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른 (시리즈)

[명헌태섭TS우성/우성태섭TS명헌] 영애와 기사 (7장)

* 리퀘스트 받은 태섭TS 연성 

TS연성입니다. 남캐인 태섭이 여캐로 나옵니다생물학적 여자로 나옵니다. 뇨타 뇨태섭 뇨섭 

TS 소재 불호인 분께는 열람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 이 사람은 TS 연성을 한 게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참고하십시오

** 일상을 방해할 정도로 연성욕구 생기는 거 아니면 일 벌려놓은 시리즈 하나씩 완결시킬 때까지 단편은 자제할 예정…

**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유혈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태섭은 여전히 명헌과 우성이 귀족학교에 같이 가는 것도, 수행기사 신분이지만 자처하는 역할이 수행원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카오루에게도 얘기해봤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기에 그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태섭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카오루와 동생 아라에게 인사를 건네고, 학교에 갈 때마다 명헌과 우성에게 같은 주의를 몇 번이고 늘어놓는 집사장과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마차로 향했다. 결코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마차로 향했건만, 서두르는 묵직한 발걸음 몇 번에 따라잡히고 만다.

“아가씨! 제가 에스코트할게요!”

먼저 도착한 우성이 마차 문을 열고 태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섭이 우성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우성은 원래도 명헌보다 키가 더 컸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키가 더 커져있었다. 태섭이 아무리 키 크는 성분이 포함된 음식을 많이 먹어도 우성의 성장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과 인외니까 당연할텐데도 태섭은 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로 준비해봤어용.”

명헌이 미묘하게 들뜬 얼굴로 피크닉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명헌은 처음부터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아 주위에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 이였다. 저렇게 들떠하는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태섭이 피크닉 바구니와 명헌을 번갈아보았다. 우성이 위로 자라면 명헌은 옆으로 자라는지 메이드들이 매번 옷을 새로 맞추느라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정작 메이드들은 ‘아가씨들은 성장이 빠르지 않으셔서 옷 지을 일이 없었는데 이 아이들 성장이 빠른 덕분에 여한없이 만들어보네요!’ 라고 즐거워했지만, 태섭은 못 들은 척 했다.

위로 자라나 옆으로 자라나 그것은 더이상 태섭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조금은 중요하지만. 앞으로도 더 클테니까! 중요도를 그리 높이지 않아도! 되겠지만! 동생들이 서운해할까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학교에 같이 갈 때마다 곤란했다.

영애들이 자꾸 둘에게 추근대고 있었으니까. 송 가문이 기사 가문으로서 황도에 이바지한 바가 얼마나 많은지 익히 들어온 귀족 자제들인지라 미쳐돌아서 대놓고 나서진 않았지만… 우성의 시선에 못 이겨 에스코트 받아 마차에 오른 태섭이 창을 내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둘이 없을 때 기사를 꿈꾸는 태섭에게 영애답게 굴라며 같잖은 가르침을 주는 버릇없는 영애들에게 시비걸리는 거야 일상이니 괜찮았다. 카오루의 지침을 그대로 따라 말이면 말로, 몸이면 몸으로 싸워 져본 적도 없다. 명예의 크고 작은 상처가 남을 지언정. 이겼으니 상관 없었다. 문제는 태섭이 혼자 있었기에 머리 풀고 광인처럼 달려들어도 됐던 거지, 가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귀족 학교에서 태섭의 편은 없었다. 학교 선생들도 귀족들의 일이기에 쉬쉬하기 바쁘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싸움을 말릴 사람도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환경 속에 태섭 홀로 적응하며 지내왔다. 학교만 무사히 졸업하면 정식으로 기사가 될 수 있게 허락하겠다고 카오루가 얘기하지 않았다면 진작 그만뒀을 곳이다.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기사수업을 받고, 귀족 학교에서 기사 수업을 받고 졸업하면 견습 기사 자격을 얻기 때문에 태섭이 여태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것이었는데.

