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8

진화랑 2개. 달달한 연성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다음 연성은 할로원 꾸금 연성으로 돌아오겠습니다.

1. 보스코노비치 박사의 약에 당해 10살 정도로 어려진 두 사람으로 상대적으로 형 같은 화랑, 고집쟁이가 된 진으로 진화랑.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알리사와 전쟁에 필요한 연구와 발명에 힘을 쏟던 보스코노비치의 연구와 발명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번 그 이상한 방향으로 바뀌면서 만들어진 약의 피해는 위그드라실 소속 사람들이 매번 당하고 있었는데 공고롭게도 이번 약의 피해는 위그드라실 소속도 아닌 협력자 포지션이었던… 진과 화랑이었다. 알리사에게 지적 받은 후 지금까지 만든 모든 시약을 유리병 하나에 부어버리고 처리하러 가던 박사가 코너를 돌 때 실수로 벽에 부딪쳐 손에서 놓친 시약이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굴러가다 결국 아래층으로 떨어져 세계 복원 프로젝트의 보고를 위해 제 사범과 함께 온 화랑과 생사 및 행방을 알게된 엄마인 준과 함께 온 진의 발 밑에서 깨지게 되었고 이내 두 사람은 보라색의 연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 뭐, 뭐야 이거…! “

“ 윽…! “

대화를 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들의 주변에서 피어오른 보라색 연기에 놀란 화랑의 목소리와 진의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보라색 연기 속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고 높아지기 시작했다. 으앗! 콰당, 중간중간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현란한 색상으로 눈을 가리던 연기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미한 연기 속에서 보이는 실루엣에 눈을 비비던 사람들은 이내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보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기 속에 있어야 할 건장한 체격의 남성 둘은 어디가고 자기보다 훨씬 큰 상의를 걸치고 흘러내린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진 듯 주저 앉아 기침을 하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아이와 역시나 자기보다 훨씬 큰 상의를 걸치고 주저 앉은 아이를 지키듯 한쪽 팔로 감싸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아이가 있었다.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계속 기침을 하던 붉은 머리칼의 아이가 조금 진정된 듯 주변을 보다 문득 제 몸을 살폈다. 어…? 제 주변에 흩어진 옷은 제가 입고 왔던 옷이었다. 어, 어…? 당황스러움에 제 작아진 손과 상의만 겨우 걸친 상태의 모습을 확인한 붉은 머리칼의 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보스코노비치 박사, 또 댁이지!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

“ 괜찮아, 화랑? “

“ 이게 지금 괜찮아 보… 너도 어려졌어? 아, 진짜! “

자신을 부르는 어린 목소리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려던 화랑은 자신을 보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어린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탁 내리쳤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저를 감싼 체 저를 보고 있는 얼굴은 분명 진이었다. 하아아… 깊게 한숨을 쉬고 있자니 누군가가 화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화랑아, 괜찮으냐. 엄하지만 다정하게 묻는 말투, 화랑의 사범인 백두산이었다. 사범님. 딱딱하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화랑의 머리를 쓰다듬던 백두산의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세상에 이 시절의 진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차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뻐하는 목소리, 진의 엄마인 준이었다. 엄마. 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작게 소리를 내 웃으며 준이 손을 뻗어 진의 볼을 매만졌다. 그렇게 뭔가 힐링 존이 펼쳐진 것도 잠시 백두산이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며 화랑을 품에 안고 일어나려 했다. 화랑의 손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진만 아니었다면. 아, 제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손길에 작게 소리를 흘린 화랑이 진을 바라보았다. 진이 어려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눈으로 화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 저를 부르는 화랑을 잠시 바라보던 진의 시선이 백두산에게 향했다. 말없이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던 백두산이 흐음, 소리를 흘렸다. 준도 진의 행동에 조금 놀란 듯 어머, 소리를 내며 그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럼에도 진의 계속해서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화랑의 손목을 꼭 붙잡은 체. 마치 둘의 시간만 멈춘 것 같은 영겁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한번 더 소리를 흘린 백두산의 선택은.

“ 무겁지 않으신가요, 백두산님? ”

” 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자세한 사연은 조용한 곳에 가서 들어볼까. 리, 두 사람의 옷 좀 수거해주게 ”

양 팔에 진과 화랑 두 사람을 모두 안아든 백두산이 이 상황을 아주 재미있게 보던 리에게 옷 수거를 부탁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범님, 진짜 안무거우세요? 아무리 어려졌지만 그래도 두 명인데… 안절부절 못하며 제 안색을 살피는 화랑에 이 녀석,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그래도 아이 2명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다. 라며 미소와 함께 장난스럽게 받아친 백두산에 화랑도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어려져서 그런가 뭔가 생각하는 것도 단순화 되는 것 같아. 근데 이 녀석은… 화랑이 슬쩍 왼쪽에 안긴 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제 손목을 놔주지 않은 체 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문 체 였다. 결국 보다 못한 화랑이 붙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볼을 매만지고 나서야 진의 시선이 화랑에게 향했다. 너 괜찮냐? 그 질문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거 맞나, 이거…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랑은 이내 스팀 오르는 것 같은 머리에볼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는 제 사범님의 몸에 기대며 아, 모르겠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자신을 진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체.

