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헌태섭우성/우성태섭명헌] 수인 & 오메가버스 au (3)
* 수인 & 오메가버스 au
* 뱀알파 명헌 X 코요테오메가 태섭 X 뱀알파 우성
* 여즉 제목을 못 짓고 있는 게 완결까지 제목 못 지을 것 같다
** 뱀의 외형 묘사 약간, 숨을 조이는 묘사 있습니다.
*** 한 편 혹은 두 편 이내에 완결 예정
태섭의 손끝이 움찔했다. 서서히 눈을 뜬다. 내성훈련을 한 다음날은 최대한 눈을 천천히 떠야했다. 갑자기 눈을 확 떴다간 시야가 뒤집히고 속도 뒤집혀 전날 먹은 음식을 보게 되기에. 몸 안에 열기가 남아있었다. 명헌과 우성은 같은 종이지만 독의 강도가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명헌의 독에도 적응하고 우성의 독에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두 뱀 수인의 독을 모두 견뎌내야한다고. 그렇게 들었다.
“…….”
천천히 눈을 뜨고 도로록 눈을 굴려 주위를 훑는다. 내성훈련을 한 것 보니 오늘은 명헌도 우성도 쉬는 날인 모양이었다. 독 후유증으로 어떤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태섭이 독을 넘겨받는 날이면 다음날까지는 둘 다 업무를 보지 않았다. 중요한 일만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하는 경우라면 둘 중 한 명만 자리를 비우고 다른 한 명은 태섭의 곁을 지켰다. 괜히 좀 그런가 싶어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 날 혼자 이 넓은 방 중앙에서 하루종일 오심과 구토에 시달려 혼절한 모습으로 발견된 이후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열기가 남아있다는 것은 태섭의 체내에 남은 독이 덜 빠졌다는 뜻이었다. 뱀 수인 둘의 독이니 내성훈련을 할 때마다 두 배의-체감상 세 배는 되는 듯한- 독을 주입하다보니 더 힘든 것 같았다. 어질한 시야에 눈을 잠시 감고 숨을 고르던 태섭이 양옆을 빠듯하게 채운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태섭에게는 조금 더운 편이었지만 이 방의, 건물의, 나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 둘에게는 적당히 따뜻할 것이다. 노곤노곤하게 풀린 얼굴로 잠들어 있는 거대한 뱀 두마리가 커다란 침대를 꽉 채우고도 꼬리 끝부분이 침대 밖에 걸쳐져 있었다. 그들을 멍하게 내려다보다 현필을 따라 나간 상가에서 산 책을 찾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울렁거리는 속이 아직까지는 참을만 했다. 태섭이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섰다. 독의 부작용인지 침대를 내려설 때는 인간형이었던 태섭이 바닥에 발을 딛자 코요테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책을 집어들 때는 반인반수의 형태로 변했다. 침대 근처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마음 같아서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뭘 해도 재수없으면 구토결말이었으므로 태섭은 참아야만 했다. 숨과 소리를 죽이고 침대로 돌아온 태섭이 비워진 중간자리를 비집고 앉아 책을 펼쳤다.
명헌이나 우성이 태섭에 대해, 태섭의 종인 코요테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태섭 역시 그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산왕에서 포유류를 보기 힘들 듯 북산에서 파충류를 만나기는 힘들었으니까.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니까. 태섭이야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이들은 독을 가졌고 강하니 독 이외에도 조심해야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당사자들은 내심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초반보다야 마음이 풀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좀 껄끄럽…다고 해야할지 어색한 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태섭이 책을 펼쳤다. 내륙 타이판. 여름의 색과 겨울의 색이 달라지는 종. 독성이 아주 강하지만 순한 성격으로 마주치면 먼저 피하기에 피해 사례가 많지 않다고.
“…….”
