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첫눈
발더스 게이트3 타브x칼라크 연인 드림
그냥 눈사람 만드는 칼라크가 보고 싶었을 뿐인 글
당연하게도! 가내타브(벨바스)x칼라크 연인 드림임
이전에 쓴 '새로운 삶' 이후 시점입니다
발더스 게이트3 본편이 무슨 계절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겨울은 아니었으니까… 그 이후 첫 겨울 시점
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본편 엔딩을 보고 오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쓰면서 들은 노래: The Oh Hellos - Christmas Time Is Here (Official Visualizer)
휴 겨우 크리스마스 끝나기 전에 마감했다!!
유난히 창밖이 고요하던 어느 날, 칼라크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눈을 번쩍 떴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캄캄한 방 안에서 칼라크는 잠시 잠든 아내의 얼굴을 구경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커튼을 걷었는데, 창밖의 풍경을 목도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우와악!!! 그 소리에 단잠에 빠져있던 벨바스가 단번에 몸을 일으켜 칼라크를 쳐다봤음에도 칼라크는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뭐, 무슨 일인데? 갑자기 왜 그래??"
"와아아악!!!"
"진정하고 대답을 좀… 아!"
칼라크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벨바스는 제 아내가 왜 저렇게 날뛰고 있는지를 단번에 이해했다. 도시를 덮은 하얀 융단 위로 커다란 함박눈이 몽실몽실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야!!!!"
"그러게. 그것도 엄청 많이 오고 있어."
"눈이라고!!!! 눈!!!! 맙소사, 내가 발더스 게이트에 내리는 눈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
칼라크는 창밖의 풍경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는가 하면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폴짝폴짝 튀어 올랐다. 그러다 무언가 허전하다 느꼈는지 갑자기 침대로 달려오더니, 그 위에 앉아 있던 벨바스를 안아 들고선 다시 창가로 우당탕 달려갔다. 칼라크는 나 지금 너무 신나!!! 소리치며 제 품의 벨바스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곧 그를 꽉 끌어안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구경하자, 응?"
"일단 밥 먹고, 옷도 입고."
"그사이에 눈이 다 녹으면 어떡해!!"
"그럴 일 없으니까."
벨바스는 종종 제 아내가 이렇게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던 순간들을 생각했다. 서커스를 구경하고 싶다며 눈을 빛내거나 작은 곰 인형을 소중히 쓰다듬고 끌어안으며 심지어는 함께 대화하기도 하던 순간들을. 벨바스는 칼라크의 그런 모습들이 바로 그가 잃어버린 어중간한 유년기의 흔적일 것이라 추측했다.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평화롭고 다정한 유년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 빈자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리라고. 벨바스는 칼라크가 이렇게 아이처럼 굴 때 자신이 해줘야 할 것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칼라크가 하고 싶은 걸 최선을 다해 같이 즐겨주는 것 말이다.
그리하여 벨바스와 칼라크는 목도리와 모자, 장갑, 두툼한 겉옷으로 완전 무장한 채 밖을 나섰다. 눈은 여전히 하늘에서 퐁퐁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이들이 도시 곳곳의 설원을 차지하며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새하얀 천국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칼라크도 그러한 아이 중 하나였다.
"신참, 우리 눈사람 만들기 대결할까?"
"물론이지. 내기 보상은 뭐로 할래?"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좋아."
"그럼 하나, 둘…"
셋!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둘은 이미 정해둔 구역으로 달려가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벨바스는 꽤 자신이 있었다. 종종 아이들이 눈사람 만드는 걸 도와주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칼라크는 10년간 눈이라곤 구경도 못 해 봤을 테니 적응하는 데 좀 애를 먹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꽤 만족스러운 구체의 형태를 갖춘 눈덩이를 보며 벨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번 내기는 자기가 이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그 위에 올릴 눈덩이를 만들기 위해 돌렸던 시선 끝에 전혀 상상도 못 한 것이 걸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와, 진짜 크다."
"저거 마법 아니야? 저 언니 위저드인가 봐."
"아니야, 내가 봤을 때 저 누나는 드루이드야. 내리는 눈을 전부 모으는 마법을 쓴 거지."
"어떻게 저렇게 크게 만들지? 엄마! 나도 저렇게 큰 눈사람 만들래!"
벨바스는 시선을 쭈우욱 올려 너무나도 압도적인 크기의 눈덩이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말이 안 되지 않나?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크게 만들 수가 있다고? 물론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투박하고 엉성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채 눈덩이를 감상하던 벨바스는 곧 자신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칼라크와 눈이 마주쳤다. 칼라크는 씩 웃으며 제 눈덩이를 퉁퉁 두드린 다음 벨바스의 눈덩이를 가리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로 상대나 되겠어? 하듯이. 어라, 이거 좀 열받네? 벨바스는 칼라크의 도발 공격이 꽤 성공적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저렇게 무식한 크기는 못 따라 할 거 같고, 그렇다면 크기보단 질로 승부하겠다 생각한 벨바스는 전략을 수정한 뒤 다시 눈을 모으러 후다닥 뛰어갔다.
