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려림] 신기루

2020. 03. 01

기억의 조각 by 匿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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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타이만 시나리오 <Golden Ocean>의 엔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레이 예정이 있으시다면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오늘도 세계는 변함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 사이로 금빛 모래 입자가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 이질적인 느낌만이 먼 옛날 이곳이 사막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나는 사막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왠지 익숙한 단어였다. 모래로 뒤덮인,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건조한 죽음의 땅. 그것이 사막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나는 그만 아주 분명하게 사막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 낯설고 익숙한 풍경 속에는 작열하는 태양이 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누군가가 내미는 서늘한 구원의 손도 있다. 기묘한 일이었다. 어쨌든 아름다운 우리의 별은 한때 사막으로 뒤덮였었고 죽음의 땅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내 먼 친척 어른께서는 운이 좋으셨었는지 무사히 살아남으셨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참 감사할 만한 일이다.
 눈을 깜빡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 늘 그러했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도 사막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 별의 대부분은 한때 사막이었으니. 나는 초원의 끝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 근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이방인은 매우 드문 존재였다. 그들은 신기루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사라지곤 했다. 마지막 이방인을 만난 것도 10여 년 전의 일이다. 올해 내가 열일곱이니 기억이 까마득할 법도 하다. 멀리서 학교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갔어야 하는 곳이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가지 않았다. 여기에 오고 싶었다. 내가 사는 구역의 끝. 낯선 이들은 늘 이 초원을 통해 우리 구역에 왔다.
 다시 눈을 감는다. 금빛 모래의 바다가 흩어진다. 사막이다. 나는 또 같은 환상을 본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이다. 타오르는 바다 너머로 기차가 보인다. 누군가가 손을 뻗는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눈을 떴기에 꿈은 항상 같은 부분에서 끝이 났다. 두려움 탓이었다. 알지 못하는 풍경들이, 멸망해가는 세계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이유였다.
 “저기….”
 낯선 목소리가 형체 없는 손으로 내 눈을 어루만졌다. 나는 눈을 떴다. 모르는 사람이다. 이방인이다. 초원의 시작점에 앉아 있던 내게 그가 말을 걸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옷에 묻은 풀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그의 옷에도 초원의 일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나는 고개를 든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스무 살을 겨우 넘겼을까 싶은,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을 견뎌온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였다.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나부낀다. 그게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우두커니 그를 본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기루를 닮았다. 눈을 깜빡이면 사라지는 사막의 꿈처럼 지금 내가 눈을 감았다가 뜨면 없어질 것만 같은 그런 것. 나는 감히 팔을 들어 올린다.
 “예림아.”
 들어 올린 팔을 뻗어 그를 잡기 직전이었다. 낯선 남자의 입에 내 이름이 오른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저를 아세요. 질문이 미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혀 끝을 맴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 그 울림이, 어조가, 지나치게 익숙해서 그만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나를 바라본다. 광활한 초원과 노란 프리지아가 섞인 눈동자 속에 내가 비친다. 그가 보고 있는 나를 본다. 내 청회색 머리칼도 그의 것처럼 너울거린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는다.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오롯한 충동이었고 자유 의지였고 또 욕망이었다. 그의 손이, 꿈에서 본 구원의 손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손가락을 얽었다.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따뜻한 손의 온도가 낯설었다. 그는 낯설지 않았다. 남자는 낯선 사람이 손을 잡자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안도했다. 우리는 손을 통해 열을 주고받았다. 손을 잡고 있는 동안 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그도 나를 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고 싶었어.”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분명히 들었다.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안도를 포함하여 수많은 감정이 녹아들어 있는 복합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나는 이 사람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안다. 예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지도 아닌, 아주 근본적인 무언가였다. 손가락 끝부터 저릿하게 차오르던 감정이 목을 메운다. 얽혔던 손을 천천히 풀어낸다.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기엔 한 손으로는 부족했으므로. 그의 손이, 이번에는 분명한 형체와 온도를 갖고 내 눈가를 쓸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그의 온도를 느꼈다. 눈을 감아도 사막의 환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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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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