잠들어있는 머리가 검은 두 뱀을 보던 태섭이 다시 책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빡빡 깎아놔서 그런가. 마주친 사람이 먼저 피해야할 것 같이 생겼는데 다들. 성격이 순하다고? 눈을 가늘게 뜨고 태섭이 다시 책과 두 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책은 수인이 아닌 자연 동물로서의 내륙 타이판을 묘사한 것이라,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태섭이 책을 덮었다. 원래도 책과 그렇게 친하지 않았지만 해독이 덜 되어 체력적으로 힘에 부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침대 머리맡 사이로 책을 끼운 태섭이 천천히 몸을 뉘였다. 침대 밖으로 불편하게 꼬리가 툭 튀어나와 있으면서도 가운데 낀 자신의 자리로 절대 침범하지 않는 모습이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은 인간형의 모습으로 잠을 자는데, 그들 역시 밤동안 독을 견뎌내던 자신을 지켜본다고 힘들었던 걸까.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자고 있는 두 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매끈하고 검게 빛나는 비늘은 만지면 서늘한 감촉이었다. 저도 모르게 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잠든 두 뱀의 얼굴께를 쓸어내린다. 보통의 내륙 타이판은 크기가 크면 4M 정도 된다는데 이들은 수인이기에 코요테 수인인 태섭처럼 일반 뱀보다 훨씬 크기가 컸다. 이 침대방의 침대가 방을 거의 다 채우는 거대한 사이즈인 이유였다. 그 침대를 둘이서 빡빡하게 채워놓고도 그 가운데에 있는 태섭이 누운 자리로는 절대 몸을 굽히지 않는 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태섭이 양팔 가득 안아도 그들 중 누구의 몸통도 한번에 끌어안을 수 없는 사이즈가 침대 속에서 구겨져있으면서도 제게는 끄트머리도 손을, 뱀이니 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미묘했다. 지금은 변한 초반의 그들 사이의 조건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변해가는 관계를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은 태섭쪽이었다. 갑과 을의 관계인 것도 썩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깔끔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저 원하는 대로 알만 낳아주고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확실하다면. 분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메가 형질로 태어난 이상 알파와 각인하지 않으면 그 때처럼 습격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이대로 알파와 각인하면, 알파 둘과 각인해야한다는 게 믿기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각인한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으므로 안전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알파가 강하면 강할수록 안전 테두리는 더욱 두터워진다. 오메가인 자신도. 형질은 다르지만 자신의 가족들도. 갑과 을에 가까운 파트너 관계가 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처럼 정말로…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관계… 보다는.
일단 감정적이게 되잖아. 오메가는 알파가 없으면 세상을 살기 힘든 점이 많았다. 각인했다가 헤어지는 알파오메가에 대한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형질인이 비형질인 베타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인구가 몇인데 헤어지는 형질인이 하나도 없었을까 싶은데도 단 한번도 형질인들이 헤어지고 난 후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것이 불안했다. 일반인들이 결혼했다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싸워서, 바람을 피우고 불륜을 저질러서 헤어지는 소식은 숱하게 들어왔다. 하물며 자연계에서도 짝을 맞이하고 새끼를 낳아 길러도, 생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게 되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태섭은 그게 싫었다. 태섭은 절대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감정이 주된 관계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들이 그정도로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태섭은 최악에 차악까지 생각 해야했다. 가장이다. 가족들을 지키고 책임져야 했다. 가족들을 지켜야한다는 막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 책임은 오메가인 태섭의 어깨를 짓누르다 못해 숨통까지 조여왔지만 감당할 몫이었다. 이미 자신 때문에 부친과 형이 목숨을 잃지 않았나. 책임감이 태섭의 숨을 조르는 것은 응당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그 흥미가 제한시간이 다하면 차갑게 식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다소 무표정하고 무관심해 보이던 얼굴이 자신을 발견하면 금새 풀어지고 다양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생기는 간질간질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자 했다.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 표정에서 흥미에서 그치는 감정이 아니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최대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 시선을, 손길을 마주하는 자신 역시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추스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자 했다. 그렇게 하고자 했다. 이성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렇게 하고자 했다. 오메가는 알파 없이 살 수 없지만, 그에게는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매일을 수 십 수 백번을 되뇌이고 되새기고자 했다. 그렇게 하고자 했다.
“힘들텐데 좀 더 자지 않고용.”
“네가 먼저 만져주는 건 처음이야.”