홀로 공격받는 태섭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태섭이 모두 쳐냈다. 화살이 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자신과 엮였다가 괜한 여지를, 꼬투리를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홀로 감내하면 될 것이었는데. 당장 명헌과 우성이 처음 학교에 나온 날, 그렇게 들떠서 기뻐하던 얼굴에 미묘한 금이 가던 것을 떠올린 태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명헌이든, 우성이든. 분명 누구에게든 불똥이 튈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길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말도 안되는 헛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었다. 어제 한바탕 했던 영애는 질이 좋지 않은 귀족 자제들과 엮여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어 자칫하면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태섭은 기사 수업에서 남학우들과 수업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들 중에 태섭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열하게 대련하면서 몰래 숨겨둔 모래를 뿌린다던가 대련을 관전하는 학생들쪽에서 발을 건다던가 하는 유치한 수를 쓰지 않으면 예상 외적으로 부상을 입을 일도 없었다. 그런 부상을 입었더라도, 숨기면 된다. 진실은 카오루만 알면 된다. 골절 등의 큰 부상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태섭이 심란하게 명헌과 우성쪽을 쳐다보았다.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을 느꼈는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태섭을 본다. 눈을 마주치자 명헌은 고개를 갸웃하고, 우성은 사람 좋게 웃어보인다. 그걸 보던 태섭이 다시 마차의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라도 밀게 해버릴까…….”

완전 길러서 얼굴을 가려버리는 게 나은가? 태섭에게 미의 기준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영애들의 반응이나 메이드들이 매일같이 -아가씨, 명헌 집사나 우성 집사나 한 눈 팔지 않게 잘 보셔야할 거에요~! 예? 왜냐고요? 잘 생겼잖아요! …아가씨? 아가씨? 왜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아가씨……?- 잘 생겼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거였다.

“아. 아가씨 머리가 헝클어졌어요. 다시 빗어드려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이번에 새로 배운 스타일로 해볼게요!”

태섭이 우성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굽이 낮은 구두를 벗고 마차위로 다리를 올리자 명헌이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태섭의 옅은 노란색의 드레스 치맛자락을 정돈했다. 본보기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평소 혼자 다녔다면 무릎 위까지 오는 미니 드레스를 입을 것을 정석대로 입었더니 불편한 게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우성의 손길에 하나로 묶여있던 갈색의 긴 곱슬머리가 허리까지 굽이쳤다. 우성이 조심스럽게 태섭의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양 쪽으로 나누어 땋기 시작했다. 길게 땋인 머리카락을 양쪽 귀 근처까지 말아올려 머리장식으로 고정한다. 뒷덜미쪽으로 흘러나온 잔머리까지 정리하면, 됐다. 우성이 중얼거린다. 옅게 비치는 마차 창문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꾸며진 제 머리를 보던 태섭이 물었다.

“이게 어울려?”

“귀여운데용.”

“음! 잘 됐어요! 다들 깜짝 놀랄걸요?”

“…….”

뭐 귀족 자제들은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대놓고 웃지 않아야할텐데. 아니면 저 녀석, 분명 상처받을 거라고.


“…….”

아. 어째서 불안한 생각은 여지없이 들어맞을까. 태섭이 뻐근해오는 뒷목을 주물렀다. 태섭이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놀란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게 기가 찰 정도였다. 왜 기가 차냐고? 당연히 이렇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영애, 드디어 영애로써 외모를 가꿀 생각이 들었나요? 그것 참… 귀엽네요.”

“지금에 와서 외모를 가꿀 생각을 한 이유가 있나요? 왠지 저는 알 것 같은데 말이죠.”

“아아. 역시 수행원들을 데리고 온 이유가 있던 거죠? 잘 생긴 수행원들 데려오면 기를 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영애들을 보니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땀냄새 풍기는 기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나보네요!”

“부탁 한번 해보실래요? 영애들의 티타임에 끼워달라고요! 영애들이 얘기하는 방식을 알게 해달라고!”

“그래도 이렇게 하니까 귀여워 보이긴 한데?”

“어때, 영애. 오늘 수업 마치고 학교 근처 마을에 나와 함께 나가보지 않겠어? 물론 저 수행원들은 빼고 우리끼리 말이야.”

“…….”

