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헌태섭TS우성/우성태섭TS명헌] 영애와 기사(9장)
* 리퀘스트 받은 태섭TS 연성
TS연성입니다. 남캐인 태섭이 여캐로 나옵니다. 생물학적 여자로 나옵니다. 뇨타 뇨태섭 뇨섭
TS 소재 불호인 분께는 열람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 이 사람은 TS 연성을 한 게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참고하십시오
태섭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카오루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해사하게 웃어보이는 딸의 모습에 카오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와락 끌어안는다. 태섭이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옅게 미소지으며 카오루를 마주 안았다.
“아라는요?”
“네가 아파서 요양하는 걸로 알고있어. 많이 보고싶어했으니 곧 만나게 해줘야지.”
카오루가 태섭의 침대 한켠에 앉았다. 손을 들어 조금 수척해진 뺨을 어루만진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딸의 손을 꼭 잡으며 태섭이 깨어나지 못한 동안 일어난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카오루의 설명을 듣던 태섭이 인상을 흐렸다.
“제가 괜히 일을 키운 것 같아요.”
“아냐.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어.”
“…어머니?”
카오루에게서 미묘한 기운을 읽어낸 태섭이 조심히 그를 살폈다. 카오루가 딸의 손을 다시금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귀족학교에 계속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 네가 잠들어있는 동안 자퇴처리를 해두었단다.”
“네?”
“네가 귀족학교의 수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걸 알고있어.”
“…정말 어머니는 속일 수 없네요.”
태섭이 혀를 내둘렀다. 카오루가 집사장을 돌아보았다. 눈으로 연신 태섭을 살피던 집사장이 카오루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태섭의 침실을 나섰다. 태섭이 도톰한 입술을 동그랗게 모을 무렵 집사장이 검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어머니?”
“원래는 귀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견습 기사 자격을 얻고 나면 주려고 했던 거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머니?”
카오루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지한 시선이 태섭을 향했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송 가문 기사 서임식을 진행할 거야. 실력이나 이론적인 부분만 따져봐도 넌 이미 정식 기사 서임을 받기 충분했으니까.”
“…!”
놀란 얼굴을 하던 태섭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외쳤다.
“네!”
송 가문의 기사 서임식은 황도에서 이루어지는 기사 서임식과는 달랐다. 화려하지도 않고, 실외에서 큰 규모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주인공은 서임받는 기사와, 기사를 서임하는 송 가문의 주인뿐.
송 가문 저택 홀에 꾸며진 것들을 모두 치워내자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메이드들이 태섭의 목욕 시중을 들고, 조금 자란 밑머리를 밀고 갈색의 긴 곱슬머리를 하나로 묶어냈다. 평소에 입고다니던 드레스가 아닌 은빛으로 빛나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집사장이 긴장 어린 표정의 태섭에게 다가가 그에게 명헌과, 우성이 받은 검보다 크기가 작은 검을 건넸다.
검을 건네받은 태섭이 검은 빛을 내는 검집으로부터 검을 뽑아냈다. 맑은 쇳소리가 울리고, 은빛의 갑옷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잘 벼린 검날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움직이는 대로, 검신에 태섭의 얼굴이 비쳐졌다. 태섭이 검을 찬찬히 훑었다. 검집, 검, 손잡이까지 송 가문 저택이 지켜내는 산맥의 몬스터들로 이루어져있음을 한 눈에 알아본다.
메이드들이 몸을 물리자 태섭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깔끔한 동작 끝으로 금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섭이 검집 안으로 검을 집어넣고 허리춤에 단단히 맨 후 집사장을, 그리고 메이드들을 보았다.
“가자.”
태섭이 카오루와 마주 선 상태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던 명헌이 마른침을 삼키고, 우성이 상기된 얼굴로 서임식을 지켜보았다.
“잘 보고 기억하세요. 아가씨께서 그대들의 기사 서임식을 하는 건 일생에 단 한번 뿐일테니까요.”