“ 그러니까… 알리사에게 지적 받고 지금까지 만든 모든 약을 유리병에 부은 후 폐기처리를 위해 가던 중 실수로 유리병을 놓쳤고 그게 그대로 두 사람이 있던 곳으로 떨어졌다라… “

“ 불운의 끝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는데… “

“ 지금까지 만들었던 약을 모두 합쳐서 섞어버리는 바람에 약의 성분도 모르고 해독약을 만드는 것도 단기간엔 어려울 것 같네. 일단 두 사람의 피는 확보하긴 했지만… “

“ 그 전에 우리한테 해야할 말이 있을텐데, 박사! 이게 무슨 꼴이야, 진짜! “

차례대로 백두산, 리, 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사를 보며 으르렁 거리고 있는 어려진 화랑을 보며 백두산은 타박 대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만큼은 화랑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세상이 평화로워진 후 할 일이 알리사의 수리를 제외하고는 없어진 박사는 틈틈히 여러가지 약 같은 것을 만들었고 가끔은 리와 협조하며 악취미에 가까운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의 약과 물건에 여러 명이 피해 아닌 피해를 보기도 했고 화랑도 그에게 잘못 걸려 고양이로 변하기도 했었다. 그때의 굴욕을 생각하면 정말… 이라며 가끔 이를 가는 그였는데 이번에 또,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지만 그의 약에 당해 어려졌으니 화를 낼만도 했다. 다만 어려진 탓에 조금의 박력도 없었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도움을 받아 소매 부분은 접어서 정리했지만 원피스를 입은 것 마냥 상의만 입은 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를 뽑히고 소파에서 짜증 섞인 얼굴로 앉아있어야만 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제자의 모습에 한번 더 한숨을 쉬기가 무섭게 그런 제자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던 또 다른 피해자와 눈이 마주친 백두산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백두산은 카자마 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랑을 죽일 뻔한 적이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 건에 대해 당사자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백두산의 진을 향한 호감도는 이미 마이너스를 향하고 있었는데 제 제자가 우물쭈물한 얼굴로 진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고백한 순간… 직접 일본으로 강림하여 진과 담판을 짓는 대사건까지 일으켰다. 물론 본인들이 좋다는데 사범인 자신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백두산은 걱정되는 마음에 정말, 진심으로 말리고 싶었다. 결국 지금은 포기하고 적당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긴 했지만. 그런 그를 알기에 진은 백두산과 마주칠 때마다 그 누구보다 저자세로 항상 대했다. 화랑에게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리고 백두산이 얼마나 올곧고 대쪽 같은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진 지금, 진이 백두산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같은 저자세가 아니라…

“ 근데 넌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거야? “

“ 싫어? “

“ 답답하니까 좀 놔주면… “

“ 싫어 “

“ 뭐야, 이 고집쟁이는…! 어려지더니 성격까지 바뀐거야? “

화랑의 아우성에도 고집스럽게 진은 화랑을 절대로 놔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자리에 백두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품 안의 화랑의 허리를 끌어 안은 체 그 어깨에 얼굴을 기댄 진은 만족한 어린 맹수마냥 그르렁거리며 어깨에 얼굴을 비벼대다 백두산과 눈이 마주쳤다. 어려져서 그런걸까, 평소라면 눈을 내리깔고 잽싸게 화랑을 놓아줬을 진은 무거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적잖이… 속으로 쌓인게 많았던 모양인지 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저자세는 커녕 오히려 노려보는 진에 백두산이 허, 어이없다는 뜻이 담긴 탄식을 흘렸다. 어려져서일까,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내보이는 진에 백두산은 조금 기가 막혀졌다. 하아, 오늘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백두산이 진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이야기에 참여했다. 결국 결론은.