태섭이 우성을 힐끗 보았다. 이번에는 아가씨의 뒤에 있지 않을 거에요! 라고 호기롭게 얘기하며 앞장서더니 태섭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아냥과 저질스러운 멘트에 우성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행원의 태도는 주인의 얼굴, 수행원의 태도는 주인의 얼굴, 수행원의 태도는 주인의 얼굴…….”

“…….”

즈려문 잇사이로 내뱉는 작은 목소리에 태섭이 명헌을 보았다. 뒷짐 진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태섭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래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커다란 두 동생의 뒤에 고개를 잠시 숙이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턱을 들고, 눈썹을 치켜올린다. 잘게 떨리는 주먹을 쥐어내고 숨을 고르며 동생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선다. 당당하게.

“귀족에게 외모가 중요한가? 인성과 성격이 중요하지. 그리고, 명성도.”

명헌과 우성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태섭이 입꼬리를 올렸다.

“가십거리에 모여들지 말고, 담당하는 영지 백성들의 삶을 널리 살피고. 남을 험담하기 이전에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필요하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선입견을 기르라고 학교에 어른들이 보낸 게 아닐텐데?”

몇몇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피하고, 남은 이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진다. 태섭이 비웃는 소리를 대놓고 내며 그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대들은 학교에서도 이렇게 생활하는 걸 보면, 좋은 후계자가 되긴 그른 게 아닌지?”

명헌과 우성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는지, 평소 태섭이 혼자 학교를 다닐 때보다 귀족 자제들이 이상하게 선을 넘고 있었다. 태섭은 그 부분을 기이하게 여기며 말을 이었다.

“수행원의 태도가 주인의 얼굴이 되기에 수행원들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듯, 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그대들의 태도가 당신들 부모의 얼굴이 된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다들 저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부모에게 오늘 어떤 소문이 있었고, 어떤 정보가 돌았고… 그런 보고를 올리지 않나? 만약 오늘 그대들이 내게 희롱했던 말을 보고 올린다면… 그 부모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참 궁금하긴 해?”

“말 조심하라! 작위도 없는 기사 나부랭이 가문이 어디서 함부로…!”

“하! 작위도 없는 기사 나부랭이?”

삐딱하게 건들거리던 태섭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명헌과 우성이 빠르게 변한 태섭의 날카로운 분위기에 숨을 삼켰다.

“말 조심해야하는 건 네 놈이다! 송 가문의 기사들이 황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몬스터들이 쏟아지는 산맥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목숨걸고 싸우는 걸로 모자라 타국과의 전쟁이 터질 때마다 가장 많은 승기를 가져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송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가!”

태섭에게서 흘러나오는 매서운 분위기에 영애들의 얼굴이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태섭에게 소리치던 귀족 자제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선이 제게 몰리자 악을 쓰듯 외친다.

“그래봐야 황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들 아닌가! 네 아비와 장남이 그렇게 개죽음 당한 줄 모르는가! 작위도 없는 기사 나부랭이 주제에! 황족이 대신 죽으라면 죽는 국가의 개 주제에! 어딜 감히!”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태섭이 입술을 달싹였다. 명헌이 태섭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아까부터 박동이 빨랐던 태섭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게 느껴졌다. 명헌의 눈이 순간 흰자위가 검게, 검은 홍채가 노랗게 물들며 그 안으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것과 같은 동공이 드러났다. 도톰한 태섭의 입술보다 더한 두께의 입술이 열림과 동시에 명헌의 다리를 감싸쥐는 무언가에 시선을 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우성에게로.

- …….

- …….

명헌과 같은 모양으로 눈이 변한 우성이, 파충류의 것과 같은 검은 비늘을 가진 꼬리로 명헌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수행원의 태도는, 주인의 얼굴. 수행원의 태도는… 주인의 얼굴. 수행원의 태도는…….

둘의 시선이 다시 태섭을 향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단 한 마디면 됐다.

하나였다 둘로 나뉜 블랙드래곤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부서지는 세계가 부르는 멸망의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고, 들려온다 한들 주인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미련한 짓을 할 생각도 없었지만. 당신의 한 마디라면. 모두 죽이고 불태우라는, 그 한 마디만 한다면.

“…하아…….”

태섭이 가늘게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태섭의 작은 심장은 여전히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 그렇구나. 너구나. 그 황족의 피를 가진 놈이.”