나지막한 집사장의 목소리에 둘이 자세를 바로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석적인 드레스차림도, 태섭의 취향대로 제작된 미니드레스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태섭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긴 곱슬머리를 땋아 말아올리는 것도 귀여웠지만 하나로 질끈 묶어올린 모습이 가장 태섭답다고 느껴졌다. 진지한 표정이 기사의 중압감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어느 새 둘은 산맥을 오르며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맡긴 채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상상에 빠져있었다. 반드시 지켜낼, 우리들의 영애.
태섭이 양 손으로 받쳐올린 검을, 검집 채 받아든 카오루가 익숙하게 검을 뽑았다. 태섭의 양 어깨 위로 한번씩 검을 눕혀 두드린다.
“…하여 송 가문의 송태섭은 지금부터 정식 기사임을 선언한다.”
카오루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어깨에 검이 닿을 때 고개 숙였던 태섭이 검이 검집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손 안에 말아쥐고 있던 이름이 수놓아진 흰 손수건을 카오루에게 건넸다.
“기사의 맹세를, 충성을 당신께 바칩니다.”
태섭의 맹세와 충성이 카오루를 향했다. 카오루가 옅게 웃으며 태섭의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명헌과 우성을 본다. 카오루와 눈이 마주친 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대의 맹세와 충성. 잘 받았다.”
명헌도, 우성도 울상지었다.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으니까. 태섭에게 기사 서임을 받고 함께 산맥 어딘가에 있을 고성을 향한 여정만 생각했지, 평생 한번 바친다는 기사의 맹세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집사장이 잇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이 기사 서임을 받을 때 아가씨께 기사의 맹세를 바치면 되지않습니까. 아가씨가 그대들에게 기사의 맹세를 할 순 없잖아요.”
“뿅…….”
“그건 그렇지만요…….”
카오루가 태섭이 건넨 손수건을 소중히 품더니 자세를 낮춰 태섭을 일으켜 세웠다. 진지한 딸의 시선을 따스하게 지켜보다 말했다.
“황도에서 송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보낼거야.”
“…!”
태섭이 눈을 크게 떴다. 마찬가지로 소식을 듣지 못한 명헌과 우성도 그대로 굳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들보다 한참 작은 집사장을 보았다. 집사장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제 주인들을 보고있었다.
“송 가문은 기사의 명예도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 이들에게 기사의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을 피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저도…!”
“너에겐 할 일이 있어.”
카오루가 명헌과 우성쪽을 보았다. 태섭 역시 카오루를 따라 둘을 본다. 다시 카오루를 보았다. 카오루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건 둘만 있을 때 얘기해줄게. 우리는 황도로부터 가문을 지켜내고, 나의 고향으로 갈 예정이다.”
“어머니의 고향…?”
“그래. 바다가 사면을 둘러싼 작은 섬이지. 네 아빠의 여행길에서 나를 만났다고 얘기한 적 있었지?”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비롯해 황도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나의 고향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 한다. 고향에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어. 섬으로 갈 배도 다 준비해뒀지.”
카오루가 태섭의 양 어깨를 짚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카오루의 손바닥으로 찬 기운을 흘려냈다.
“네가 할 일을 모두 끝내면, 모두가 기다리는 섬으로 오렴. 네가 섬으로 올 때까지 모든 기반을 다져놓으마.”
카오루가 주위를 훑었다. 태섭 역시 주위를 훑었다. 저마다 결연한 표정의 저택 사람들이 평소와 다른, 완전무장한 상태로 서임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송 가문에서 지내는 자들을 맡은 역할을 다하기 이전에 훌륭한 기사들이지. 우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황도의 군사 수준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리어 쉬운 상대지. 모든 것을… 송 가문의 기사들을 내세우면 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성장을 마저한 어리석은 이들이니.”
카오루가 태섭을 지나쳐 걸었다. 송 가문에 소속된 모든 기사들에게 선언한다.
“송 가문의 기사들은 들으라. 우리는 스스로 반납하고 황도의 손에 쥐어주었던, 자유라는 이름의 목줄을 탈환할 것이다.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영애를 희롱할 목적으로 기사도를 짓밟는 몰상식한 황도로부터 벗어나 기사도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떠날 것이다.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두려운 자는 지금이라도 떠나라. 말리지 않겠다.”
