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살인의 쇠퇴> 조지 오웰
240716
<실업>
p26.
이 법은 자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보험으로, 다수의 노동자들은 보험금 납입에 대한 대가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 실직자들에 대한 이런 실업수당은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책임이 없는 영국 경제의 불황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실업수당이 일종의 시혜를 베풀어주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주당 1실링은 아이 한 명을 양육하는 데 충분한 금액이 아니다. 심지어 주당 18실링은 성인 남성이 겨우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돈이다. 그런데 보수 언론은 실업이 노동자들의 게으름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기에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들에 따르면, 영국 노동자의 유일한 목적은 힘든 노동은 피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주당 18실링씩 받는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들은 실업수당을 뜻하는 '돌(dol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공짜 밥을 얻어먹으려는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선금' 을 뜻하는 멸시적이고 사악한 표현이다. 실직자들은 납세자들의 자선을 받아 놀고먹는 향락집단이라는 생각이 부유한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p31.
실직자들의 대규모 이민 또한 장려되고 있지만, 제시된 조건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캐나다와 호주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해결해야 할 자체의 산업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이민은 현재의 어려움을 완화시킬 것 같지 않다. 정부는 사실을 호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덮으려 하고 있다. 공식적인 실업 통계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작성되어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전쟁 이후 정규직 일자리를 잃은 수만 명의 사람들을 누락시킨 채 실업보험에 가입한 실직자만을 통계로 잡고 있다. 실직자들이 부양해야 하는 아내와 아이들 또한 이 목록에 빠져 있다.
<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p49.
최근에 여론을 잠재우고 우려할 만한 민족주의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영국은 교육받은 원주민 후보들을 받아들여 몇 개의 요직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원주민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제도는 세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원주민들은 유럽인들보다 적은 봉급을 받는다. 두 번째, 그들은 같은 원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법적 분쟁을 쉽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그들은 그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해주는 정부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 일기>
p67.
그들은 내가 간이숙박소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무척 언짢아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간부가 되거나 노도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자본가 계급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산층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충격을 받았다.
p75.
그리고 그녀의 제부는 새로 파낸 수갱 370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수직 벽에 이리저리 튕겨 바닥에 닿기도 전에 뼈가 으스러져 죽었다. H부인은 "제부가 새로 산 방수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요, 광산측은 뼈를 수거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라고 덧붙여 말했다.
p99.
그러나 리버풀 자치제는 보수적이다. 게다가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재건축 사업은 내가 말한 대로 사회주의 방식이지만 실질적 사업은 사적 계약자들에 의해 행해진다. 그래서 시 자치제 공무원들의 친구, 형제, 조카 등과 같은 사람들이 계약자가 된다고 쉽게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단 어느 선을 넘으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며 국가와 자본가는 하나로 합쳐지는 경향이 있다.
p110.
그녀는 오늘날의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방에 들어갈 때 남성들이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정중한 행동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요즈음의 상황은 묘하다. 실제로 남성은 늘 실직 상태인 반면 여성은 가끔 일을 한다. 그러나 여성은 끊임없이 집안일을 하고, 남성은 목공일과 정원 가꾸기를 제외하고는 아내를 잘 도와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실직했다는 이유만으로 '메리 앤'이 된다면 남성이 체면을 잃게 된다고 남성과 여성 모두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p113
그들은 "사서가 선생님한테는 보여줄 테지만 우리한테는 어림없을 겁니다" 고 말했다. 실제로 그 사서는 거만한 데가 좀 있어 나 역시 요청한 정보를 모두 얻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사서가 나한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거라 생각하는 데 비해, 그들 둘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p134~135.
광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갱구 옆에 목욕탕이 설치되어 있는데 나는 그 목욕탕이 석탄회사가 설치해 놓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광부들이 출자한 복지기금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퍼스한테서 들어 알았다. 이곳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광산의 목욕시설이 다 이런 식인지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이것은 광부들이 목욕탕을 원하지도 않고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된다. 모든 광산에 목욕탕을 설치하고 있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석탄을 거의 다 파낸 탄갱의 경우 목욕탕을 지을 가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말하려고 했는데 잊은 것이 하나 있다. 웬트워스의 막장에서 본 것인데 습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긴 곰팡이들이 갱도 버팀목에 탈지면처럼 덕지덕지 붙어 자라고 있었다. 만지기라도 하면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역겨운 냄새만 날 것이다. 그리고 랭커셔 광부들은 램프를 목 주위에 느슨하게 매는 것이 아니고 팔꿈치 위에 띠를 차서 매달았다.
