네 강가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다. 나와, 내가 놓지 못한, 앞으로도 절대 놓을 수 없을 열일곱 살의 테오 뿐이다. 몸을 숙여 기억의 강물을 퍼 올린다. 작은 병 속에서도 강물은 빛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반짝이며 흔들렸다.

 어디선가 마른 풀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희미하고 얇게 이어지던 소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밤새 쌓인 눈을 밟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 누군가가 강을 향해 똑바로 오고 있었다. 시기를 잘못 잡으신 건 아닐까. 아직 꽃이 전부 만개하지도 않았는데. 므네모시네 강의 붉은 꽃은 무척 아름다워 만개하는 계절이 되면 관광객들이 모여들곤 했다. 저 소리의 주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소리가 멎었다. 이제는 정말로 갈 시간이었다. 나는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내 세계도 멎었다.

 등 뒤에는 소리의 주인이 와 있었다.

 테오였다.
 세계의 수호자였다.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 없는 온전한, 테오도르 라미레스였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유리행성을 떠난 뒤의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테오의 꿈을 꾸었으니까. 그러나 곧바로 눈앞의 그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꿈은 내가 지나온 궤적만을 보여줬으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포르투나 광장에서 보았던 스물 넷의 테오였으므로. 7년 동안 키가 더 컸구나.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멀리서 지켜보았을 때는 가늠하기 힘들었던 그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테오의 주변에서는 변함없이 빛이 났다. 아까 그건 누군가의 능력이 아니었구나. 그냥 테오가, 테오도르가 빛나고 있던 것뿐이었어. 다시는 나를 향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 단단하고 곧은 두 눈이 나를 비춘다.

 “테오.”
 “셀린….”

 테오도르 라미레스의 애칭을 입에 담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딘가 낯선 느낌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청년이 클레리아 테밀론의 애칭을 부른다. 마찬가지로 생소했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온전히 어색함이 될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고 마는 어색함과 달리 지금 이 감정은 마음속 깊은 곳을 아릿하게 찌르는 것이다. 당혹감과 낯설음과 반가움과 애정이 엉망으로 섞인 묘한 느낌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본다. 테오를 스치고 내게 닿는 바람에서 양지의 향이 났다.

 “보고 싶었어.”

 므네모시네 강변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로, 하나의 말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같은 대사를 읊었다. 같은 마음으로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테오는 어느새 숨결이 얽히는 거리에 와있었다. 더운 숨이다. 나는 손을 뻗는다. 곧 손끝이 닿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테오의 손을, 감싼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것보다 컸다. 곧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힌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하나의 생각을 했다. 닿아 있는 손가락이 너나 할 것 없이 뜨거웠다. 빛바랜 추억을 떠올린다.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했던 열일곱의 셀린.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춘기라고 부를 것이다. 자각도 없이 나의 사춘기는 끝이 났다. 더는 부끄럽지 않았다. 얽힌 손을 살살 풀고 대신 테오의 두 뺨에 가져다 댄다. 가볍게 발끝을 들어 올리고 입을 맞춘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세 번째부터는 굳이 세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계속 함께일 테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테오도르 라미레스도 클레리아 테밀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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