한 사람도 미동하지 않았다. 카오루가 송 가문에 소속된 이들을 하나하나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모든 것은 진정한 기사도를 위해. 실추된 명예를 살리기 위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싸울 것이다. 가자, 송 가문의 기사들이여! 우리의 자유와 미래를 위해!”
카오루의 외침에 기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사기가 오른 기사들이 공성전을 위해 바삐 흩어졌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카오루가 집사장을 보았다. 집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헌과 우성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멍하게 서있는 태섭에게 카오루가 손을 내밀었다.
“오렴. 네게 해줄 얘기가 있어.”
“…….”
태섭이 카오루의 손을 잡았다.
집사장을 비롯한 송 가문의 주 기사단이 모였다. 명헌과 우성에게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산맥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식물, 건드리면 안되는 독초, 식용 가능한 몬스터와 조리법 등도 가르쳤다.
즉석에서 산맥에서 마주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한 검술도 추가적으로 가르쳤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죄다 주워들으며 배우던 우성이 물었다.
“황도에서 내려오는 병력의 규모가 크다면 우리가 나서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주인 어른과 마법사님이 알려준 마법은 하나뿐이지만…….”
“우리가 더 강할텐데 뿅.”
둘을 보던 기사 한 명이 씩 웃었다.
“너희 역시 어엿한 송 가문의 가족이지만, 그건 우리가 해야하는 부분이란다. 꼬맹이들아.”
“내가 더 큰데요!”
“그래봐야 우리 눈엔 아가씨가 데려온 꼬맹이에 지나지 않아! 실제로도 덩치만 산같을 뿐이지 하는 거보면 철부지들이구만!”
기사단이 맞장구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성이 아니라며 빽 소리치자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우씨…….”
“아가씨도 그렇고 다들 우리를 너무 어린애 취급해용.”
불만어린 명헌의 목소리에 집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그대들이 어리게 보이니까요. 아가씨께서도 그러니 동생 취급하시는 거겠죠.”
태섭이 거론되자 명헌과 우성이 눈에 띄게 침울해했다. 낄낄대던 기사단이 둘을 달랬다.
“별 수 있냐? 너희를 직접 데려오신 분인데. 너희가 아무리 곰만 해봤자 아가씨에게는 천년만년 동생이야.”
“그리고 아가씨께서 연애전선에 흥미를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시잖나! 그런 상태에서 어린애 둘을 데려왔으니 남자로 보시겠어?”
“이봐, 그러다 애들 울겠어!”
기사단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죽상을 하고 있는 둘에게 지나가던 메이드가 쐐기를 박았다.
“아가씨께서는 두 집사가 잘 생겼다는 것도 인식 못 하시던데요?”
어! 운다! 우성이 운다! 야, 명헌아. 우냐? 울어?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다. 웃을 수 없는 단 둘을 제외하고. 송 가문 모두가 아는 것을 아가씨 혼자 모른다는 게 서글퍼졌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울상을 지었다가. 명헌도, 우성도 말없이 웃고 떠드는 기사단과 저택 사람들을 보았다. 입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어엿한, 송 가문의 가족들… 이라고.
“…그 상황이 오면 선택을 해야할 거야.”
“…….”
카오루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딸을 보았다. 태섭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명헌과 우성이 태섭에게 품고있는 마음을, 진심을 안 이상 태섭에게 진실을 알려야만 했다. 그들조차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그들의 정체에 대해. 그리고 산맥으로 떠나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명헌과 우성에게는 말하지 않은 부분들을.
“운명을 바꿀 순 없어도 피할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든 비틀어내면 방법이 생길거라 믿었지. 실제로 여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걸로 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섭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카오루를 보았다. 평생을 봐왔지만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태섭에게 있어 카오루는 굳센 어머니요, 스승이자 송 가문을 지키는 바다같은 존재였다. 태섭이 카오루의 손을 잡았다. 카오루가 태섭을 보았다.
“어머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저를, 아라를 만날 때까지 운명을 피할 수 있었잖아요. 그거면 돼요. 어머니께서는 충분히 할 만큼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그 운명이 저의 몫이라면. 이제는 제가 해결할 차례인 거죠.”