요즈음 G는 거의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 석탄 절단기가 고장나 광차에 실어 담을 석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날품팔이 노동자는 부업으로 막노동을 해 1, 2실링 버는 것이 고작이다.
p140.
나는 광부들을 땅속에서 볼 때와 지상에서 볼 때의 차이점을 알고 감명받았다. 땅에 올라오면 그들은 몸에 맞지도 않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데 키가 작고 전혀 인상적이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특이한 점이라고는 독특한 걸음걸이(어깨를 딱 벌리고 무겁게 터벅터벅 걷는 걸음걸이)와 코에 있는 푸른 반흔 정도다. 그러나 땅속에서는 늙었거나 젊었거나 할 것 없이 상의를 벗는데 모든 근육이 꿈틀거리고 허리는 매력적일 정도로 늘씬하며, 그야말로 눈부시다.
<고래 뱃속에서>
p154.
하지만 그의 작품을 다섯 페이지나 열 페이지 남짓 읽다보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받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특별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는 나에 관해 모두 알고 있어'라든지 '이 소설은 특히 나를 위해 썼어'라고 느낀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거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p161.
그가 받아들인 것은 무엇인가? 우선 미국은 아니고, 땅의 모든 흙이 수없는 인간의 몸을 거쳐간 고대 유럽의 뼈 무덤이다. 둘째, 밀러는 팽창과 자유의 시대가 아닌 두려움과 독재와 통제의 시대를 받아들인다. 우리 시대와 같은 때에 '나는 받아들인다'라고 말하는 것은 강제수용소, 고무 경찰봉, 히틀러, 스탈린, 폭탄, 비행기, 통조림 식품, 기관총, 쿠데타, 숙청, 슬로건, 비도 벨트, 방독면, 잠수함, 스파이, 선동가, 언론 검열, 비밀 감옥, 아스피린, 할리우드 영화, 정치적 살인 등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p162~163.
휘트먼 자신은 동시대 사람들이 입에 담기 민망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평원에 대해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살한 사람들의 부서진 해골과 '수음하는 사람들의 병든 잿빛 얼굴'에 주목했다. 하지만 분명코 서유럽의 우리 시대는 아무튼 휘트먼이 글을 썼던 시대보다 건강하지 않고 희망적이지도 않다. 휘트먼과 달리 우리는 움츠러드는 세계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적 전망'은 철조망으로 끝이 났다. 창조와 성장에 대한 느낌은 줄어들었고, 끝없이 흔들리는 요람에 대한 강조는 더더욱 줄어들었으며, 대신 끝없이 끓고 있는 찻주전자에 대한 강조만이 점점 늘고 있다. 문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쇠퇴를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한다. 열렬한 태도는 사라지고 수동적(이 단어에 의미가 있다면, 심지어 '데카당트'한) 태도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p168.
정말로 듣기좋은 울림이지만 그게 전부다. 하지만 1920년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거품은 왜 항상 꺼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대에 특정 작가를 인기 있게 만드는 외부적 조건을 고려해봐야 한다. 하우스먼의 시는 처음 나왔을 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시에 들어 있는 어떤 점들이 특정한 세대, 이를테면 1900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에게 그렇게 깊은 호소력을 가졌는가?
(중략)
전쟁 시를 빼고 1910~1925년 사이에 쓰인 영국 시는 대개가 '전원'적이다. 이유는 전문 임대수익자 계층이 토지와의 실질 관계를 최종적으로 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전원에 속해 있으면서 도시를 경멸하는 일종의 속물주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다.
p170.
경험에 의하면 지나치게 문명화된 사람들은 소박한 사람('흙에 가깝다'는 것이 핵심어다)에 대한 글을 즐겨 읽는데, 그들이 자신들보다 더 원시적이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74.