그러니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뱀이었던 두 사내가 인간형으로 변한 채 태섭을 보고 있었다. 태섭의 손길에 잠에서 깬 명헌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뺨을 만지던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우성이 옅게 웃어보인다. 태섭이 손끝을 오므렸다. 자상하게 잡아온 손은 작게 오므라든 손을 놓지 않았다. 닿아오는 시선이 상냥해서. 얼마나 봤다고 상냥해서. 태섭은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아직 열기가 남아있다 뿅. 항독혈청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2인분의 독에 저항하는 게 쉽진 않나보다. 많이 힘들진 않았어? 속은 어때?”
명헌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와 항독혈청을 찾고, 우성은 태섭의 뺨이며 팔을 쓸어내리며 그의 건강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태섭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지 마.
목이 메였다. 침을 삼키는 것 말고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던가, 속이 좋지 않아서 뭘 먹긴 힘들 것 같다던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상냥하다던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여태까지 어떻게든 세워두었던 선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미 반 이상은 기울어진 삐뚤빼뚤하고 부러지기 직전의 선인 걸 알면서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해독제 먼저 맞자.”
“태섭아.”
“태섭. 뿅.”
상냥하게 불러오는 이 목소리들이 불러오는 제 이름이, 밀려드는 감정의 힘이란. 이 얼마나 강렬한가. 시작이 어땠는데. 첫만남이 어땠는데. 우리의 관계가 어땠는데. 당신들은. 태섭은 결국 견디지 못 했다. 목을 조르는 책임감도 견디고자 했고, 오메가에 대한 취급과 신변의 위협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버텨내고자 했고, 이미 잃은 가족에게 평생 속죄하고 살아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 일생을 다 바치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결국은. 결국은.
명헌과 우성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럴 것이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는 자신을 보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눈물을 보며 당황하는 모습이 흐린 시야 너머로 보였다. 쥐고있던 혈청까지 내던지고 달려온 명헌과 당황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맞추던 우성이 서로를 보았다. 울음에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마.
그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지마.
나를 상냥하게 보지마.
나를 자상하게 부르지마.
내가 당신들을 좋아하게 만들지 마…….
독의 여파가 남아있던 데다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으며 흐느낀 탓인지 태섭이 쓰러졌다. 탈진이었다. 잔뜩 부은 눈 위로 수건을 깔고 얼음주머니를 대어준 우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던진 항독혈청을 주사기에 잰 명헌이 태섭의 팔에 바늘을 조심히 찔러넣어 주입한다. 따끔한 감각에 태섭이 움찔했으나 그게 다였다. 항독혈청이 빠르게 기능하며 열기가 남아있던 태섭의 몸이 정상 체온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태섭의 손을 만지며 체온의 차이를 느끼던 명헌이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안 놓쳐요.”
우성의 말에 명헌이 그를 보았다. 우성은 명헌이 아닌 태섭을 보고 있었다. 명헌의 시선이 얼음주머니로 눈이 가려진 태섭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환경과 관계 변화가 스트레스가 됐을 거 뿅.”
“강제적인 관계보단 서로 좋아하는 관계가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입장에선 그랬지.”
“태섭이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우리처럼 온갖 위험이 평생을 노리는 게 아니라 평범하면 평범한 존재였지 뿅. 습격만 아니었어도 평생을 평범하게 살았을.”
“우리랑 결혼하고 각인하면 평생을 평범을 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 우린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우성이 축 늘어진 태섭의 손을 잡아올리며 제 뺨에 대고는 중얼거렸다.
“결국 우리는 태섭이에게 힘든 존재였던 걸까요.”
“…아니.”
명헌의 대답에 우성이 그를 보았다. 명헌이 태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태섭이 울면서 했던 말 뿅. 좋아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하나 뿅.”
“그건, 좋았지만. 슬픈 말이었어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 뿅.”
밭게 내뱉던 숨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고르게 솟아오르고 꺼지는 가슴팍을 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던 명헌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본인 스스로 결론 내리게 되면.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받아들인다면.”
태섭의 발치에 앉은 명헌이 손을 들어 태섭의 발목을 쥐었다. 부드럽게.
“우는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줄거에용.”
