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 SV] [D] 어긋난 평행선
포ㅋㅁㅅㅌ 스ㅋㄹ/바ㅇㅇㄹ DLC 카ㅈ 드림 커미션
안내사항 외 6200자입니다.
스칼렛&바이올렛 DLC 등장인물의 드림글... 연속작입니다.
엔딩 분기 느낌으로 요청하셔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썼습니다.
신청 감사드립니다!
새벽의 해는 낮지만 멀다. 고요한 바람이 부는 배틀코트의 한 쪽에 고요히 선 채인 카지는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상대를 기다린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나의 분노와 증오를 풀 존재. 설레서 참을 수가 없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관찰한 네리네가 조용히 제빈에게 읊는다.
" 네리네는 카지 군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요인으로 보입니다. 제빈, 이대로 둘 겁니까? "
" 응. "
" 말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 그 유학생이라면 저 녀석의 분노를 막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카지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는 듯─혹은 듣지 못 했다는 쪽이 가깝겠지만─손 끝을 연신 뜯어대며 반대편의 빈 코트를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마른 공기, 서늘한 새벽 바람. 뜨는 해를 등지고 선 채 카지는 기다린다. 지금까지 단련해 왔으니까. 그것 하나면 된다. 너를 꺾으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 응? 저기 온다. "
" 유학생이 온다! 챔피언에게 도전하러 온대! "
주변의 수근거림으로 카지의 손동작이 멈춘다. 쥐고 있던 볼을 두어 번 던져올려 크기를 복구시키는 카지의 앞으로 백색의 유학생이 걸음한다. 맞은 편 배틀코트. 곁에 선 님피아와 비장한 표정의.
" 노아. "
" 카지. 이런 방식이 아니라 분명... "
" 이야기는 필요 없어. 설득하고 싶으면 나를 꺾어. 나는 철저하게 너를 꺾을 테니까. "
여기까지 와서 죄를 빌 셈이야? 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카지의 마른 손등에 약한 힘줄이 솟는다. 기색을 알아차린 것인지, 혹은 모르는 것인지 이내 노아의 곁에 있던 님피아의 리본이 노아의 손목에 살며시 얹힌다. 위로라도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위로조차 받지 못 했는데. 역시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너는 자신의 마음을 모를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는 카지의 손이 잘게 떨린다.
─ 블루베리그 챔피언, 카지! 유학생 노아에게 승부를 걸었습니다!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배틀코트를 향한다.
─ 노아는 다음 포켓몬을 꺼냈다.
효과가 대단했다. 급소에 맞았다. ─
─ ...
노아는 더이상 싸울 포켓몬이 없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
배틀코트가 갖가지 기술로 인해 벌어진 안개로 뒤덮인다.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지. 카지 역시도 한 팔을 들어 강풍 섞인 안개를 피하고,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노아의 모습도, 노아와 함께 서 있던 마지막 파트너인 님피아도, 자신이 내보낸 폴리곤Z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려야 하나. 코트로 잘못 뛰어들었다가는 판정패가 된다. 미세한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킨다. 서서히 가라앉아 배틀코트의 모습이 드러난다.
쓰러져 있는 님피아, 가디안. 그 앞에서 먼지에 덮인 채 버텨낸 폴리곤과 과미드라. 비록 그 직후 폴리곤이 바닥에 내려앉기는 했지만, 이겼다. 마침내 이 기나긴 악연이 끊어질 때야. 나는 증명해냈어. 카지의 양 손이 탁, 풀린다.
" 승자! 블루베리그 현 챔피언 카지! "
주변에서는 한숨 섞인 환호가 터진다. 오로지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낸 자신에게 쏟아지는 갈채, 박수. 마침내 이뤄냈다는 성취감. 폴리곤과 과미드라를 다시 불러들이는 카지의 앞에서 노아가 배틀코트로 뛰어든다. 쓰러진 가디안과 님피아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급하게 기력의 조각을 쓰는 것인지, 희미한 레몬빛이 감도는 모습에 카지 역시도 배틀 코트로 천천히 걸어 들어선다.
" 님피아, 조금만 참아. 이따 회복기에 가서... "
" 네가 졌어. "
" ... "
차가운 말이 비수처럼 날아가 꽂히는 것 같다. 그런 착각을 하며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리는 카지에게, 이내 블루베리그의 사천왕이 다가온다. 제빈과 하솔, 네리네와 타로까지. 타로는 노아에게 급히 다가가 회복약을 건네주면서, 추가로 꺼낸 약을 카지 쪽으로 주려는 것인지 내미는 모습이다.