그는 일종의 격렬하고 도전적인 이교도주의, 즉 삶은 짧고 신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던 분위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그는 거의 한 음절 단어로 이루어진 매력적이고 섬세한 운문으로 그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중략)
하지만 실제로 작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작가의 성향, 그의 '목적', 그의 '메시지'가 뭐냐에 달려 있다.
(중략)
그리고 어떤 책도 중립적일 수 없다. 형식을 결정하고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심지어 이런저런 경향은 산문뿐 아니라 운문에서도 언제나 확실히 나타나 있다. 하지만 두루 인기를 얻고 있는 시인은 하우스먼처럼 대체로 금언적인 작가이다.
p180.
하지만 이들 작가 모두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매우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시의 긴급한 문제, 무엇보다 좁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은 로마, 비잔티움, 몽파르나스, 멕시코, 에트루리아 사람들, 무의식, 뱃속의 명치, 다시 말해 실제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으로 향하고 있다. 1920년대를 회고해볼 때, 가장 기이한 점은 영국 지식층이 유럽에서 벌어진 모든 중요한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p182.
그런데 1920년대의 주도적 작가들이 왜 다소간 비관주의 성향을 띠었는가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왜 항상 데카당스의 의미, 해골, 선인장, 잃어버린 신념과 불가능한 문명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나왔는가? 결국 이들이 엄청 편안한 시대에 글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우주적 절망'이 융성하게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시대이다. 뱃속이 비어 있는 사람은 결코 우주에 대해 절망하지 않으며, 심지어 우주에 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910~1930년은 내내 번영의 시기였고, 심지어 전쟁 시기에도 연합국 국민들 중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견딜 만했다. 1920년대에 대해 말하자면, 임대료나 투자수익으로 살아나가는 지식인의 황금시대였고 이제껏 이 세계에 한 번도 없었던 무책임의 시대였다. 전쟁은 끝났고, 새로운 전체주의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모든 묘사에 관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금기가 사라졌고, 돈이 굴러들어왔다. '환멸'이 크게 유행했다. 안전하게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버는 사람이라면 모두 식자층이 되었고 삶의 권태를 익히기 시작했다.
p191.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격전은 분명히 그 자체로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어쨌든 당시에 신진 작가들은 공산주의로 방향을 바꾸게끔 되어 있었다. 자유방임주의가 끝나고 모종의 재편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1935년의 세계 상황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왜 러시아 공산주의같이 생경한 것으로 향했을까? 왜 작가들은 정신적 정직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주의의 형태에 이끌렸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공황 이전부터 그리고 히틀러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던 어떤 것, 즉 중산층의 실업에 숨어 있었다.
p200.
공산주의자와 친공산주의자들이 문학평론에서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세했다. 꼬리표, 슬로건, 회피의 시대였다. 최악의 순간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거짓말의 우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야 했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자발적 검열(이 말을 해야만 할까? 친파시스트적인 표현일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훌륭한 소설은 결코 나올 수 없다. 훌륭한 소설은 정통의 냄새를 좇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비정통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나올 수 없다. 훌륭한 소설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 나온다. 이 시점에서 다시 헨리 밀러가 떠오른다.
p203.
밀러의 작품이 이런 태도 모두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징후로서 중요성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세계과정을 전진시키지도 않고 후퇴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결코 도외시하지도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눈앞에 닥친 서구 문명의 파멸을 '혁명적'인 대다수의 작가들보다 더 확고히 믿었는데, 다만 그것에 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로마가 불타고 있는 동안 빈둥거리긴 해도, 빈둥대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얼굴만은 화염을 향하고 있었다.
p204~205.
