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셋째 도련님, 사장님께서 부르…. 실례했습니다.”
“아빠가요? 갈게요, 셔츠 단추만 채우고.”
“…서재에 계십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등을 본 고용인이 사과를 건네자 푸핫 웃었다. 아니, 저를 어릴 때부터 봐 오신 분이…. 하면서. 셔츠 단추를 차곡차곡 잠그고 옷깃을 정리했다. 아버지를 만날 때는 뭔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될 것 같았다, 대놓고 뭐라 하시는 건 아니지만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차림새를 한 번 살피고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서재라고 했지. 서재 앞에 서 문을 몇 번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게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어머니도 같이 계신가 보지. 문을 여는 동시에 특유의 미소를 띄웠다. 부르셨어요, 아빠? 엄마도 같이 계셨네요!
“우리 아들.”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 놓으시곤 두 팔을 벌렸다. 그럼 다가가서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살가운 막내아들다운 태도다. 다른 형들을 이렇게 안아 주시라고요. 생각하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받고 떨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뒤로 가져가 뒷짐을 진 채 커다란 책상 앞에 서고. 그렇게 자리를 지키면 서류를 보시다 금빛 눈동자로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별 말씀이 없는 걸 보니 차림새에는 문제가 없나 보지? 요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던데 불똥만 튀지 않았으면 좋겠네, 생각하며 웃음을 유지하면 자신의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나직이 서재 안을 울린다.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뭐, 똑같아요. 기타도 치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형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그 기타 좀 그만 치면 안 되는 거냐? 차라리 피아노 수업을 추가시켜 주는 게 낫지.”
“흥미가 없어서요, 아빠.”
“어릴 때는 그렇게 잘 해놓고 말이야.”
-아버지랑 어머니가 하라면서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여기서 버럭하면 큰일 난다, 요즘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 절대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된다, 생각한다. 서재가 아니라 호랑이 굴에 들어온 기분이야…. 생각하며 웃음짓는다. 습관적이었다. 요즘 이렇게 불러 한 소리를 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데, 나 한정으로 이러시는 건가? 찬양이 형에게는 뭐라 하지 않을 테고, 분명 요한 형에게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분명 불렀을 거야, 그리고 또 뭔가를 시켰겠지. 요즘 너무 놀기만 하는 것 같지 않니, 생각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네 형들을 좀 봐, 외국어는 기본에 교양도 많이 쌓았잖아. 형들과의 비교는 유일하게 자신이 잘 넘기지 못하는 말이었다. 참자. 물론 자신이 형들에 비해 자유롭게 큰 건 맞지만 그렇게 키운 게 누군데? 어릴 때에는 형들이 공부하러 가는 모습을 보며 고용인과 공놀이를 했다.
심심할 때는 형들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수업이 진행되는 방에 들어가지 못할 때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형들이 외국어를 배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어릴 때부터 형들이 거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친 건 걸음걸이 교정 정도? 심지어 그 교정도 형들보다는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으니. 다르게 말하면, 형들에게 간 교육적 지원이 자신에게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어는 노래와 드라마의 자막을 보며, 중국어는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프랑스어는 어릴 때부터 요한 형이 읽어준 책의 내용을 듣고-그래서 프랑스어는 현재도 배우는 과정이 진행중이었다- 혼자서 아득바득 익혀 놨는데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지? 어머니의 눈에도 모자랄 거고. 당연히 혼자 공부한 것에는 한계가 있다.
피아노도 흥미가 가지 않으니 치지 않은 이후에는 실력이 녹슬었고, 기타 실력은 향상되고. 향상되어야 할 게 바뀌었다. 외국어는 현재 진행중이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교육은 학교에서 받는 게 전부고, 성적은 좋지만 교양이 부족해. 이를 깍 깨물었다. 살가운 막내아들로만 키운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는 결론이 내려졌다. 초등학생 때는 잘 안기고 천진난만하다며 좋아해 주시던 분들이 지금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며 부정적 반응을 내놓는다. 참 줏대없는 분들이셔.
“여보,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요.”
“내 말이 틀렸어? 요한이만 봐도 완벽하게 컸잖아, 찬양이도…. 집을 뒤집기 전에는 괜찮았고. 그런데 얘는 왜 이러냐고.”