" 이야, 팔데아지방 챔피언을 블루베리그 챔피언이 꺾었네. 멋졌어. "
" ...네리네 역시 칭찬합니다. "
" 멋진 승부였어! 내 마음까지 화려하게 불타는 기분이었다고! "
" 예외적인 상황이라지만 정말 심장이 떨렸어요. 노아 씨도, 카지 군도 모두 수고했... "
" 필요 없어. "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다시 덤빌 건가? 평소에도 성공하지 못 하는 일이라면 몇 번이나 시도했을 노아를 몇 번이고 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 모를 자신감이 붙어서였다.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 역시도. 역시 블루베리그 챔피언은 챔피언이구나, 유학생도 챔피언은 못 꺾는 거야? 그럼 카지는 정말 강한 거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카지의 마음에 오래도록 응어리져 있던 외로움이 서서히 흩어진다.
맞아, 나는 강해. 팔데아 지방의 챔피언인 너를 제지할 수 있다고. 모두 가졌지만 너는 이 자리만은 얻지 못 했어. 카지의 몸이 숙여진다. 마치 아래에 앉은 이를 내려다 보는 듯, 짐짓 거만한 자세로 님피아에게 약을 뿌려주는 노아를 본다. 그 즈음까지도 노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길게 내려앉은 하얀 색 머리칼 안으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더욱 고개를 속인 카지의 시선이 갑작스레 들어올려진다.
울고 있다.
님피아의 뺨이며 부드러운 털 사이로 방울져 떨어진 것은 약이 아니라 노아의 눈물이었다. 언제부터 솟아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고인 눈물. 눈물을 알아챈 사천왕 중, 하솔이 제법 눈치 좋게 제 품을 뒤져 손수건을 내었고, 이내 그 눈가를 닦아준다. 타로가 다급히 블루베리 아카데미 방면으로 향하는 목소리, 이어 제빈 역시 움직여 옆에 쓰러진 가디안을 살펴본다.
모두가, 내가 아니라 저 아이를 봐 준다. 또 다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긴 건 나인데, 왜 저 아이가 자꾸만 보살핌을 받는 거지? 카지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다가도, 금세 힘 없이 풀린다. 노아가 몸을 일으켜 어렵사리 두 포켓몬을 자신의 볼로 불러들이면서 옷깃으로 눈가를 훑어냈다.
" 저기, 노아 씨...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휴식이라도... "
" ... "
타로의 인도로 몸을 일으키는 노아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내 눈물이 여즉 맺힌 시선은 여전히 미세하게 아래로 기운 채, 등을 돌려 님피아가 쉬고 있을 볼을 들고 힘 없이 걸어가는 노아의 뒷모습이 카지의 시야에 들어온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기던 카지에게 제빈이 넌지시 운을 띄운다.
" 챔피언, 이겼는데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 "
" 조용히 해. "
" 기껏 자리도 지켰는데 생각대로 되는 게 없어서 그런가? "
조용히 하라고. 그대로 걸음을 돌려 리그부로 향하는 카지의 마음이 복잡했다. 이겼음에도 진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무언가 어긋나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틀어올린 머리를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리는 카지의 두 눈에는 막심한 후회가 떠오른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카지의 증오를 점차 무너뜨렸다.
" 이게 뭐야, 퇴부 신청서? "
" 네. 노아 씨의 퇴부 신청서입니다. "
네리네가 파일철에 끼워 건넨 빳빳한 종이는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 열기조차 빠지지 않았다. 그 위에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힌 정보는 노아의 것. 제빈이 검토하며 상석에 앉은 카지를 흘끔, 돌아보면 카지는 일부러 그 시선을 피한다.
" 어떻게 할까? "
" ...뭘? "
" 퇴부한다잖아. "
" 약한 사람은 안 받아. 퇴부시켜. 알아서 잘 하면서 왜 나한테 물어? "
그래? 짧게 호응하듯 말을 낸 제빈이 옆에 있던 도장을 들어 퇴부 승인 칸에 도장을 찍는다. 네리네가 그것을 가져가는 것을 보며 카지는 다시금 손 끝을 물어뜯었다.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돌아가려고? 아카데미에? 설마. 이 곳의 수업이나 강의라면 하나도 끝나지 않았다. 브라이어 선생님이라는 자가 제안하던 조사도 남았고.