모든 사람들, 적어도 영어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요나와 고래에 대해 줄곧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요나를 삼킨 것은 물고기이며, 성서(요나서 1장 17절)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당연히 물고기와 고래를 혼동하며 그러한 아이들의 말은 어른이 되어도 습관적으로 이어진다(어쩌면 요나 신화가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고래 뱃속에 있는 것은 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할 거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불러도 좋을지 모르지만 역사 속의 요나는 기꺼이 고래 뱃속으로 도망쳤으나, 수많은 사람들은 상상이나 몽상 속에서 그를 부러워하고 있다. 물론 이유는 분명하다. 고래 뱃속은 어른도 들어갈 만큼 큰 자궁이다. 우리에게 꼭 맞는 이 어둡고 푹신한 공간에서는 우리와 현실 사이에 몇 미터의 지방이 끼어 있어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전함을 침몰시킬 수 있을 만큼의 폭풍우도 우리에게는 메아리로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쩌면 고래 자신의 움직임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고래가 수면의 파도 속에서 뒹굴거나 바다의 깊은 어둠 속으로 돌진해 내려가더라도(허먼 멜빌에 의하면 1.5킬로미터는 내려간다고 한다) 우리는 그 변화를 결코 느끼지 못한다. 죽지 않는 한 그곳은 어느 것도 능가할 수 없는 무책임의 마지막 단계이다. 아나이스 닌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밀러 자신도 고래 뱃속에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p213.
전쟁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작금에 명백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문화의 붕괴이다. 최근까지 이것이 의미하는 함축은 완전히 예견되지 못했다.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의 분위기를 보존하고 심지어 확대시킬 거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이런 생각이 얼마나 거짓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확실히 전체주의 독재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사상의 자유가 처음에는 치명적인 죄악이 되다가 나중에는 의미 없는 추상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자율적인 인간은 짓밟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서의 문학이 적어도 일시적인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자유주의 문학은 끝나가고, 전체주의 문학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상상하기 힘들다. 작가로서는 녹는 빙하에 앉아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며, 부르주아 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고, 하마처럼 운명 지어진 존재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p223.
세 명의 독재자들은 모두 국민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부담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반면 사회주의와, 썩 내키진 않지만 자본주의는 '당신에게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히틀러는 '당신에게 고통, 위험, 죽음을 제공한다'고 말해왔다. 그 결과 국가 전체는 그의 발밑으로 달려들어 아첨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 말에 염증을 느껴 생각을 바꿀 것이다. 몇 년 간의 학살과 굶주림이 있은 후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훌륭한 슬로건이 될 테지만, 이 순간은 '끝없는 두려움보다 두려움 있는 끝이 더 낫다'는 것이 대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만든 사람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의 감정적 호소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
p238.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있어 분명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진실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종종 싸워야 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며, 차악인 경우도 더러 있다. 칼을 손에 쥔 자는 칼로서 망하며, 칼을 쥐지 않은 자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병으로 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가 있는 것은, 임대료나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의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p241.
그 당시 나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맹렬한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 '만일 독일이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논의되기는커녕 언급조차 되는 걸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잔학행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실이란 적이 그것을 말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최근에 나는 1937년에 일본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에 대한 끔찍한 이야기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1942년 홍콩에서 일어난 똑같은 잔학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 하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지금 영국 정부가 관심을 보이자, 말하자면 난징대학살도 돌이켜 보건대 거짓이었다고 보는 경향마저 있었다.
p247.
이 사건이 왜 내게 감동적으로 느껴질까? 정상적 상황이라면 이 소년과 나 사이에 좋은 감정이 다시 생긴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를 보상해주려고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도둑으로 몰린 은연중의 모욕감은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더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전하고 문명화된 삶의 결과 중 하나는 모든 기본 감정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나친 민감함이다. 아량이 비열함처럼 불쾌한 것이 되고, 감사가 배은망덕처럼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1936년 스페인에서 우리는 평범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p252.
나는 이런 것들이 두렵다. 왜냐하면 객관적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거짓들, 아니면 그와 비슷한 거짓들이 역사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어떻게 기술될까?
p253.
기록된 역사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파적이라는 것을 기꺼이 믿고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특별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쓰일 수 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하는 데 있다. 과거에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들이 쓴 것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사실'은 존재하며 그것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이 언제나 상당 부분 존재하고 있었다.
p254.