태섭은 울면서 호소하던 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거짓말에 능하지 않은, 짊어진 것 많은 오메가는 분명 또 하나의 짐을 기꺼이 짊어질 것이다. 잘 감추지 못 하는 감정도 더 감추려 들 것이고, 의사표현도 줄어들 것이었다. 거리를 두면 뒀지 가까워지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뒷걸음칠 것이다. 명헌도, 우성도 태섭에게 그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태섭은 독이 빠지지 않아 항독혈청을 맞고 하루종일 잤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변화가 생겼다고 하면 항상 시야 안에 태섭을 두려했던 둘이 본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달까.
태섭이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바쁜가. 부하들에게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작업을 하고 이번에 출발한다는 상단 직원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참 웃기지. 그렇게 거리를 두고자 해놓고 정작 거리를 두니 서운해하는 꼴이. 태섭이 자조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피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들은 바빠보였다. 태섭을 곁에 두고 내성훈련을 하느라 줄였던 업무들이 밀려서 바빠진 것 같았다. 진지한 분위기에 태섭이 눈치를 보다 침대방으로 돌아왔다. 항독혈청 주사를 맞고 몸이 개운해져서 그런지 바깥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산책이라도 같이 하지 않겠냐고 하려던 참에 일거리가 몰려든 것이다. 안방에서 괜히 서성대던 태섭이 침대 주변에 널부러진 물건들을 발견하고는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침대를 제외하고는 물건이 그닥 많지 않아 정리가 빨리 끝났다. 쭈볏거리던 태섭이 테이블에 놓인 명헌과 우성의 베일을 발견했다. 독 때문에 태섭을 다치게 할까 입을 가리기 위해 하고 있던 것이다. 귀 뒤로 베일을 걸기 위한 금색 금속줄 사이사이에 산왕에서 나는 보석들이 장식되어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태섭이 문가를 쳐다보았다.
태섭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아서 조금씩 미뤄두었던 업무를 처리하던 거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언제부터인가 태섭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명헌이 긴 뱀의 혀를 날름거렸다. 머뭇머뭇하는 것 같더니 바깥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본인에게 걸린 조건이 있으니 도망치진 않을테고. 가족들도 여기 있으니. 그전에 그의 성정에 혼자 도망치지도 않았겠지만. 태섭의 부재를 업무가 끝나고야 깨달은 우성이 우는 소리를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태섭은 모르지만 명헌과 우성이 그에게 몰래 붙여둔 ‘눈’이 있었다. 태섭의 안전 확보 및 감시하는 게 업무인 그가 별 연락 없는 걸 보면 산왕 내에 있는 듯 했다. 그 날의 태섭을 본 이후로 명헌도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라 신경쓰이긴 했지만 뭐 별 수 있나.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지.
“으, 오늘은 춥네.”
“태섭아! 어디갔다왔어! 일하다가 봤는데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도망 안 가.”
“그런 뜻 아니야!”
커튼문을 걷으며 들어오는 태섭의 옷이 얇다. 빨개진 귀와 얼굴을 한 모습에 우성이 발열석을 쥐고 뛰어간다. 태섭의 뺨이며 손이며 발열석을 대어준다.
“뿅.”
“아.”
우성이 태섭의 한쪽 손을 열심히 주무르며 업무실 너머 그들의 침실이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명헌이 따라 들어가고 이불을 걷는다. 태섭이 냉기가 남은 외출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춥긴 추웠는지 이불 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따끈한 방 온도와 포근한 이불이 덮이자 인상이 잔뜩 찡그렸던 것이 살살 펴지는 게 귀여웠다.
“밖에 다녀온 거야?”
“으응.”
느른하게 대답하다 태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외출복으로 달려가더니 주머니를 뒤진다. 꺼내고 나더니 별안간 움직임을 멈춘다. 움찔한다고 해야할지 멈칫이라고 해야할지. 명헌도 우성도 태섭이 무엇을 하는지 몰라 서로만 볼 뿐이다. 둘에게서 등 돌린 채 한동안 서있던 태섭이 숨을 고르는지 어깨가 크게 솟았다 내려간다. 명헌과 우성의 시선도 위로 올랐다 내려간다. 태섭이 둘을 돌아보았다. 제법 비장한 표정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명헌은 우두머리로서, 우성보다 많은 전략을 짜고 머릿싸움을 해왔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이 코요테 수인이자 오메가인 반려가 될 예정인 이의 조막만한 머리통에서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측을 벗어난 것은 썩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는 예외였다. 예측불가의 태섭을 보는 게 흥미롭고 즐거웠다. 우성은 그저 태섭이 좋다고 하겠지만. 일단 튼튼하고, 아이를 좋아하기에 태섭이 저를 닮은 새끼를 낳는 것부터도 그에게는 큰 호감일 것이다.