큭큭 웃는 소리에 황족 자제가 한 걸음 물러섰다. 태섭이 드레스 치마의 우측을 단박에 찢어냈다. 일부 영애들에게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남자 귀족 자제들의 숨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벅지의 가터벨트 위로 자리한 태섭의 팔뚝만한 길이의 검을 뽑은 태섭이 그를 향해 겨누었다. 황족 자제 주위 인파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가족들은, 전쟁을 함께 했던 기사들은 내게 말했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국가를 위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영웅이었다고. 하지만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진실을 들었다. 그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황족의 자제를 노려보는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전쟁에 참가한 황족의 친척 가문이 있었다. 그들은 기사와 병사들 뒤에 숨어 명령질만 하다가, 사령부까지 쳐들어온 적군의 모습에 겁을 먹고 피를 뒤집어 쓰고 나라를 위해 싸우던 기사들에게 그림자가 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이미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이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면, 다른 기사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피를 나눠준 빌어먹을 어른들은, 기사도를 저버리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여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그림자가 되길 종용했다. 권력과, 기사도를 들먹이면서. 명령 불복종 시 송 가문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뻗을거라는 말에!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네가 말하는 그 빌어먹을 개죽음을 맞이했고! 함께 싸우던 기사들까지 잃지 않아도 되는 목숨을 잃었다고!”

태섭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황족 자제가 두 걸음 물러났다. 태섭이 검을 겨눈 팔을 뒤로 당겨 그대로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세였다.

“너는 네가 나를 희롱한 것에 대한 지적으로 흥분하는 걸로 모자라, 나라의 영광을 위해 목숨 바친 기사들까지 능멸했다. 사람 많은 이 곳에서 네가 네 스스로를 무덤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나와 내 가문의 명예까지 능멸했지. 내가, 네가 황족 친척이라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지 않아야하는 이유가 있나? 있다면 제대로 설명해야할 거야. 나는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개죽음 소식을 들었던 여덟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만을 고대해왔거든.”

“이, 이…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저 미친 계집을 치지 않고!”

황족 자제의 침 튀기는 외침에 태섭이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머뭇거리던 황족 자제의 수행원이자 수행기사들이 검을 꺼내들었다. 태섭을 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태섭은 그 표정을 잘 알았다. 머뭇거리며 검을 뽑는 이들을 잘 알았다.

저들은 송 가문에서 기사도를 배운 기사들이었다.

태섭의 갈색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빠르게 빛을 잃는 것을 명헌은 놓치지 않았다. 우성은 단숨에라도 그들을 제압할 태세였다. 그때 태섭이 둘을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태섭에게 달려들던, 그 찰나에. 눈이 마주친다. 명헌의 눈을 한 번. 우성의 눈을 한 번. 도톰한 입술이 달싹인다.

‘오지 마. 명령이야.’


“태섭아!”

찢는 비명과도 같은 카오루의 목소리가 저택을 뒤흔들었다. 우성의 품 안에 태섭의 드레스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태섭이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달재야! 달재야! 어서 의사와 마법사를 불러라!”

“예!”

집사장이 메이드들에게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내렸다. 뜨거운 물을 가져와! 깨끗한 붕대를 가져오고! 의사와 마법사에게 가장 빠른 연락을 취하도록 해! 우리는 아가씨의 출혈 부위를 찾고 소독한 뒤 지혈하는 응급처치를 시행한다! 메이드들이 다급하게 저택을 뛰어다녔다. 태섭이 꼭 닮은 카오루의 갈색 피부가 희게 질렸다. 드레스 끝자락이 구두에 몇 번이나 짓밟혀 넘어질 뻔 한 것을 집사장이 달려와 도왔다.

“오, 내 딸. 내 딸아… 내 딸 태섭이…….”

흐린 갈색 눈에 순간 빛이 돌았다. 카오루가 태섭의 뺨을 두드렸다.

“태섭아, 태섭아. 내 딸. 정신 좀 차려보렴.”

“어, 어머니…….”

“그래. 태섭아. 엄마 여기있어. 태섭아. 세상에…….”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자 카오루가 대번에 그 손을 쥐고 제 뺨에 부볐다. 카오루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태섭이 약하게 웃었다.