"이번 내기는 당연히 내가 이기겠네. 뭘 부탁하면 좋을까~"
칼라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눈사람의 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이길 것 같은데, 주변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아이들이 자기들도 이 '무진장 멋지고 환상적이게 커다란 눈사람'을 만드는 것에 동참하고 싶었던 건지 여기저기서 고사리만한 손을 거들어주는 덕분에 속도가 더 붙었다. 칼라크는 아이들과 함께 거대한 눈덩이를 굴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다 넘어지는 아이들도 있었고(칼라크 본인도 한 번 엎어졌다) 손이 꽁꽁 언 탓에 눈덩이를 굴리다 중도 포기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함께 굴린 눈사람 머리는 몸통보다 더 완벽하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완성작을 본 아이들은 모두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고, 칼라크 역시 함께 박수치며 즐겁게 웃었다.
"언니, 이거 언니 혼자 올릴 수 있어요?"
"그럼, 당연하지!"
"나도 올려보고 싶어요!"
"나도 할래!"
"그럼 다 같이 올릴까?"
"네!!"
솔직히 칼라크 혼자 힘으로도 눈사람을 올릴 수야 있었지만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있자니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라, 칼라크는 아이들과 함께 조심조심 눈사람의 머리를 올렸다. 칼라크가 눈사람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사이 아이들이 바쁘게 몸통과 머리를 튼튼하게 이어 붙이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의 손이 어찌나 빠르고 정교한지 칼라크가 손을 뗐음에도 거대한 눈덩이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붙어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꾸며요?"
"아, 맞다. 크게 만드는 것만 생각해서 그걸 까먹었어."
"너무 커서 하나도 안 닿아요."
"그럼 내가 목말 태워줄 테니까 너희가 하나씩 꾸밀래?"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그 말과 동시에 칼라크는 커다란 당근을 들고 있던 아이를 제 어깨 위에 올린 채 천천히 일어섰다. 아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와! 짱이다! 소리쳤고, 칼라크는 그치? 짱이지? 따라 소리쳤다. 밑에서는 나도, 나도 탈래요! 저도 가져왔어요! 아이들의 아우성 소리가 가득했다. 반응이 어찌나 열렬한지 좀 진정하라고 외쳐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칼라크의 머릿속에 문득 제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칼라크는 벨바스의 말투를 최대한 따라 하려고 노력하며,
"자, 다들 조용히! 제일 얌전하게 있는 어린이부터 올려줄 거야."
그렇게 외쳤다.
놀랍게도 효과가 꽤 좋아서, 칼라크는 역시 우리 아내는 언제나 최고라고 자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제 어깨 위의 아이가 꽂고 있던 당근이 삐뚤어져 움직이지 좀 말라는 매서운 타박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봐, 누가 이긴 거 같아?"
"하……"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산 시간. 벨바스는 칼라크의 눈사람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저런 걸 대체 누가 이길 수 있냐고!
"난 우리끼리 대결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럼 어떡해! 애들이 하고 싶다는데 하지 말라 그래?"
"그치… 그러면 하게 해줘야지…"
"그래서? 누가 이긴 거 같은데?"
"네가 이겼어, 칼라크. 아주 잘했어요."
"그럼 뽀뽀해 주라."
"그게 소원이야?"
"아니. 그냥 잘했으니까 뽀뽀해달라고."
잔뜩 뿌듯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칼라크의 얼굴을 보니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사르르 녹아버린 탓에, 벨바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고선 까치발을 든 채 칼라크의 양 볼에 가볍게 입 맞춰주었다. 그러곤 고개를 기울이더니, 장갑을 벗은 채 맨손으로 칼라크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서비스가 좋은걸."
"아, 진짜! 그게 아니라… 너 얼굴 완전 꽁꽁 얼었잖아. 목도리는 어디다 두고 온 거야?"
"애기가 춥다길래 둘러줬는데."
"장갑은?"
"눈사람 만드는 데 방해돼서 벗었어."
"잘하는 짓이다."
벨바스가 칼라크의 볼을 꼬집으며 타박하는 데도 칼라크는 마냥 즐겁게 웃을 뿐이라, 벨바스도 잔소리하는 걸 관두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을 돌려받은 뒤론 가뜩이나 추위에 약해졌는데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다시 한숨을 내쉬던 벨바스는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칼라크의 목에 꼼꼼히 둘러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칼라크는 벨바스가 다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위에 냅다 드러눕고선 소리 내 웃었다. 옆에서 아내가 경악하건 말건 칼라크는 마냥 즐거웠다.