“태섭아.”
“명헌이와 우성이가… 멸망의 노래에 집어삼켜지지 않도록 제가 잘 챙길게요. 산맥의 고성을 찾아, 이 아이들이 하고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도록. 제가 꼭 막을게요.”
카오루는 세상의 멸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기에는 살아남은 송 가문의 두 딸과 송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의 숨이 한 순간에 스러지는 것 또한 보고싶지 않았다. 얄궃은 운명을 원망한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기에.
멀리서 황도에서 보낸 군사들이 보였다. 망원경으로 병력의 수를 헤아리던 이가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와 상황을 보고한다. 집사 의복을 벗어던지고 은빛의 갑옷을 입은 집사장, 아니 주 기사단의 기사단장 이달재가 앞으로 나섰다. 아직 어린 아라는 저택 뒤에 숨겨둔 마차에 아라의 담당 메이드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달재가 카오루의 말을 떠올렸다.
“달재야.”
“네, 주인어른.”
“내게 바친 기사의 맹세를, 아라에게 이어주어도 되겠니?”
“…….”
“내가 마력을 억제할 필요가 없어진 이상, 나를 위한 기사단은 주 기사단으로 충분해. 너는 이제부터 내가 아닌 아라를 위한 기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구나. 사실 넌 태섭이에게 기사의 맹세를 바치고 싶었겠지만…….”
“…아가씨께는 이제 저보다 강한 이들이 함께일 테니까요.”
달재의 말에 카오루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달재가 말했다.
“저의 맹세와 충성은 송 가문을 위한 것입니다. 송 가문의 새로운 시작의 별이 될 아라 아가씨께, 기사의 맹세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네게는 매번 고맙고 미안하구나.”
카오루의 말에 달재가 고개를 젓는다.
“갈 곳 없이 떠돌아다니던 전쟁 고아였던 저를 데려와 이만큼 키워주신 큰 어르신의 은혜를 아직 다 갚지 못했는 걸요. 저를 형제처럼 여겨주신 큰 도련님도 그렇고, 태섭 아가씨도 절 친한 친구처럼 봐주셨죠. 이 은혜는 제가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모자랄 겁니다. 저의 충성은 오로지 송 가문을 위한 충성입니다. 아라 아가씨를, 제 목숨처럼 여기고 지키겠습니다.”
“…….”
멀리서 황도의 군사가 진격한다는 보고에 상념에서 깨어난 달재가 투구를 쓰며 뒤에 서있는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기사도를 잊은 적들에게 진정한 기사의 정신을 보여줍시다. 모든 것은, 송 가문의 자유를 위하여.”
태섭과 이야기를 마친 카오루가 명헌과 우성을 따로 불렀다. 집사가 입는 정장이 아닌, 태섭과 마찬가지로 경량화 마법이 걸린 갑옷을 걸친 둘을 보며 카오루가 말했다.
“곧 전투가 시작될 거야. 태섭이에게는 소란을 틈타 숲으로 들어가라 일러두었다.”
“…….”
“…….”
명헌과, 우성의 얼굴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 카오루가 그 모습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희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겠지.”
“…세상의 멸망을 부르는 존재, 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성이 머뭇거리고, 명헌이 바로 대답했다. 우성이 명헌의 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루가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하나였다 둘로 나뉘어진 만큼 그 힘도 분산되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애초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니 너희는 최대한 세상이 부르는 멸망의 노래에 삼켜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해. 너희가 각오를 보였던 것처럼, 너희가 새롭게 주인으로 모실 태섭이를 항상 생각하길 바라.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을 유지하도록 해. 태섭이가 위험에 빠지는 순간이 너희가 흔들릴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
잠시 숨을 고르던 카오루가 말을 이었다.
“산맥의 고성을 찾으면, 그 안에 너희 존재의 힘을 봉인하는 방법이 적힌 자료들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자료들은 세계가 멸망을 반복하면서 멸망의 존재에 대응하기 위한 모든 종족이 힘을 모아 봉인의 마법이 걸려있지. 멸망으로 인해 자료가 소실되지 않도록.”