“어머니, 나 그래도 이겼어…….”

“태섭아…….”

태섭의 숨이 훅 꺼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힘없이 툭 떨어지는 딸의 손끝을 내려다보던 카오루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우성과 명헌을 본다.

“태섭의 수행기사로 갔으면 아이를 지켰어야지!”

날 선 외침에 명헌이 우성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아가씨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다가오지 말라고.”

“아무리 명령이어도……!”

“아가씨가 상대한 자는 황족의 친척 가문 귀족 자제로, 전쟁 중에 전사한 아가씨의 부친과 장남을 그림자로 세운 가문이라고 했습니다.”

“……!”

카오루와 집사장이 경악하며 서로를 보았다. 카오루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런… 태섭이는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여덟 살. 두 가족을 잃었던 때에, 슬퍼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진실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들키게 되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여태 모른척 했다고 했습니다.”

뒷짐진 명헌이 무미건조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카오루가 아연하며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넋을 놓았던 집사장이 정신차리고, 메이드들이 침실 캐노피를 치고 태섭의 드레스를 벗겼다.

“베인 상처가 많아요. 가벼운 곳도 많지만 깊은 곳이 여러군데 됩니다!”

“등과 허리쪽으로 부상이 심합니다! 소독약과 지혈제를 가져오세요!”

“붕대가 더 필요합니다! 붕대와 깨끗한 천을 더 가져와! 어서!”

메이드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카오루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블랙드래곤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숨겨왔던 것을, 들켜버렸다. 카오루는 밑바닥부터 타오르는 분노를 씹어삼켰다. 감았던 눈을 떴다. 중요 부위를 모두 가린 것을 확인한 집사장이 응급처치를 돕고 있는 것을 보던 카오루가 말했다.

“달재야.”

집사장이 하던 것을 다른 메이드에게 맡기고 빠르게 카오루에게 다가왔다. 카오루에게서 풍겨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흠칫하다, 표정을 갈무리한다.

“말씀하십시오.”

“황가에 전령을 보내렴. 송 가문은 지금부터, 황가의 그림자나 개 따위가 아닌― 자유만을 위해 살 것이라고.”

“명 받듭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하는 법이지.”

카오루의 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태섭의 상처를 지혈하던 메이드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장이 태섭의 침실을 빠르게 빠져나가고, 카오루가 명헌에게서 돌아서며 말했다.

“너희, 그 순간에 함께 있었던 거니.”

“예.”

“그럼… 혹시 그때 노래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았니.”

“들리지 않았고, 들려도 들을 생각 없습니다.”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어떤 존재인지 잘은 모르지만, 세상을 불태워야한다는 생각은 수시로 들었습니다. 저도, 우성도.”

등을 돌린 채 태섭을 보기위해 고개 숙였던 카오루가 우뚝 멈췄다. 노래가 들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던 소리이기에 그것이 노래인지, 무엇 때문에 들리는 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거였다. 카오루가 고개를 돌렸다. 숨을 들이킨다.

“아가씨께서, 한 마디만 하셨더라면. 아가씨를 능멸하고 비웃는 무리를 모두 불태울 수 있었는데.”

“…아가씨께서 오지 말라고 명령하신 거니까. 명령은 들어야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참았습니다. 다 죽여버려도 됐는데.”

명헌의 말을 우성이 이었다. 카오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명헌의 눈높이를 지나, 우성의 눈높이를 넘어, 태섭의 침실 천장까지 닿아 요동치는 검은 마력을 보았다.

증오.

분노.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인 검은 마력을.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도 알지 못 하면서. 능력을 사용해본 적도 없으면서. 부서지는 세계가 멸망을 부르는 노래를, 그들이 숲에서 발견되었을 때부터 불러왔던 것을 모르고 살 정도로 주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들리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마력을 보이면서.

카오루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정도로 블랙드래곤이 딸을 사랑할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있으면 시늉만 해도 그냥 감정에 따라 모조리 죽이라고 했어야 했다고.

운명을 거부한 댓가는 누군가 치뤄야 한다네

운명을 거부한 댓가는 누군가 치뤄야 한다네

그러면 댓가는…

한번이면 끝일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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