“하아….”
어머니의 한숨, 그 한숨에는 약간의 긍정이 깔려 있나?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나가게 해주실 기미도 안 보이고, 내가 할 일은 그저 듣기만 하는 거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불똥이 거하게 튀었군, 다른 생각을 할까. 형들과의 비교는 흘려버리면 그만이고, 이따 방문 잠그고 기타 쳐야지. 그리고 외국어 공부, 아니면 나가서 기분 전환…. 주은총, 듣고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에 눈을 가볍게 깜빡인다. 네, 듣고 있어요. 아빠.
“어쨌든 네 형들 발끝이라도 따라가는 거야, 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네, 알고 있어요. 아빠랑 엄마는 절 사랑하시잖아요.”
형들에게도 너를 사랑한다는 핑계를 댔나? 생각한다. 사랑은 개뿔, 내가 성인만 되면 프랑스든 미국이든 떠 주마. 형들이 보고 싶어, 같은 공간에라도 머무르고 싶어. 서재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스트레스가 쌓였다, 몇 년간 꾸욱 누르고 있던 감정이 튀어오를 듯 말 듯 했다. 뒷짐을 진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나가 봐도 될까요? 생긋 웃으면 나가라는 손짓이 돌아온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면 또 어머니가 몸을 일으켜 자신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더 열심히 해, 알겠니?
“그럴게요.”
이 부부는 미친 게 분명해, 생각하며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서재를 벗어났다. 서재의 문 앞에 서 있던 고용인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
“괜찮으세요, 도련님?”
“형들한테 저 불려갔다는 말 하지 마세요.”
“첫째 도련님은 여쭤보실 텐데요.”
“함구하세요.”
형은 저 말고도 감당해야 할 거 많아요, 가서 볼 일 보셔도 괜찮아요. 싱글 웃으며 말하면 고용인이 걱정스럽다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다 자신의 뒤에 서 걸음을 멈춘다. 자신과 거리가 생기면 그 때 움직이려나 보다, 그럴 필요 없는데. 입꼬리를 올려 꾹꾹 누르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 묵주를 손에 쥐고, 알을 하나씩 굴린다. 주님, 저를 악에서 구하시고…. 타인의 기대가 제게 오게 하시고, 그게 안 된다면 집이라도 뒤집을 힘이라도 주시던지요.
마음같아서는 찬양이 형이 그랬듯 집 안의 물건을 다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주씨 집안은 망했어, 이미 부모부터 글러먹었어. 묵주를 내려놓고 거실로 나가 거실을 빙 둘러본다, 장식품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어져. 기대받지 못하는 삶이니 이런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물론 한 소리는 듣겠지만. 꽃병을 들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짧게 거실을 울렸다, 생화는 바닥에 흩어지고, 꽃병은 산산조각이 났다. 사이다의 탄산처럼 한 번 튀어오른 감정은 잠재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감정에 따른 행동을 한다. 그런 거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몸만 움직이는. 골프채를 들고 텔레비전의 화면을 세게 치면 텔레비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왜 골프채를….”
“형들 안 왔죠.”
“출타 중이세요.”
“…꽃병 좀 치워주실래요? 실수로 깨뜨려 버렸어요.”
골프채를 뎅그랑 떨어뜨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아, 뒷일은 어떡하냐. 형이 나 대신 아버지께 불려가면 그것도 그것대로 최악인데. 형들이 아버지 찾아간다고 하면 좀 말려주세요, 특히 요한 형. 고용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찬양 형은 아버지께 불려갈 일이 적을 테니까, 요한 형만 어떻게 해 두면 그만이다. 제발 나만 혼났으면 좋겠네, 혼나면 서재까지 뒤집어 버리지 뭐. 그리 생각하니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냥 집 한번 뒤집으면 되는 거잖아? 애매하게 강요받는 삶을 사느니 차라리…. 결론을 내리고는 골프채까지 치워 달라는 눈짓을 했다. 골프채가 치워진다. 아. 모르겠어, 그냥 한 번 미친 척을 하는 수밖에. 큰소리도 내 보고, 화도 좀 내 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맑은 머릿속을 다시 차곡차곡 생각으로 채운다. 형들에게만 피해 안 가면 돼, 와중에도 제 형제들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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