카오루가 명헌의, 그리고 우성의 손을 차례대로 잡았다. 카오루보다 큰 이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간 너희에게 냉담하게 굴었던 것을 사과할게. 너희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나는 너희가 태섭이에게 위협이 되면 너희가 본래의 모습으로 각성하기 전에 언제든 죽여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한다는 생각 뿐이었어. 너희가… 내 딸을, 태섭이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느끼기 전까지.”
카오루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멸망을 부르는 존재가 멸망을 일으키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종족 연합이 그 존재를 물리쳤기 때문에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어. 세계가 멸망을 원하기에, 너희는 세계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존재이기에 협상의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았지. …세계가 멸망을 부르는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협상은 의미가 없었겠지만.
하여 나는 너희에게서 감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태섭이에게 발견되어 보살핌을 받으면서 환경적 변화에 의해 각성이 늦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너희는 태섭이를 만난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카오루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당황한 둘이 꾸벅 카오루에게 고개 숙였다.
“이기적인 태세전환이라는 것은 알고있어. 하지만 너희가 태섭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심이니까. 태섭이를 지킬 수 있는 것도 너희 뿐이니까… 부탁할게. 소중한 내 딸을 반드시 지켜주렴.”
카오루의 말에 명헌이 반드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우성은 따라 대답하면서도 입술을 우물거린다. 카오루가 그를 보자, 우성이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놀란 얼굴을 하던 카오루가 웃었다. 태섭이 꼭 닮은 미소였다. 카오루가 팔을 벌렸다. 태섭을 보듯, 아라를 보듯 따뜻한 미소로 둘을 보았다.
“이리오렴.”
커다란 덩치 두 덩이가 카오루에게 안겨들었다. 카오루는 다 품어지지도 않는 등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필요에 의해 너희에게 냉담한 모습을 보였지만, 너희는 이미 송 가문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알고 있습니다.”
“나 대신 다른 이들이 너희를 잘 챙겨주었으리라 믿어.”
“다들 저희를 가족처럼 여기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죽지 마세요, 아무도.
모두 살아서, 주인 어른의 고향 섬에서 다시 만나요.
함성이 울려퍼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택 발코니에 선 카오루의 양 손에서 금빛 마력이 넘실거렸다. 황도의 마법사들이 쏘아보낸 마법을 방어벽을 쳐 막아낸다. 달재를 필두로 송 가문의 주 기사단이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전투 메이드들 역시 빠르게 적진을 파고들어 암기를 날리며 전투에 임했다.
“…….”
“아가씨.”
못 박힌 듯 걸음을 쉬이 떼지 못하는 태섭의 등을, 명헌이 가볍게 밀었다. 저택 뒤에 숨겨진 아라가 타고있는 마차로 가 아라를 품에 꼭 안았다.
“언니, 언니. 우리 어디 가? 엄마는?”
“…어머니는, 곧 오실 거야. 아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언니는?”
태섭이 저택 너머로 들려오는 큰 소리에 아라의 양쪽귀에 손바닥을 올리며 애써 웃어보였다.
“언니는, 아라가 좋아하는 선물 사러 가. 그동안 갖고 싶다고 했던 것들… 다 적어놨거든. 한꺼번에 사려고.”
“정말?”
아라가 활짝 웃었다. 태섭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으며 아라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응. 그러니까 메이드와 함께 먼저 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해. 알았지? 어머니도, 나도 아라 좋아하는 것들 잔뜩 구해가는 거라서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잘 기다릴 수 있지?”
“많이 오래걸리면… 싫은데…….”
“…그렇게 오래 안 걸려. 걱정하지 마.”
“응.”
아라가 팔을 뻗었다. 태섭이 아라를 꼭 끌어안았다. 뺨에 갑옷이 닿았는지 차갑다며 꺄르른 웃는 아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라를 잘 부탁해.”
“예, 아가씨. 걱정 마세요.”
아라를 담당하는 메이드가 태섭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꼭 오셔야 해요.”
“…그래.”