“ …그래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구나, 화랑아 “

“ 하아, 해결된 거 하나도 없이 이 꼬라지로… “

“ 뭐, 뽑아간 너희 둘의 피로 최선을 다해 해독약을 만들어보겠다니 기다려 보자구나 “

“ …네, 사범님 “

결국 박사가 두 사람의 피를 해석하여 약의 성분을 파악, 해독약을 만드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빠르게 자리를 파했다. 화랑은 그 사실이 내심 불만이었지만 지금 당장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아… 혹시 이대로 못돌아가면… 다시 어린이부터 시작해야 되는거 아냐…? 설마 이 모습으로 평생 살아야한다거나… 으으, 아냐. 나쁜 생각은 하지말자.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근데…

“ 너 진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까 돌아가야… “

“ 나도 같이 갈거야 “

“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넌 네 집으로 가야… “

“ 아니, 그도 같이 갈거란다 “

“ 사범님? “

진심으로 놀란 화랑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들은 백두산이 제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진을 보다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준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진이 화랑짱과 헤어지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 그렇게 부르지마! - 그러니 오늘 하루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백두산님. 그 말에 백두산이 도장의 아이들이 놓고 간 옷가지들과 둘의 사이즈에 맞을 가볍게 입을 옷들이 있는지 생각하는 사이 준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화랑과 눈을 마주쳤다.

“ 진을 잘 부탁해, 화랑짱 “

“ 아니, 진은 그냥 진이면서 왜 나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준씨. 뭐… 괜찮아? “

“ 화랑짱이니까 괜찮아. 그리고 내일 데리러 올거야 “

“ 데리러 와? “

“ 응, 어려진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게 아주 많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평화롭게 두 사람이랑 쇼핑이나 외식 같은거 많이 해보고 싶어. 어릴 적엔… 못했었으니까 “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한숨과도 비슷한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 그리움과 향수병과도 비슷한 무언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진도 진이지만 준씨도… 사연이 깊긴 하지. 왠지 난 거기에 휘말린 느낌이 없지 않긴 한데… 아, 모르겠다. 머리 아파. 이 이상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이 고집쟁이와 사범님 간의 기 싸움을 말리는거다. 화랑은 또 다시 저를 사이에 두고 제 사범님과 눈싸움 중인 진을 힐끔 보고는 하아아…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진짜…

이제 불 끌꺼니까 누워. 그 말에 진이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에 눕는 걸 본 화랑이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불을 끄고는 잽싸게 저도 깔린 이불에 누웠다. 두 사람이 백두산에게 안겨 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 도장을 뒤져 가르치던 아이들이 놓고 간 옷과 도장에서 수련회를 할 때 나눠주었던 체육복을 찾아 입게 했다. 다행스럽게 어려진 두 사람의 사이즈에 잘 맞았다. 일단 오늘은 푹 쉬거라. 그 말을 끝으로 백두산이 나가고 화랑은 바닥에 앉은 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진을 보다 이제 자자며 누우라고 말한 것이었다. 와, 진짜 어려지긴 했네. 원래라면 두어발짝만 가도 바로 이부자린데 지금은 그보다 2, 3배는 더 걸어야 하네. 발에 느껴지는 푹신한 이불의 감촉에 손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이불 안으로 들어간 화랑은 제가 들어가자마자 저를 껴안아오는 찰거머리에 작게 혀를 찼다.

“ 야, 진… 잘 때 만이라도 좀 편하게 자자 ”

“ 싫어 ”

“ 아, 진짜 이 고집쟁이가 ”

“ 내일… ”

“ 응? ”

“ 엄마가… ”

“ 아, 어려진 너랑 쇼핑 같은거라도 하고 싶으셨나봐. 뭐… 어릴 적에 그런 경험 없었다면서 ”

“ …응 ”

“ 사실… 나도 그래 ”

난 부모도 모르는 고아원 출신이니까. 나도 뭔가 부모님과 손을 잡고 어딘가를 함께 걸어가는 경험은 없긴 해. 사범님이 내 부모님이나 다름 없긴 하지만… 갑자기 어려져서 그런걸까. 둘은 도란도란 서로의 어릴 적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둘 다 어린 시절이 평탄하지 않았다. 화랑은 부모가 버린 아이었고 진은 준이 사라지기 전에는 그래도 엄마인 준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그 이후가 너무나도 불행했다. 물론 지금은 어린 시절에 비해 확실히 행복하긴 하지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화랑은 저를 끌어안고 있던 진의 힘이 조금 풀리는 걸 느끼고는 슬그머니 진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대답은 없었다. 잠들었나… 그래, 이런 헤프닝이 있었으니 지칠만 하지. 나도 피곤하니까… 이만 자자.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화랑이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린 아이의 체온은 무척이나 따뜻한거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화랑, 누군가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며 화랑이 깊은 수마로 빠져들었다.


2. 썰 모음 9-2에서 이어지는 그냥 알콩달콩 연애질 하는 둘과 그 연애질에 본의 아니게 피해보던 주변 인물들로 진화랑.