"마지막으로 같이 천사 만들래?"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인 벨바스는 칼라크를 따라 그 옆에 냅다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칼라크는 다시 호탕하게 웃고선 양팔과 양다리를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좋다. 어렸을 때도 친구들이랑 이러고 놀았는데."
"여기에다 눈싸움까지 잔뜩 하고?"
"당연하지. 가끔 눈덩이에 돌 넣는 미친놈이 하나씩 튀어나와서 더 재밌었어. 누가 그걸 맞을지 몰라서 스릴 넘쳤거든."
"너도 맞아본 적 있어?"
"그럴걸? 대신 날 맞춘 놈한테 냅다 쫓아가서 응징해 줬었지. 돌에는 돌로 갚아줘야 하는 법이거든."
천사의 형상이 만들어지자 칼라크는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펑펑 내리던 눈송이는 어느새 거의 자취를 감췄고, 저 멀리서 햇빛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칼라크는 문득 자신이 돌려받고 싶었던 건 사실 아주 거창한 게 아니라 이런 사소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금의 소소한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즐겁게 뛰어놀고, 원하는 만큼 술을 진탕 퍼마신 다음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도록 뒹굴다가 내일 아침에 떠오를 태양을 기대하며 다시 잠드는 것. 내일도 모레도, 이다음에 올 모든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대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언제 다치고 죽게 될지를 걱정하며 스위치 끄듯 잠들어버리는 것 말고.
감겨오는 눈꺼풀을 끔뻑이던 칼라크는 다시 아베르누스를 떠올렸다. 이제는 그 빌어먹을 지옥이나 좆같은 자리엘이 전처럼 못 견디게 증오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이제 정말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칼라크는 반사적으로 제 가슴에 손을 얹어 그 아래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자리엘의 애완견 따위가 아니야. 그냥 발더스 게이트의 칼라크 클리프게이트라고. 더는 누구도 날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베르누스니 자리엘이니, 칼라크에게 그런 건 이제 그저 과거에 불과했다. 칼라크는 그 끔찍한 과거를 저 멀리 치워둔 채 즐거운 미래를 기대하며 살 수 있었다. 눈이 내리면 뛰쳐나가 잔뜩 뒹굴고, 들판 가득 피어난 꽃을 꺾어 화관을 만들거나 시원한 계곡물에 뛰어들거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마구 짓이기며 춤출 수 있었다. 이제 칼라크에겐 태양도, 바다도, 그 모든 찬란한 미래도 찰나의 신기루가 아니었으니까.
"…잠시만. 칼라크, 너 지금 엄청 차갑잖아!"
"응?"
"역시 밖에 너무 오래 있었어. 빨리 일어나. 집에 가서 몸을 데워야 해."
"조금만 더 누워있을래. 눈이 다 녹아버리면 어떡해."
"눈은 당연히 녹지! 대신 다음에 또 눈이 오면 그때 또 놀러 나오면 되잖아. 여긴 발더스 게이트고, 지금은 겨울이니까."
칼라크는 새삼스럽게도 이곳이 겨울의 발더스 게이트라는 게 당연한 사실이 됐다는 것이 퍽 생경하게 느껴졌다. 찰나의 꿈에 불과했던 곳이 이제는 온전한 현실이 되었다니. 그러던 칼라크는 문득, 어떻게든 자신을 일으키려 애를 쓰고 있는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에서는 절대 용인되지 않지만 이곳 발더스 게이트에서는, 클리프게이트의 집에서는 언제든 허용될 유년기의 특권 말이다. 칼라크는 자신이 잔뜩 떼를 쓰며 성가시게 굴어도 벨바스가 짜증 내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오히려 그는 제가 아픈 걸 티 내지 않는 걸 더 못 견뎌 했으므로,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면 되려 잘했다고 칭찬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어쩌지~"
"으이그, 못 살아! 너 진짜 무겁단 말이야!"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오."
"돌아가자마자 물 데워둘 테니까 바로 씻고 나와… 으악, 제발 조금이라도 자기 힘으로 걸어보면 안 될까?"
"나 업어줘."