마차가 조용히 출발했다.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태섭이 제 뒤에 선 명헌과 우성을 보며 말했다.
“가자. 산맥으로.”
예전처럼 정찰이나 안전의 의미가 아니었기에 셋은 빠른 속도로 숲을 질주했다. 태섭을 중심으로 양 옆에 명헌과 우성이 나란히 달렸다. 검집에서 검을 뽑은 이들이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을 모두 베어넘기며 위로, 더 위로 향했다. 숲 구간이 끝났다는 듯 숲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나무와 식물들이 그들을 반겼다. 태섭이 주위에 포진된 기척을 느끼곤 속도를 늦추었다. 떠나기 하루 전 카오루가 가르쳐준 마력 감지로 명헌과 우성이 태섭이 기척을 느끼는 반경보다 훨씬 넓은 반경까지 몬스터들의 존재를 느꼈다. 명헌이 먼저 마력을 발산시켰다. 약한 몬스터들이 부리나케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태섭이 그를 돌아본다. 명헌이 말했다.
“기선제압은 최고의 공격 뿅.”
태섭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씩 웃는다.
호기롭게 출발은 했지만 산맥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고성의 존재가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산맥을 조사하면서 길을 표시한 지도를 펼친 태섭이 여태 지나온 체크포인트에 X표시를 했다. 산맥의 밤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야영 준비를 하며 불침번을 정했다. 근처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오고, 식용 가능한 몬스터를 잡아 먹을 수 있는 부위를 정리했다. 우성이 손 끝에 마력을 집중시켜 마력을 에너지로 변화시키자, 나뭇가지 사이로 불꽃이 일더니 이내 불씨가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명헌이 손질해온 몬스터의 고기를 굽자 금새 맛있는 냄새가 퍼진다.
“냄새 맡고 다른 녀석들이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아마 안 그럴 거에요.”
“어째서?”
“이런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한 자 주위에 얼쩡거리면 안 될 테니까요.”
우성의 말에 태섭이 주위를 경계했다. 우성이 작게 웃었다. 태섭은 카오루와 달리 마법을 쓰지도, 마력을 느끼지도 못 했다. 그렇기에 명헌이나 우성은 거리낌없이 마력발산을 통해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세상에 멸망을 불러 일으킬 존재인데, 그 누가 함부로 나서겠는가.
“지금은 좀 괜찮으신가용.”
“응?”
“상처요.”
“아아.”
귀족학교에서 입은 상처를 걱정하는 것을 깨달은 태섭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크게 흉이 남긴 했는데,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정식 기사들과도 충분히 견줄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걸 알게되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때는 왜 못 나서게 하셨어요? 저희에게 맡겨도 됐을텐데…….”
우성의 볼멘소리에 태섭이 쿡쿡 웃는다.
“가문의 일이었잖아. 내가 나서야지 누가 나서? 너희가 나를 지키는 수행기사의 목적으로 학교에 들어온 건 맞지만,”
타닥 소리를 내며 빛나는 불빛에 비쳐진 얼굴에 후회는 보이지 않았다.
“수행기사에게 맡겨도 되는 싸움이 있고, 맡겨서는 안 될 싸움이 있어. 내게는 그래. 그 자는 송 가문의 기사도를 더럽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명예를 실추시켰지. 짓밟힌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건, 가문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그 전투에서 기사들을 모두 쓰러뜨림으로써 명예를 되살렸고, 어머니는 황도에서 내어준 댓가를 당연히 받아들이신 거고. 황도는 그 목숨 하나로 실추된 명예를 퉁치기엔 너무 양심없던 거고.”
“황도를 모두 불태우고 싶다고 생각해보진 않으셨어요? 송 가문을 대하는 황도의 태도만 봐도 멸해도 마땅했을텐데.”
“아가씨께서 황도를 불태우라는 그 한마디만 하신다면. 그대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뿅.”
“…….”
태섭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둘을 보았다. 태섭으로서는 처음 마주한, 본연의 눈을 한 둘을 보고는 흠칫한다. 이내 주먹을 쥐고 말했다.