시작은 분명 최악이었지만 둘은 생각보다 꽤나… 연애를 잘하고 있었다. 화랑이 예상보다 대인배인 것도 있었지만 - 술 취해서 사랑한다 속삭이며 강간해 놓고 그걸 기억도 못하고 혼자 오해하고 있던 진에게 또 습격당할 뻔한 걸 용서해주고 사귀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대인배였다 - 진이 제 잘못을 인정하고 진짜 엄청 헌신적으로 화랑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진이 제 감정을 고백하고 화랑이 앞으로 하는거 봐서 라는 대답을 남긴 날. 데려다 준다고 했던 진에게 지금 사범님하고 마주치면 널 죽일지도 모른다며 거절하고 혼자 도장으로 돌아온 화랑은 새롭게 생긴 잇자국을 발견한 백두산의 2차 극대노를 허리를 붙잡고 버티기와 진과 대화했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거라는 말로 힘겹게 막아내고 - 놓거라! 또 상처를 달고오다니… 카자마 진, 그 녀석을 당장…! / 고정하세요, 사범님! - 제 방에서 앞으로 진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던 중 밖에서 들린 거친 고함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급하게 창문을 열자 보인 광경에 화랑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몰래 데빌의 힘까지 끌어내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진이 사범님에게 뺨을 제대로 맞은 체 자신을 향한 거친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범님이 더 이상 손을 들 것 같지는 않아 화랑은 그대로 창문을 닫고 창문 옆에 기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끼어봤자 사범님의 화를 더 부를 것 같고 이건 진이 스스로 감당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침묵한 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이 조용해지더니 이내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을 하자 끼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고 불쑥 내민 얼굴에 화랑이 혀를 찼다.

“ 제대로 맞았네. 우리 사범님 손이 좀 맵지? “

“ 하하… 자업자득이지, 뭐. 들어가도 돼?

“ 들어올려고 두드린거 아냐? …들어와 “

한쪽 뺨이 부운 진에게 들어오라 말한 화랑이 들어와 방을 구경하듯 두리번 거리는 진을 대충 바닥에 앉게 하고는 이번엔 자신이 방을 나갔다. 시간이 10분이나 흘렀을까, 다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화랑의 손에 들린건 얼음 주머니였다. 우왁스럽게 그걸 맞아서 부어있는 빰으로 밀치듯 대준 화랑이 진이 얼음 주머니를 붙잡는걸 보자 손을 놓고 진의 앞이 아닌 뒤로 가 그의 등에 제 등을 맞대고 앉았다. 왜 옆이나 정면이 아닌 등 뒤인지 궁금했지만 진은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체 그저 조용히 얼음 주머니로 제 뺨을 식혔다. 짧은 침묵 후 먼저 입을 연 건 화랑이었다.

“ 왜 왔어? 사범님이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

“ 그렇다고 안가면 비겁하게 숨는 것 같았어. 그리고 어차피 지금이나 나중이나 맞는 건 똑같을 것 같아서 “

“ 안맞을 수도 있잖아 “

“ 네 사범님 올곧고 우직하시잖아.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시고. 왠지 끝까지 기억하실 것 같아 “

“ …맞는 말이긴한데 왠지 뒷담화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 “

“ 뒷담화 아니니까 화내지마 “

“ 알아, 말이 그렇다는거지. 그래서… 사범님한테 뭐라고 변명했어? “

“ 변명 안했어. 솔직하게 말씀 드렸어. 널 좋아하고 있었고 그게 술에 취했을 때 나와버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널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짜라고 ”

” …그래서 사범님은 뭐라시는데 ”

” 역시 못믿겠다고 하시더라.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사람을 상처입히는 날 못 믿겠다고… ”

” …그래서? ”

” 믿을 수 있게 행동하겠다.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어 ”

” 무릎 꿇고 빌었다고? 네가? ”

” 응, 사범님도 너처럼 놀라시더라. 내가 자존심도 버리고 다짜고짜 무릎까지 꿇을 줄은 모르셨나봐. 근데… 난 진짜 진심이야, 화랑. 널… 좋아해. 정말 진심으로 ”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담담하게 지금 제 심정을 다시 한번 더 고백한 진은 대답이 없는 화랑에 섭섭한 감정 같은 건 없었다. 벌써부터 대답 같은 건 요구하고 싶지 않아. 오래걸려도 좋으니까 네가 천천히 진심으로 고민하고 생각해서 답을 들려주면 좋겠어. 긍정적인 대답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여도 너에 대한 내 감정은 바뀌지 않을거야. 근데 그런 거 빼고서라도… 침묵이 좀 길어지는데…? 꽤나 오래동안 침묵을 지키는 그를 기다리다 지친 진이 슬그머니 화랑…? 이름을 부르며 슬쩍 상체를 돌려 바라보니.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살짝 숙인 화랑이 보였다. 어, 화랑…? 당황한 진이 다시 한번 더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퉁명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화랑이 대꾸했다. 시끄러워, 내 이름 부르지마… 화랑이… 의식했다. 제 좋아한다는 말에 화랑이 반응했다. 예상하지 못한 쑥쓰러워하다 못해 부끄러워하는 화랑의 모습에 진도 얼굴을 붉게 물들인 체 슬그머니 다시 상체를 돌려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체 고개를 숙였다. 괜시리 서로 맞댄 등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좋… 아해, 화랑 “