허나 브라이어는 카지를 부르는 대신 제빈을 호출했다. 얼핏 듣기로는 노아가 팀에서 이탈해 조용히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 같았지. 며칠이 지나도록 노아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점차 카지에게 압박으로 다가오는 점이 이전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다. 챔피언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기쁘지 않았고, 도리어 속이 뒤틀린 듯 내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카지 역시도 노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제빈이 팔데아로 떠난 그 날 밤, 카지는 기숙사 복도를 걸어 지나가다 문득 저 끝에서 걸어오는 노아를 찾아냈다. 마주치려 하면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사라지거나, 별 수 없이 합동 수업을 하게 되면 일부러 먼 곳에 가 앉는 노아는 자신을 회피하는 것 같았다. 곁에 있던 미라이돈의 각진 시선이 내내 자신을 향하고, 다가오려고 하면 노아를 태워 피하는 모습 역시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그래서 마주한 이번에는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도망칠 곳 없는 일자형 복도. 통로는 양 끝의 이동기 뿐인 이음길. 노아는 스마트 로토무를 든 채 무언가를 쓰고 있는 것인지, 연신 두 엄지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이며 화면을 건드리는 모습이다. 그 틈을 일부러 노린 카지의 걸음이 빨라져 기어이 노아의 앞을 막아선다. 노아의 시선 끝에 카지의 발이 보인다.
" 노아. "
" ...아, 카지. "
금세 스마트로토무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노아의 행동에 별다른 의심 없이,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목례를 했다. 노아의 목례가 이어진다. 다만 마주 나누는 대신 어설픈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 할 말 있어. 잠깐이면 돼. "
" ...미안, 나는 할 말이 없어. "
" 왜 할 말이 없어? 난 있어. "
" ...미안해. "
저 미안하다는 말만 벌써 두 번째로 들어버리는 바람에, 카지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속에서 피어나는 이 불편함. 시선은 사선 아래로, 손 끝은 옷 주머니 안에서 꿈질거리는 모습. 챔피언전 이전까지만 해도 맑은 표정과 당당한 자세로 항상 인사를 먼저 건네던 모습은 오간 곳 없이, 자신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에 카지의 목소리가 점차 커진다.
" 왜 도망다녀? "
" ...도망 다닌 게 아니야. 그냥, 마주치면 안 좋으니까... "
" 뭐가 안 좋은데? "
" 너한테 안 좋아. "
갑갑한 말이 대화를 원위치로 돌린다. 이를 몇 번 까득거리며 손톱을 물어뜯던 카지의 손동작이 다시 멈추었다. 이런 거부는 싫다. 어떻게 해야 하지? 뒤늦은 사과를 내뱉으려는 입술이 얕은 경련에 가까운 움직임을 내보인다. 그나마도 노아는 보지 못 했다.
" ...더 할 말이 없으면, 가 볼게. "
" ...그래. "
차마 하지 못 하는 말은 목 아래로 삼킨다. 힘 없이 걸어가는 노아의 뒷모습이 유독 어두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카지는 오래도록 마음 한 켠을 채우던 응어리가 녹았음을 알았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응어리가 자랐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아, 이건 불치병이구나.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향하는 나의 오래된 고질병. 뒤늦은 깨달음이 카지의 표정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린다.
사실, 나는 너를 이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나는 그저 네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다 가지고 있는 네가 양보하면 되었을 텐데.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잖아. 항상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도깨비님도, 보물도, 진실조차도. 이것은 증오인지, 아니면 병인지. 속이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카지가 깨달음을 찾아 뒤적인다. 깨진 평행선에 닿지 않는 너의 목소리와 그것을 무시한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너는 다시 도전하겠지. 불안감이 엄습해 스스로 시도하는 자기합리화는 곧 집착으로 변한다. 너는 다시 내게 도전할 거야. 너는 나를 좋아하니까.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서로가 꺾고, 꺾이면서.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이 비틀린 마음으로라도 너를 다시 만나게 만들 거야. 다시 너를 일으킬 거야. 그래서 모든 걸 빼앗아 내가 가질 거야.
이 마음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광증으로 깊어지며, 카지의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이 챔피언 자리를 꺾으면 너는 다시 모든 걸 얻게 될 테니까. 너도 복수를 하고 싶어할 거야. 나는 다시 도전하는 너를 꺾고 영원토록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자신을 투영시키는 카지의 목소리가 점차 스스로의 방 안에 고요히 깔렸지만 카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양심의 무게는 눈물과도 같았다. 이게 옳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그 감정을 토해낼 방법을 모르는 채 뒤틀린 곡선이 되어 카지의 이성을 비비, 꼬아낸다.
부러진 평행선은 만날 수 없는 수준의 각도로 점차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마치 둘의 사이가 영원토록 다시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처럼.
카지는 울며 웃는다.
노아는 그 날 후로 카지의 시야 안─정확히는 블루베리 아카데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유학 생활의 끝을 알리는 졸업식의 종만이 고요하고도 요란하게 아카데미를 채우고, 카지는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을 상대를 그리며 졸업식의 종이 다시금 울렸다.
마치 이 모든 일은 영원히 이 곳에 머무를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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