“그리 쉽게 흔들릴 각오라면 황도와 격전을 치루고 있을 송 가문에게 돌아가 그들의 힘이 되어주거라. 너희가 견뎌내야할 무게도 이겨내지 못 하면서 어찌 나의 기사가 되고자 한단 말이냐.
“……!”
“……!”
움찔하던 둘이 태섭이 알고있는 평범한 눈으로 돌아왔다. 태섭의 눈치를 살핀다. 태섭이 식사를 마다하고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명헌이 태섭의 섭취량을 확인하고는 안절부절했다.
“아가씨. 어디가십니까. 식사도 제대로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삐뇽…….”
“일 없다. 내게 상념에 빠질 시간이 없다는 걸 알려준 좋은 시간이었다. 그건 고맙구나.”
“아가씨, 아가씨.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끼니를 거르지 말아주세요.”
“…….”
우성도 울상지으며 태섭을 붙잡는다. 태섭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엉거주춤한 자세의 둘을 내려다 보았다.
“너희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테지. 그렇지 않느냐?”
“삣, 아닙, 뿃,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가씨를 만난 것은 저희의 운명이나 다름 없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아가씨가 다치는 걸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 순간이 너무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다시는 유혹에 휩쓸릴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
안절부절하는 둘을 보던 태섭이 카오루의 말을 떠올렸다. 이들은 세계가 불러온, 멸망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귀족학교 몬스터학 시간에 배운 블랙드래곤의 정체가 바로 이들이라고 했다. 한 품에 둘을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아이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에 놀라면서도, 태섭은 이들이 순식간에 성장을 이루어냈을 때와 귀족학교에서 원래라면 시비조 정도였을 폭력의 수위가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것에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가 멸망을 위해 불러낸 존재가 멸망을 일으키질 않으니 주변으로 하여금 각성할 수 있도록 자극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명헌과 우성이 현재 자신을 많이 따른다는 것을 세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괴롭히는 게 둘에게 가장 좋은 자극점이라고 판단해 일을 자꾸 키운 것이리라.
태섭은 명헌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만난 게 운명이라고 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 알려준 카오루의 뒷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들이 말하는 운명이 무엇인지, 이 아이들은 알까.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며 사정사정하는 둘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 일갈한 태섭이 자리에 앉았다. 눈에 띄게 안심한 명헌이 태섭이 손에서 놓은 고기를 다시 데우고 우성이 산맥 근처에 흐르는 냇가에서 깨끗한 물을 담아와 태섭에게 건넸다. 태섭은 그런 둘을 보며 마음을 굳힌다.
산맥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귀족학교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없이 봐왔던 산맥은 그 위용이 대단할 정도로 컸기에 한 달이 지나도 고성을 찾지 못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헌과 우성은 그러지 않겠노라 하면서도 잊을만 하면 멸망을 부르는 노래에 휩쓸려 태섭에게 멸망을 명하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태섭은 호통을 치거나, 머리를 쥐어박으며 정신 차리라고 혼을 냈다. 한번씩 명헌의 얼굴 위로 파충류의 검은 비늘이 비치기도 했고, 우성의 다리 사이로 두텁고 검은 꼬리가 흔들리기도 했다.
고성을 빨리 찾아야 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묻자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았던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지금은 귀에 대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명헌과 우성이 눈에 띄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태섭이 아무도 모를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자다깨어 잠결에 명헌과 우성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태섭의 귀걸이에 흡수되는 모습도 몇 번 목격했다. 처음 태섭에게 귀걸이를 선물했을 때 카오루는 태섭을 지켜줄 거라고 했고, 이후 기사 서임식이 끝나고 단 둘이 얘기할 때 귀걸이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그 아이들의 검은 마력은 네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건 블랙드래곤의 힘을 흡수하여 정화할 수 있는 정화석으로 만든 거야. 정화된 마력은 보석에 내재되어 있다 네가 위험하지는 순간에 보호마법을 펼치게 되어있지.’