“ …… “

“ 널… 좋아해, 화랑 “

“ 시끄러워… “

“ 좋아해, 진심으로 널 좋아해 “

“ 읏, 시끄러… 아, 진짜… “

“ …화랑 “

“ …아해… “

“ 뭐? “

“ 아, 진짜! 나도 좋… 아한다고… “

버럭 화를 낼 것 처럼 빽 소리를 내지른 것도 잠시 목소리가 사그러들더니 이내 속삭이듯 내뱉은 진심에 진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다시 몸을 돌려 화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귀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체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화랑이 퍼득 정신이 돌아온건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진은 바라보지도 않는 상태로.

“ 차, 착각하지마! 좋아하긴 하는데 아직 사귄다고는 안했으니까…! “

“ 다시 한번 더 말해줘 “

“ 뭐? “

“ 한번 더… 말해줘 “

“ …으… 좋… 아해 “

“ 한번 더 “

“ …좋아해, 진 “

“ 한번 더 “

“ 야, 너 적당히 좀… “

애처럼 계속 한번 더를 외치는 진에 더는 버티지 못한 화랑이 핀잔을 주려 휙 고개만 돌리자 눈에 들어온 건 잔뜩 상기된 얼굴로 환희와 기쁨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 진이었다. 화랑, 저를 부르며 그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화랑이 순간 터져나온 감정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추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진의 손이 얼굴을 가린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화랑은 직감했다. 아, 더 이상… 이 손을 뿌리칠 수 없을거라고. 그리 강하게 힘을 준 것도 아닌데 도저히… 뿌리칠 수 없다. 손을 붙잡아 내린 진의 눈에 자신처럼 상기된 얼굴을 한 화랑이 보였다. 읏, 입술을 지긋이 물더니 시선을 피하는 화랑에 결국 참지 못한 진이 손목을 놔주고 턱을 붙잡더니 이내.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충동적으로 한 행동에 진 자신도 놀랐고 화랑이 곧장 밀쳐낼거라고 생각했지만, 화랑은 진을 밀쳐내지 않았다. 부드럽게 입술을 핥는 혀에 슬그머니 열린 입술로 제 혀를 밀어넣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키스 이후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백두산이 자신의 방에 머물러 있는 사이 화랑이 진의 등을 억지로 밀어 - 진은 그래도 사범님에게 먼저 말씀 드려야 한다고 했으나 가득이나 화가 나 있을 사범님께 기름을 부을 생각이냐며 화랑이 만류했다 - 도장을 떠나고 다음 날, 화랑은 대련실 한가운데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백두산의 옆에 슬그머니 앉아 같이 명상을 했다. 화랑이 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백두산이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체 입을 열었다. 네가 좋다면… 그것으로 좋다만… 정말로 그 녀석이 좋은 것이냐? 마치 어제 화랑의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제 사범님의 말에 움찔 어깨를 떤 화랑이 잠시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대답에 깊은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쉬는 제 사범에 다시 움찔 어깨를 떤 화랑이 슬쩍 눈을 뜨고 제 사범님의 눈치를 보았다.

“ 알았다. 네가 좋다면 더 이상 뭐라 말할 생각은 없다 “

“ 사범님… “

“ 시간이 되면 같이 오거라. 내가 친히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

그 말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살기가 넘치는 것 같은 백두산에 이거 괜찮은건가… 화랑이 속으로 생각했으나 제 사범님의 말을 거스를 수 있을 리가 만무. 화랑의 연락에 순식간에 날아온 진은 그대로 화랑에게 밀려 범의 아가리… 아니, 대련실로 밀어넣어졌고 화랑은 밖에서 대련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누가 격투가 아닐까봐, 말 대신 대련으로 제 진심을 표현하는 사범님에 화랑은 그저 가만히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해진 대련실에서 작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문이 열리면서 뭔가 후련한 얼굴을 한 백두산이 나오자 화랑이 벽에서 등을 떼었다. 제 사범님이 별 말 없이 손으로 대련실 안을 가리키며 가버리자 화랑이 무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련실 한가운데 뻗어있는 진을 본 화랑이 작게 혀를 차고는 천천히 소리도 없이 다가가 가져온 생수병을 톡 진의 뺨을 대며 중얼거렸다.