그러니 그 도톰한 입술에서 부정적인 말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뿅.
태섭이 둘의 앞까지 다가왔다. 저를 내려다보는 두 시선에 마른침을 삼키던 태섭이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둘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태섭을 보던 두 시선이 태섭의 손을 향한다.
목걸이…인가? 베일의 장식줄과 같은 얇은 금빛 줄 중앙에 작고 검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산왕에서 가공한 흑요석이었다. 그 밑으로 달려있는 작은 짐승의 이빨. 목걸이 두 개… 를 내려다보던 명헌과 우성이 다시 태섭을 보았다.
이 선물의 의미를 모르겠다. 최근의 태섭이 보였던 눈물을 기억하는 명헌과 우성으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게 흥미롭기도 하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솔직한 시선이 태섭에게 닿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목걸이를 만들려고 나갔다가… 엄마한테 다녀왔어. 엄마는 내 유치를 갖고 계시거든. 나 뿐만 아니라 형의 것도 가지고 있지만…….”
유치. 유치… 유치??? 작은 짐승의 이빨이 흑요석 밑에 고정되어있는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코요테가 유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수인이라 반은 인간이니 그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갖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걸 흑요석과 함께 가공하여 목걸이로 만들어 자신들에게 건네는 이 순간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태섭이 가만히 있다 말을 이었다.
“엄마에게 다녀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우리의 현실. 나의 현실. 뭐가 맞는지… 이래도 되는건지. 여기에 있는 게 맞는지. 모든 것을.”
“…….”
“…….”
“내가 보는 관점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이 보는 이 곳과 당신들에 대한 관점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까.”
목걸이를 올려놓은 손을 쥔 태섭이 말했다.
“이건 증표야. 내 결심에 대한 증표이자 신뢰의 증표.”
증표. 명헌의 시선이 태섭에게, 우성의 시선이 태섭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태섭이 저를 보는 명헌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생각이 많았어. 이게 맞는 건지,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상황과 현실에서 당신들이 먼저 내밀어준 손을 그대로 잡고 각인하는 게 맞는건지. 그저 계약 관계에서 원하는대로 알만 낳고 끝내는 게 맞지 않았는지. 많은 고민을 했어. 당신들의 흥미가 떨어져 내쳐지진 않을까 솔직히 두려웠어. 나에게는 지켜야할 가족이 있으니까. 오메가인 내가 살아남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알파인 당신들이 필요했으니까. 먼저 조건을 내걸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현실이 슬프고 화가 났어. 형질이라는 이름의 운명에 순응하는 게 싫었어. 감정을 갖고 싶지 않았어.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나를, 가족들을 협박하기라도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내가 맞춰가며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게 숨 막혔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못 할 것도 없지만 나라는 개체가 죽는 느낌이어서. 그래서 최대한 당신들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들이 잘해준다고 해서 내가 홀라당 반해버린다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오메가가 알파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하고,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감정적으로 당신들을 다시 눈에 담고, 당신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이 가는 걸 부정하고 싶었어. 감정의 변화가 온전한 내가 느끼는 변화인지, 알파를 원하는 오메가의 본능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게 두려웠어. …거기에 대해서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태섭의 흐느낌에서 들려온 문장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오메가와 알파라는 형질에 대한 고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들이라면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나에게 진심을 들려줄 거라고 생각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울었어. 엄마도, 나도.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데. 강해져야 하는데. 가족을 지키려면 이렇게 울고 하면 안되는데도. 오메가로 태어난 게 잘못이 아닌데도.”
태섭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든다. 습격 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해왔을 속앓이와 가족들의 속앓이의 깊이를 그제야 체감한다.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해놓고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울음을 삼켜낸 태섭이 말했다.