산맥의 위를 향할수록 쏟아지는 몬스터들의 공격 사이로 틈이 노출될 때 귀걸이에서 시작된 얇은 막이 태섭을 감싸안고 심한 부상을 경한 부상에 그치도록 막아낸 게 여러차례였다. 마력이 소진되고 그 날 밤이면 태섭이 보았던 것처럼 넘실대는 검은 마력을 흡수해 태섭을 지킬 마력으로 변하는 것이다. 검은 마력은 갈수록 커져가, 귀걸이가 마력을 흡수하는 시간도 점차 짧아져갔다. 명헌과 우성이 지쳐가면 지쳐갈수록.
산맥에 들어온지 47일 하고 9시간이 경과했다. 저택은 보이지 않은지 오래였다. 태섭은 끙끙 앓는 명헌과 우성을 보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눈조차 뜨기 힘들어해 위험한 순간이 늘었다. 고성을 찾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더뎌졌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태섭이 귀걸이를 빼 명헌과 우성 사이에 놓았다. 검은 마력이 미친듯이 귀걸이로 빨려들어갔다. 금빛을 발하며 위로 쏘아진 마력이 금빛 가루로 흩날려 셋을 모두 감쌀 정도의 크기를 가진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물소리를 듣고 자리잡은 덕에 태섭이 물을 담아오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헌과 우성에게 차례로 물을 먹인다. 그들 주위가 후끈했다. 태섭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직감적으로 고성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세계는 이들이 고성으로 향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태섭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멸망을 재촉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거겠지. 둘 사이에 자리잡고 앉은 태섭이, 땀에 젖은 둘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잘게 자른 고기를 먹여가며 보살피고, 겨우 정신 차린 둘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태섭이 천천히 움직였다. 고성이 가까워진다고 판단한 것은 둘의 급격한 컨디션 저하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몬스터의 습격이 거의 전무할 정도로 줄어든 것도 있었다. 함부로 다가갈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덕분에 명헌이든, 우성이든 앓아눕는 동안에 공격받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었다.
태섭은 저택보다 큰 규모의 고성을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인간이 살기엔 너무나도 컸다. 태섭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부축하고 선 둘을 돌아보았다.
“…….”
말없이 둘을 보던 태섭이 상태를 한 번더 확인하고는 고성의 문을 열었다. 손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된 고성의 외부와는 달리 안은 깨끗했다. 누군가 살고있는 것마냥 곳곳에 촛불이 켜져있었다. 태섭이 주위를 훑으며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산맥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인간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너희는 여기에서 기다리도록 해. 너희가 쉴만한 곳을 찾아보고 올 테니까.”
“아가씨…….”
“삐뇽…….”
태섭을 따라나서고 싶어하는 마음과 달리 기다렸다는 듯 몸이 무너져내린다. 태섭이 둘을 살피고 바로 눕히더니 귀걸이를 빼 둘 사이에 놓았다. 금빛 방어막이 둘을 감쌌다. 명헌이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귀걸이를 가져가라는 뜻임을 파악한 태섭이 모른척 뒤돌았다.
내부는 깨끗했다. 방치된 외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고성 곳곳에 자리한 방도, 지금 걷고있는 복도도 규모가 컸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다녀도 될만큼 컸다. 보존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걸까 하던 태섭이 탄성을 내질렀다. 고성은 멸망에 대응하기 위한 자료가 모인 곳이었다. 멸망의 불길에도 사라지지 않으려면 복잡한 마법식이 필요했다. 태섭이 깨달았다. 이 고성 전체가 블랙드래곤의 힘을 잠재울 자료를 보호하는 마법 그 자체였다.
태섭의 걸음이 빨라졌다. 곳곳을 살피고 또 살폈다. 누군가의 드레스룸에 도착한 태섭이 걸음을 멈췄다. 새 것같은 드레스들이 나열되어있었다. 드레스룸 옆에 있던 문을 열자 셋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큰 침대가 있는 침실이 나타났다. 침실과 드레스를 한참 보던 태섭이 자리를 떠났다.
고성을 한창 뒤졌다. 고성의 가장 안쪽만이 남았다. 모든 방들은 그들이 들어온 입구의 홀과 연결되어있었다. 태섭이 고성 안쪽에 위치한 거대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무언가와 눈을 마주쳤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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