“ 살아있어? “

“ 하아… 죽는 줄 알았네… “

“ 사범님은 뭔가 후련한 얼굴이시던데 “

“ 나도 후련해, 그거랑 별개로 좀 지친거지… “

“ …그래? “

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화랑이 건네는 생수병을 받아들고 단숨에 물을 반 이상 비웠다. 다 마셨으면 내놔, 의 뜻으로 손을 내민 걸 뭘로 알아들은 건지 진이 그 손을 잡더니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화랑이 그대로 진의 위로 풀썩 엎어졌다. 야, 너…! 뭐하는 짓이냐고 말을 하려던 저에게 입을 맞추는 진에 눈을 가늘게 뜬 화랑이 이내 자신도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잠시 진득한 키스를 나누고 입술을 뗀 진의 얼굴은 본인의 말 그대로 뭔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건 아마도 오래동안 가지고 있던 감정을 허락 받았다는 후련함일 것이다. 잠시 눈을 굴리던 화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하나 묻겠는데. 뭔데?

“ 너네 가족은? ”

“ …그 인간의 허락은 필요 없어. 어차피 관심도 없을거고. 엄마는 축복해줬어. 그거면 되지 않을까 ”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가장 큰 산이었던 백두산의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진의 엄마인 준에게로 향했고 준은 화랑을 보자마자 밝게 웃으며 반겼다. 아무래도 무뚝뚝한 진에 비해 틱틱거리긴 하지만 나름 사교성은 있는 화랑을 준은 꽤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았다. 진을 잘 부탁해. 그런 말을 하며 제 손을 잡고 밝게 웃는 준에 화랑이 뭐… 저 자식이 잘하면. 이라고 퉁명스러움으로 가장한 쑥쓰러움을 그대로 내비췄다. 그런 화랑을 보며 작게 소리를 내 웃던 준이 진을 보더니 그 사람은 걱정마렴,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말했고 그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그 양반도 준씨는 못이기는구나. 화랑은 납득했다. 준에게 이야기도 했겠다, 진은 아예 공개적으로 화랑과 연인이 되었다고 알려버렸다. 물론 화랑에게는 말도 안하고 멋대로 한 짓이었고 의외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 생활 중이었던 화랑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 폰에 쌓인 수많은 알림들과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어떻게 된건지 전말을 알게되어 진을 보자마자 바로 초스카이 10단 콤보를 날리며 버럭 화를 냈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간 온갖 질문과 매스컴에 시달리게 될 처지가 된 화랑을 대신에 그 방패막이가 된 건 당연하게도 진이었고 그 혼란의 일주일 후 세상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연애질을 직접 목격하기 시작했다.

“ 음, 화랑. 자네는 오늘 경기가 없잖아? ”

“ 이 자식한테 물어봐. 난 오늘 쉬고 싶었다고 ”

오늘 경기가 있는 리는 대기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경기가 있는 진이야 당연히 경기장에 오는 것이 맞았지만 그 옆에서 툴툴거리고 있는 화랑은 오늘 경기가 없었다. 진에게 끌려왔군. 그렇게 생각한 리가 진을 향해 뭐라뭐라 투덜거리고 있는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합이 없기에 항상 보던 도복이 아닌 손등까지 덮히는 아이보리 니트와 편안한 바지를 입은 모습은 왠지 낯설었다, 펑크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 화랑이기에 더욱 더. 누구 취향이 들어간건지 알 것 같은 코디에 리는 내심 웃음을 참으며 화랑에게 뭐라뭐라 말하다 어퍼를 맞는 진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카님, 연애는 제대로 할 수 있을려나. 진과 화랑, 두 사람의 성격 상 스킨십이나 다정하게 알콩달콩한 연애는 힘들 것 같다는 게 리의 빅데이터에서 나온 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 오늘 컨디션 좋은 것 같네. 그렇지, 화… 화랑? 대기실의 소파에 앉아 벽 한쪽을 완전히 커버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크린으로 경기 중계를 보던 진은 로우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스티브의 경기를 보며 입을 열었지만 이내 툭, 제 어깨에 묵직하게 기대어 오는 무언가에 힐끔 바라보았다. 피곤하니 쉬고 싶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듯 화랑은 진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버렸다. 물론 오해할까봐 말하지만… 진이 화랑을 괴롭힌 건 아니었다. 화랑은 전날 제 사범님과 꽤나 격렬한 수행을 했다. 진과 사귀면서 혹시라도 몸과 마음이 풀어질까 경계한 백두산이 수행의 강도를 올려버렸고 덕분에 화랑은 수행 후 시간이 나면 바이크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던 취미도 즐기지도 못한 체 그대로 뻗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뭐, 조금 지나면 수행의 강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만.

