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사키네코] 어머니와 딸

2020. 03. 08

기억의 조각 by 匿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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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C 타이만 시나리오 <Golden Ocean>의 엔딩 및 과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레이 예정이 있으시다면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  트위터 해쉬태그 #트친이_주는_첫문장으로_글쓰기로 쓴 글입니다. 
     @cokakain_0708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멸망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걸 받아들인 날은 언제였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멸망이 아니다. 멸망이란 무언가가 망하고 없어지는 것이니까. 다가오던 별의 종말은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다. 세계는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생존자들은 무리를 지어 사회를 이뤘고 다시 국가를 세웠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산 자는 살아야지! 멸망은 끝이다! 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러나 나의 멸망은 지금부터였다. 숨을 뱉는다. 날이 추웠다. 내뱉은 숨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흔적을 남긴다. 곧 눈이 내릴 것처럼 시리다.
 “미우라 씨 따님, 들어오세요.”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병원에 다닌 지 제법 오래되었다. 하지만 ‘따님’이라는 호칭은 몇 번이고 들어도 낯설었다. 내 것이 아닌 호칭이었다. 그러나 간호사가 부르는 사람은 부정할 수 없는 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로 들어간다.
 간호사가 문을 닫자 공간은 적막으로 가득 찬다. 의사가 익숙하게 인사를 한다. 내게 등을 보이는 미우라가, 있다. 나의 어머니다. 의사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는데, 어머니를 여의게 되다니. 불쌍도 하지. 그런 눈빛이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나는 자리에 앉는다. 미우라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후지와라 씨.”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님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발견이 너무 늦었어요. 어느 정도의 연명 치료는 가능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본인께서도 거부하셨구요.”
 나는 연기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듬거리며 의사에게 거듭 묻는다. 며칠 전 이미 미우라의 입으로 들었던 내용이다. 이상하다. 그날 너무 많이 울어서 더는 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눈물이 맺힌다. 그렇지만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 둔다. 의사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 귀에 들어오는 건 미우라가 죽는다는 이야기뿐이다. 나의 구원, 나의 세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모든 것. 세계는 피를 나눈 가족도 모자라 나의 영혼마저 앗아가려 손을 뻗는다. 어떻게 진료실을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흐렸다. 그 애의 손을, 내내 잡고 있었다는 느낌만이 선명했다. 병원 입구를 나서자 비로소 주변이 보였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적었다.
 “미우라.”
 미우라는 말이 없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대화를 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 입술을 꾹 물었다. 피가 배어 나올 것만 같다. 이 정도는 아프지 않다. 미우라는 더 아플 테니까. 말로 하진 않지만 분명 그럴 텐데. 미우라는 강한 사람이다. 이렇게 긴 시간 알고 지냈는데도 여전히 강하고 단단하다. 나는 그 애가, 껍질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그 악몽 열차에서밖에 본 적이 없다. 그것마저 아주 조금이었고 그때조차 그 애는 너무나도 강했다.
 “주문을 외우자.”
 “무슨 말씀입니까. 후지와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을 건넨다. 미우라를 똑바로 바라본다. 언젠가 외웠던 주문이, 아직까지 살아 머리를 빙글빙글 맴돈다. 오래전 나를 부드럽게 잡던 손을 기억한다. 그것의 온도를, 냉각 장치와 캡슐을, 눈을 떴을 때부터 나를 기다리던 나의 죽음을 기억한다. 미우라의 생명력을 받아 살아 숨 쉬게 된 나를 기억한다. 내가 토해낸 나의 생명을 기억한다. 모든 것은 선명하다. 미우라의 손을 잡는다. 시간이 지나 조금 거칠어졌지만 여전히 작고 따뜻하다.
 “그러면 미우라는 살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나한테 목숨을 준 거, 후회하지 않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뱉으려고 한 모든 말은 그 애에게 막혀 사라진다. 미우라는 다정하고 단호하게 미소 짓는다. 아, 전부 그때와 똑같아. 주문을 외우길 거부하는 나를 향했던 것과 같은 얼굴이다. 잊혀지는 게 두렵다고 말하는 그 애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또 무력하다. 의식 없이 열차 바닥을 기던 나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살고 싶으면서 누군가를 이용하기 싫어 고개를 젓던 나도 있으며 마지막으로 결국 주문을 외우던 이기적인 내가 있다. 모든 게 그날과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게 있다면 지금 주문이 필요한 사람은 미우라이며, 그 애는 결코 주문을 외우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 후로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았다. 미우라가 택할 행동 정도는 나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우리의 관계 변화도 그랬다. 친구에서 자매로, 자매에서 이모와 조카로, 그리고 모녀로. 늙지 않는 내가 의심 받을까 봐 미우라는 제 나이에 맞춰 연기를 했다. 열아홉의 모습을 한 내가 서른 살이 되던 날 그 애가 제안한 연극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미우라를 미우라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언니가 시집을 조금 빨리 가서요, 라고 둘러대며 언니, 그다음은 이모, 그다음은 어머니. 미우라는 곧 내 할머니가 될 터였다. 그럼에도 미우라는 미우라였다. 마치 언젠가 당신은 후지와라 사키입니다, 라고 말해준 것처럼.
 “후지와라, 저는 당신을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
 “당신을 구할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뻤습니다. 그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영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는 거야. 영원히 곁에 있어 주지 않을 거잖아.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킨다. 순 억지다. 나이는 빠르게 들어가는데 왜 정신은 더 어려지는 느낌일까. 그러나 영원은 정말로, 온전히 나의 몫이다. 미우라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일 년 남짓. 나는 그러면 영원히, 너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너와 비슷한 사람을 찾으며. 끊임없이 기차를 닮은 세계를 헤매면서. 급기야 나는 울음을 터트린다. 오늘따라 미우라가, 싫다. 거짓말이다. 단 한 번도 싫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싫은 건 미우라의 죽음이지 미우라가 아니다.
 “울지 마십시오. 후지와라.”
 “어떻게, 어떻게 그래. 미우라가 죽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저는 죽지 않습니다. 당신이 기억해준다면, 저는 당신과 영원히 살아 있는 게 될 테니까요.”
 정말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나이가 들어도 미우라 네코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 강함과 다정함에 나는 그만 무너지고 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밖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어날 수가 없다. 혀 위의 말은 나오지 못하고 울음이 된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미우라가 아닌데 무슨 상관일까. 미우라는 천천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울지 마십시오.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그 애는 속살거린다. 그럴수록 내 세계는 무너져간다. 멸망이 일상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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