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배운 것을 증명하시오.
12시, 검은 실의 제물
시야를 어지럽게 하는 고결한 증거를 부디 그 심장과 목을 내걸고 충성하라.
오랜 시간 가르침으로 얻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제 머리카락은 감히 귀하신 분들을 닮았고, 눈동자는 그 그림자를 담아선 안 되는 높으신 분들의 시선이며, 이 모든 것은 황공한 은혜를 입어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아니었다면 평기사는 무슨, 에스콰이어도 되지 못했을 태생을 갖고, 정규 교육과 함께 앞길을 내어주심에 허리를 숙여 감읍해야 한다. 오랜 시간 진리처럼 새긴 것들은 언제나 미련보다 한 걸음 더 앞서 있었다.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살려준 목숨이라는 것은 제게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면전에 대놓고 뱉지 못할 모욕에 짓밟히는 자존심이라는 것은 제게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과 비슷하게, 저 스스로 역시 이 자리에는 존재한 적 없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정할 필요도 없는 무언가였다. 동정은 무슨, 감상을 가질 필요도 없는 부속이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떠밀어온 황금의 시대를 받치는 톱니 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불만을 가졌는가? 아니. 그것이 힘겨웠는가? 아니. 하물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 모든 문답을 부정으로 끝낼 수 있을 정도였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뒤틀렸기에 저는 이리도 배은망덕한 생각의 끝에, 남의 손을 빌려 죽고자 함인가. 어째서 죽고자 함인가. 의문도 되지 못하는 문장이 숨구멍을 턱하니 막았다가, 거센 기침과 함께 토해내듯 울렁이는 감정을 삼키지 못하게 했다.
한때, 태양을 마주한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바란 적 없는 삶은 이어지고, 그것은 어떠한 자리를 만들었고, 그 탓에 자신은 늘 불안 속에 있다. 제 목숨 내어주는 것, 저를 배신자로 낙인 찍는 것, 쓸모를 다하면 버릴 것임을 면전에 대고 말해도 어떤 감흥도 없는 주제에 저가 불안했던 것은, 그렇께까지 했는데도 저가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출신성분 하나 알 수 없는 것이 괴물보다 더 지독한 힘을 갖고 있으니 오랜 시간 권력을 쥐어온 이들은 불안하여 죽이자고 했다. 허나 언제나 죽음 앞에서도 고개를 쳐들고, 온몸을 피로 물들이며, 그 걸음에 흔적을 남겨온 이를 두고 ‘여덟째’라 부르는 이들은 필요가 다할 때까지 살려두려 했다. 바깥에서는 어째서인지 구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곳에서는 반드시 없애야 할 수뇌부이자 전력이 되어 있었다.
무엇도 바란 적이 없었기에 태양을 마주한다는 사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인형의 집에서, 내어주는 옷을 입고, 역할을 갖고, 정말 무패의 신화라도 쓸 것처럼 유린당하는 삶을 바란 적 없었다. 그러라고 저를 어떻게든 감춰가며 살려놓은 게 아닌 줄도 안다. 분명 그러했을 텐데 저는 어째서인지 계속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걸 핑계 삼아 아직도 살아있다. 지독하게, 징그럽게, 남의 생을 제 것으로 쥐고 흔들며, 저 역시 고귀한 푸른 피인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오만함으로.
그러니 끝내야 하지 않나. 자신을 여기까지 살게 한 게 거짓된 태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한다면 쉽게 찾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지 않았다. 핑계는 귀찮아서였다. 자신은 살아남는 것도 급급할 정도로 필사적이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했다. 무언가를 하면 어디서는 칼자루를 쥐었고, 저기서는 목줄을 쥐었고, 등 뒤에서는 배신의 화살이 날아오려 하고, 면전에서는 적이 총구를 들이밀었다.
참으로 지루하고, 귀찮구나….
제 삶은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 필사적으로 살려놓은 생은 기어코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고집에 의해 돌아서서 도망치는 선택 따위 할 수 없는 걸음이 되어버렸다. 은혜와 동정과 필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저를 죽이려는 무수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고 강해져야 했고,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이 존재 자체가 죄악이 될 수 있으니 필요 이상은 감춰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면 그대로다. 그래서, 그래서… 몇 없는 기회를 잡았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죽는 거, 그렇다면 좀 더 네 뜻대로 살고 싶지는 않느냐고. 거짓말을 하는 태양을 찢어발기고, 발아래에 불티를 던지는 것들을 짓밟으며, 등을 떠밀며 환호하는 것들의 목을 치고, 암야에 몸을 숨긴 것들에게 분풀이를 할 생각 없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리는 게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 모든 게 내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아, 지친다. 정말로. 그래서 지루하고, 하찮고, 별 볼 일 없으며, 같잖고, …귀찮다.
여전히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제 뜻대로 모든 걸 이룰 수 있다는 듯이 속살거린 것도 결국 야비한 목소리였을 뿐이었구나. 이거 봐.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 앞에 저 검은 것을 집어던져놓은 거겠지. 여기까지 살려둘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저와 똑같은 검까지 쥐여주고, 같잖은 미련이나 들게 만들 리 없다.
아, 역시나. 제 삶은 늘 이런 식이다.
바라는 것은 누구도 들어주지 못한다.
원하는 것은 아무도 내어주지 않는다.
기회는 언제나처럼 거짓된 환상이다.
자기의지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지금도 봐.
저건 나를 위하는 척 하면서 내가 바란 적 없는 것이나 쥐여주고, 원하는 것은 집어치우고, 기회랍시고, 자기의지를 지우라고 한다.
이상한 일이지. 보통은 다들 그걸 바라던데. 아니, 아무 상관도 없다. 그저 끝만을 바란다! 자신을 직시하는 저 녹음의 색을 원하지 않는다. 바람에 나부낄 햇살의 색을 바란 적 없다. 지금 이 뺨에 문질러지는 것처럼, 이 머리카락을 물들인 것이 넘쳐 흘러 모든 것의 끝에 도래하기만을 원한다. 정의라는 개념따위 배운 적 없다. 제게 정의는 조국의 이름이오,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분일 뿐이었으니.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공간을 채우고 나니 모든 사실을 알았다. 그래. 당신은 여전히 내게서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 진실만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 손을 빌려달랬더니, 끝내 빼앗는다. 짜증도 나지 않는다. 그럼 그냥 찔러 죽여버리면 될 일인데, 그러지 않은 스스로의 업보이리라. 그렇지만, 그것 하나 알지 않는가.
이미 나는 죄악이기에, 여기서 살아나가봤자 죽어.
그렇다면 그 손에 깔끔하게 끝내주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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