제 어깨에 기대 잠든 화랑을 보던 진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화랑을 슬쩍 들어올려 제 다리 사이에 앉힌 진이 화랑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 잡아주었다. 그러자 으응, 작은 소리를 내며 깨는가 싶더니 이내 푹신푹신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던 화랑이 색색 소리를 내며 다시 잠들었다. 손등을 반쯤 덮은 니트를 만지다 이내 조심스럽게 니트 밖으로 나온 손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던 진이 슬쩍 고개를 내려 잠든 화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상 시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화랑의 첫인상을 날카롭게 보곤 했지만 실상 긴장을 풀고 편한 모습일 때의 화랑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지금도 잠들어서 풀린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 화랑인가 싶을 정도였다. 귀여워. 진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관자놀이에 잠시 입술을 대다 이내 머리카락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다 문득. 진이 가만히 화랑의 허리를 안고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힐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정확하게는 제 품에서 잠든 화랑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싶더니.

“ 꺄악, 갑자기 뭔가요! 홍차가…! ”

“ 그럴 때는 이 아수세나 커피를…! ”

“ 아, 서류가…! ”

“ 요시미츠! ”

“ 으음! ”

순식간에 데빌의 힘을 이끌어 낸 진이 그 검은 날개를 크게 펄럭이자 대기실에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다. 덕분에 멋들어진 다과상을 차려놓고 홍차를 마시며 힐끔 화랑을 바라보던 리리는 갑작스런 돌풍에 다과상이 제대로 엎어져서 제 의상에 홍차가 묻어버렸고 그때를 틈탄 아수세나의 커피 홍보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편 폴란드 총리로 싸우는 총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리디아는 보고 있던 서류가 그대로 돌풍에 휘말려 흩어졌고 그 서류를 에디와 요시미츠가 빠르게 회수하고 있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 외에도 갑작스런 돌풍과 더불어 함께 흩날리고 있는 검은 날개에 모두가 아우성을 치는 사이. 그 소동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진이 날개를 접는가 싶더니 이내 그 날개로 제 품 안의 화랑을 가렸다. 마치 아무도 화랑을 보지 말라는 듯. 돌풍이 사라지고 대기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검은 날개들 속에서 이 난장판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가 한마디 툭 던졌다.

“ 안볼테니까 작작 좀 하게나, 조카님 ”

그리고 상황을 모른 체 진이 자신의 차례가 되어 일어나야 한다며 깨운 화랑은 왠지 모르게 소란스러운 대기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제 갈건데 해줄 말은 없어? 라는 진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다 그의 옷깃을 잡고 잡아 당기고는 입술 옆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남들 다 있는 대기실에서. 깃털 좀 치우자며 모두가 합심을 해 대기실을 치우던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눈이 커진 사이 설마 화랑이 이 정도까지 해줄거라 생각도 하지 못한 진이 잠시 굳어있다가 이내. 야, 놔! 응원해 달라고 했던거 아니었어? 갑자기 뭔데…! 순식간에 데빌의 힘을 꺼내 날개를 펼치고 화랑을 품에 안고 휙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자기가 없는 이 대기실에 화랑 혼자 내버려두기 싫다는 걸 노골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과 화랑이 그에게 끌려 사라지자 잠시 침묵이 흐르던 대기실에 순간 모두의 한숨 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리가 슬그머니 제 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백. 지금 통화 가능한가? 아, 우리 조카랑 자네 제자 말인데…

“ 거기서 날 끌고 왜 나가는데! ”

“ 하지만 화랑을 아무한테도 보여주기 싫었는걸 ”

“ 무슨 헛소리야, 너 ”

진은 제 시합이 끝나자마자 대기실도 들리지 않고 곧장 화랑을 끌어안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덕분에 네 경기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며 투덜거리는 화랑에게 진이 나중에 같이 보면서 복기하자며 달랬다. 이대로 돌아가나 싶었던 화랑이었지만 진이 도착한 곳은 경기장 근처의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봤자 결국엔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것이니 조금 더 화랑과 같이 있고 싶던 진이 선택한 장소였다.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은 저 멀리서 날개를 펄럭이며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모습에 움찔했다가 그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게 카자마 진이고 그에게 안겨있는 사람이 화랑인 걸 보자 이내 다들 관심을 끊으며 각자 할 일을 이어나갔다. 이게 바로 공개 선언의 순효과… 라고 말한 진의 머리를 세게 때린 화랑이 어휴, 한숨을 쉬고는 비어있는 벤치에 앉아 주변을 보다 톡톡,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 어, 화랑…? ”

“ 여하튼 이겼잖아, 너. 잘했으니까… 무릎 베개 해줄게 ”

“ …… ”

“ 뭐야, 싫어? 그럼 말… ”