"내일 하급 회복은 나한테 써야겠네. 골병들 거야, 분명히…"
칼라크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신을 업은 채 끙끙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제 아내를 보며 이제 정말로 집에 도착했다는 걸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무슨 짓을 하건 전부 허용되는 자신의 천국에 말이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날 밤, 칼라크는 독한 열병을 앓았다. 열에 들떠 몽롱한 정신 속에서 칼라크는 제 심장이 다시 지옥불 엔진으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속에 끝없이 타오르는 엔진 같은 게 들어 있지 않고서야 몸이 이렇게까지 뜨거워질 수가 있냐고. 그렇다면 이곳은 아베르누스의 전장인가? 전장이라면, 이렇게 무력하게 누워 있다간 금방 목이 잘려버릴 텐데. 아베르누스를 떠올리자마자 칼라크는 제 고막을 찌를 듯 울려 퍼지는 전장의 함성을 들었다. 불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쇳소리나 누군가의 살을 가를 때의 끔찍한 절삭음, 절명하는 이의 신음과 비명소리 같은 것들.
꿈속에서 칼라크는 그 가운데에 있었다. 영원히 흐르는 피의 전쟁에서 칼라크는 제 도끼로 눈앞의 모든 것을 조각냈다. 가끔은 조각나는 게 자신일 때도 있었다. 그 광경을 끔찍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워하는 자신을 보며 이것이 제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 말하던 티플링의 ― 악마의 본성인지를 자문하다가, 결국 이 지옥에서 구르는 한 자신은 절대로 그러한 본성에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 몸서리쳤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난 그냥 내 사람을 믿었을 뿐인데, 사람을 너무 믿은 것도 죄가 되던가? 그렇다면 대체 앞으로 누굴 믿을 수 있단 거야? 아니, 무언갈 믿을 수는 있나…
"맙소사, 얘 지금 완전 펄펄 끓잖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감각이 제 이마에 닿자마자 매캐한 유황 냄새와 요란한 함성 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곳저곳 정처 없이 부유하던 칼라크의 정신 역시 자신이 본래 있던 침대 위로 내려앉았다. 칼라크는 감은 눈 사이로 은근하게 스며드는 익숙한 빛을 보며 제 연인이 자신을 위해 신성한 힘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히죽 웃고 있으려니 바로 타박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래도 이제 좀 괜찮은가 보네. 웃는 거 보니까."
조금 안도한 벨바스는 곧 차가운 물과 수건을 가지고 왔다. 칼라크는 제 이마에 덮인 차가운 수건이나 혹여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하게 이불을 정돈해 주는 세심한 손길, 끙끙 앓던 제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달래주는 규칙적인 도닥임을 느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에 꾼 악몽이 그새 전부 날아가 버린 건지 칼라크는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푹 잠들 수 있었다. 어쩌면 이제 매일 매일이 꿈처럼 달아서 꿈을 꿀 이유가 없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을 잠결에 했던 것도 같았다.
"몸 상태는 좀 어때?"
"완전 멀쩡해. 볼래?"
칼라크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아내를 냉큼 안아 든 뒤 두어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벨바스는 이제 칼라크의 이런 돌발 행동이 익숙해졌는지 별 대꾸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 나은 거 같아서 다행이다."
"나도 놀랐어. 그렇게 아팠던 건 거대 뇌 잡은 뒤로 처음이었거든."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던데… 하긴, 어제 하루 종일 눈밭에서 뒹굴었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겠어."
"그래도 재밌었으니까 된 거지! 와, 아직 눈이 안 녹았네?"
"응. 게다가 네 눈사람은 엄청나게 크니까 다 녹으려면 여드레는 걸릴지도 몰라."
"그거 좋은데? 이왕이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안 녹았으면 좋겠다."
"녹는 게 뭐 어때서. 이다음에 또 눈이 내리면 그때는 같이 눈사람 만들까? 눈싸움을 해도 좋고. 아, 근데 돌은 넣지 마. 뿔 깨지기 싫어."
"너한테 던질 건데 내가 눈에 돌을 어떻게 넣어?"
그렇게 말하던 칼라크는 별안간 벨바스를 힘주어 꼬옥 껴안았다. 벨바스는 그런 칼라크를 잠시 바라보다가,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어제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응. 그래도 괜찮아. 중간에 네가 없애줬거든."
"내가?"
벨바스는 하급 회복에 그런 효과도 있던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이 신의 힘이나 마법 따위가 아니라 벨바스 본인의 힘이라는 건 아마 영영 모를 테지. 칼라크는 전부 다 네 덕분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군가가 어떤 말은 너무 많이 하면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라고 말했던 게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앞으로 같이 50년은 더 살 텐데 제 아내가 벌써 이런 말에 질려버리면 아무래도 좀 곤란할 것 같았다.
"아, 배고파! 밥부터 먹자."
"그으래. 그러려면 좀 놔줘야 할 거 같은데."
"이대로 같이 가면 되지!"
"어휴, 이러다 익숙해지면 큰일인데."
"왜? 매일 아침마다 내가 옮겨주면 되잖아."
"그 점이 가장 큰일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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