“당신들을 오래 본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만남이 좋은 시작도 아니었지만. 강제성을 띄고 그대로 휘어잡아도 될 판을 먼저 뒤집고 나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잘 해주는 당신들을 믿기로 했어. 이 건물 안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게 해준 것도,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공해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 나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 나를 생각하는 만큼 가족들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가족들이 믿을 수 있으면 나도 믿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건 나와 내 가족들의 신뢰의 증표야.”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가 명헌과 우성의 손바닥 위에 닿았다.
“산왕의 환경에서 보기 힘든 종이라고, 책까지 마련하면서 공부해오고 있다는 걸 알아.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먼저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 고맙게 생각해요. 상냥한 눈으로 바라봐주고, 자상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줘서 고맙게 생각해요.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이 감정이… 오메가라서 갖는 감정인지 오롯이 나로서 갖는 감정인지 아빠와 형을 제외한 알파를 처음 만나본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감정이 나의 감정이라고 믿어. 내가 당신들을 온전히 믿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기려 하는 것처럼.”
태섭이 웃었다. 발개진 눈으로 웃었다.
“우리 결혼… 각인 할래요?”
우성이 쥐어진 목걸이를 태섭에게 내밀었다.
“네가 걸어줘.”
태섭의 눈높이에 맞춰 우성이 몸을 숙였다. 목걸이를 받아든 태섭이 우성의 목 뒤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우성이 흑요석 밑에 달린 작은 영구치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명헌 역시 몸을 숙여온다. 목걸이를 채우고 나자, 명헌이 태섭의 손을 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다른 손으로 허리를 휘어감는다. 태섭의 눈이 둥글어지고, 명헌이 속삭였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믿을 때까지 수 십, 수 백, 수 천을 넘어 수 만번까지라도 얘기해줄 수 있어 뿅.”
좋아한다고. 이 감정은 흥미 따위가 아닌 진짜라고.
태섭의 입술 위로 명헌의 입술이 먼저 닿았다. 커지는 눈을 마주하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 네 모든 것을 내게, 우리에게 줘.”
뒤로 우성이 껴안아왔다. 앞은 명헌, 뒤는 우성의 사이에서 태섭은 뱀에게 감겨든 느낌을 받았다. 사냥감이나 먹잇감이 아닌, 그들의 소유욕을 한몸에 받는 반려로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해줄게. 네가 듣고 싶은 말만 해줄게. 넌 우리에게 너 하나만 주면 돼.”
우성이 속삭이며 태섭의 귀를 입술로 물어왔다.
그제야 태섭은 제 반려가 될 두 알파의 페로몬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린 겨울의 냄새였다. 형질인의 페로몬은 겹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명헌의 페로몬과 우성의 페로몬은 누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지독할 정도로 짙어지는 겨울의 냄새가 순식간에 태섭을 집어삼켰다. 태섭이 저도 모르게 양 팔을 뻗어 제 반려가 될 두 알파의 목을 감쌌다. 매끈하고 서늘한 검은 비늘 위로 금빛줄의 목걸이가 손끝에 걸렸다. 뱀의 꼬리가 태섭의 몸을 휘감았다. 조금씩 조여드는 감각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태섭은 제게 한치도 닿아오지 않았던 침대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길게 뻗어온 뱀의 혀가 태섭의 얼굴을 훑는다. 태섭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당신들에게 느껴질 내 페로몬은 어떤 향이야? 몸통을 조여드는 감각이 빠듯했다. 태섭이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생각보다 더, 나쁘지 않았다.
“…태섭?”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태섭이 눈을 감았다.
“어떡해. 너무 들떴더니 세게 조여버린 것도 몰랐어요!”
뱀으로 변한 것도 사실 인식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태섭이 축 늘어지자 놀란 명헌과 우성이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고 그를 안아들었다. 사람들이 보면 놀라서 턱이 빠질 정도로 우왕좌왕하다 뒷걸음친 종아리 뒤에 닿아오는 침대에 태섭을 그 위로 눕혔다. 명헌이 태섭의 옷을 들췄다. 조여든 곳곳이 푸르게 멍이 들어있었다. 명헌이 이마를 짚고 우성이 힉 하더니 멍 빠지는 연고를 가져오겠다며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연고를 바르기 쉽게 태섭의 옷을 벗겨내는 명헌도, 연고를 찾으러 가는 우성의 귀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 그와 잘 어울리는 여름의 향이 둘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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