반쯤 일어선 화랑을 다시 앉히고는 그 무릎을 베고 누운 진을 내려다보던 화랑이 이내 손을 들어 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벤치가 작아 종아리는 벤치 아래로 내려왔지만 그래도 누워있기에는 충분했다. 헤에, 너 속눈썹 꽤나 풍성하네. 이것도 준씨 닮은 건가? 어, 그럴걸? 얼굴은 딱딱하게 생겼으면서 눈만 무슨 순정 만화에서 나온 것 같아서 웃기단 말이야. 너무하네, 정말. 서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체 농담 따먹기를 하는 두 사람의 주변에 분홍색 오오라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주변인들이 손을 들어 눈을 비비며 힐끔힐끔 둘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런 둘을 발견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폰을 들어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날개가 폰의 카메라 액정 부분을 가렸다. 자신들의 모습을 찍지 말라는 노골적인 경고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폰을 내려놓고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힐끔힐끔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 그나저나 대기실에 무슨 일 있었어? 피곤해서 깜박 잠들긴 했는데 일어나니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

“ 음? 아냐, 별 일 없었어 ”

“ …그래? 뭐, 네가 그렇다니 그런거겠지만… ”

“ 그나저나 화랑 ”

“ 왜 ”

“ 우리… 같이 살자 ”

그 말에 화랑이 움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손이 멈춰버린 화랑을 대신에 이번에는 진이 손을 들어 화랑의 눈가를 매만졌다. 진의 말에 조금 커졌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화랑이 흐음, 소리를 흘리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화랑이 생각하는 걸 본 진은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체 생각 중인 화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맨날 호승심 넘치는 얼굴만 보다가 연인이 되고 나서 참 다양한 표정을 보게 된 진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화랑이 알면 주책이냐면서 핀잔을 줄 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화랑이 이내 다시 진과 눈을 마주쳤다.

“ 그래, 뭐… 좋아 ”

“ 정말? ”

“ 대신 사범님은 네가 설득해. 난 자신 없으니까 ”

“ 그래, 그건 걱정마 ”

“ 근데 너 지금 이거 준씨하고는 이야기 다 끝난거야? ”

“ 엄마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셔서 ”

준씨… 그렇게 안봤는데 생각보다 방임주의구만? 뭐… 괜찮겠지. 좋으니까… 같이 있으면 더 좋겠지. 꽤나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한 화랑이 이내 제 턱을 잡는 손에 생각을 멈추자마자 불쑥 진이 상체를 들어올려 화랑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초옥, 촉. 그래도 나름 밖이라고 주변 시선을 의식한 건지 가볍게 버드 키스로 두어번 입술을 맞댄 진이 입술을 떼려는 순간 마치 반격이라도 하듯 이번엔 화랑이 진의 턱을 부여잡더니 딥키스를 퍼부었다. 짧지만 굵게 딥키스를 나눈 화랑이 입술을 떼더니 진을 보며 씨익 웃었다.

“ 답지 않게 빼기는. 이제와서 밖이라고 눈치 보는거야? ”

“ 하아, 정말이지… 이래서 난 네가 좋아, 화랑 ”

“ 이럴 때만? ”

“ 그럼 너는 어떤데? ”

또 다시 서로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키득키득 웃어대는 둘… 과 그 핑크빛 아우라에 보기 좋아, 보기 좋은데… 제발 다른게 가서 해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같은 생각을 하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공원을 가득 채웠다. 둘의 주변 따위는 알거 없고 우리만 좋으면 됐다, 연애질의 끝은. 진에게 안겨 그대로 도장으로 돌아온 화랑이 진에게 잘가라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뛰쳐나온 백두산이 그대로 진에게 10단 콤보를 날리더니 쓰러진 그의 뒷덜미를 덥썩 잡아 질질질 도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 어…? 갑자기 벌어진 일에 화랑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도장 안으로 들어간 백두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화랑아, 들어오거라. 문 닫고 ”

왜 문 닫고 라는 말이 지옥으로 들어오라는 말처럼 들리죠, 사범님…? 그러나 아무 소리도 못한 체 조용히 문단속을 하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간 화랑은 다음 날 부터 진과 함께 백두산에게서 예의 범절과 유교 사상에 대해 아주 철저하게 주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사귄지 얼마 안되었고 서로 좋아 죽는 건 알겠다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애정 행각은 좀 자제하거라! 리한테 연락 받고서는 진짜 내가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하아… 그리고 화랑아, 너도 너무 무방비하게 있지 말거라. 네가 이 녀석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무방비하게… 다리 저려… 2시간 넘게 무릎을 꿇은 체 백두산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둘은 백두산의 이야기 속에서 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진은 제 숙부의 연구비를 깎겠다고 생각했고 화랑은 컴봇을 부셔버리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둘이 불순한 생각을 한다는 걸 눈치 챈 백두산의 일갈과 다시 반복되기 시작한 잔소리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순한 생각마저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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