나치 이론은 실제로 '진실'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과학'이라는 것은 없다. '독일 과학'이니 '유대인 과학'같은 것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함축하는 목표는 지도자, 또는 어떤 집권 세력이 미래뿐 아니라 과거도 통제하는 악몽 같은 세계이다. '지도자'가 이러이러한 사건에 대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일어난 적이 없게 된다.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말하면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되는 것이다. 나한테 이런 전망은 폭탄보다 더 두렵다. 그리고 지난 몇 년 간 우리가 겪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언급은 경솔한 것이 아니다.
p256.
우리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권은 반드시 붕괴되고 만다는 신비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 지배가 암시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노예제국들의 존속기간과 현대 국가의 존립기간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문명들은 무려 4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고대에 관해 생각해보자. 대대로 등 위에 문명이라는 것을 짊어져온 수억 명의 노예들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리스 및 로마 역사 전체를 통해 우리가 이름을 아는 노예들은 몇이나 되는가? 내 경우 두셋 정도가 고작이다. 한 명은 스파르타쿠스이고 다른 한 명은 에픽테토스다. 또한 대영박물관 로마 전시실에는 '펠릭스가 만들다'라고 제작자 서명이 새겨진 유리 항아리가 있다. 나는 가련한 펠릭스를 마음속에 그려보는데(머리카락이 붉고 목에 쇠고리를 찬 갈리아인) 사실 그는 노예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확실히 알고 있는 노예는 단 둘뿐인데, 아마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머지는 완전한 침묵 속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p257.
프랑코에 대한 저항의 중추는 스페인 노동계급, 특히 도시 노동조합원이었다. 길게 보았을 때(길게 보았을 때 그렇다는 걸 명심하라)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대항세력이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 노동계급이야말로 사회를 품위 있게 재건함으로써 가장 많은 이익을 내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이나 부류와는 달리 노동계급은 영원히 매수당할 수 없는 계층이다.
p258.
지식인들은 파시즘에 반대하여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상황이 절박해지면 그들 중 상당수가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따질 만큼 멀리 내다보는 자들이기도 하고 또 쉽게 매수당하기도 한다(그래서 나치는 그들을 매수하는 것에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다). 노동계급의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너무 무지해 그들에게 행해지는 수법을 눈치채지 못하며 또 파시즘의 약속을 쉽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조만간 다시 투쟁을 계속한다. 파시즘의 약속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직접 몸으로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p259.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간단히 말해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다운 삶이 이제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점점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목표에 대한 의식은 조수처럼 빠져나갔다가 밀려오기도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잠시 동안 의식 있게 행동하며 자신들이 도달하고자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고 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이유로 공화국 정부 아래에서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삶은 묘한 활력을 띤 것이었다. 민중은 공화파가 그들의 동지이고 프랑코가 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에게 빚지고 있어서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스스로 싸워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p264.
내 생각이지만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보다는 싸우다 정복당하는 쪽이 낫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옳은 일이다.
p266.
남루한 군복을 입은 그의 행색과 강인해 보이면서도 애처롭고 순박한 얼굴을 기억하노라면(아, 정말로 생생하다!) 전쟁의 복잡하고 부차적인 문제들은 사라지는 것 같으며, 어쨌든 나는 누가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안다. 권력 정치와 언론의 거짓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핵심 이슈는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타고난 권리라고 알고 있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중략)
그는 나에게 많은 나라에서 경찰에 시달리는 유럽 노동자계급과, 스페인 전장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가득 메우고 있고 지금은 강제수용소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꽃을 상징한다.
p267.
그들은 모두 잃을 게 있는 사람들, 또는 계급사회를 염원하고 인류의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 지향을 두려워하는 자들인 것이다.
p268.
나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누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류의 진정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궁핍과 가혹한 노동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 영속성에 대한 믿음이 퇴락하고 있다는 점인데, 보통의 인간들이 소처럼 일을 하거나 비밀경찰의 공포에 떨고 있는 한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p270.
그는 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네
내가 책에서 서서히 익힌 것들을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을까>
p277.
그들의 행복은 오로지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원한 행복을 그리려는 시도는 모두 지금까지 실패로 끝났다.
p282.
이런 주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대목을 들자면 아마도 테르툴리아누스가 설명했던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즉 천국의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자들이 고문받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p285~286.
'자선'이 없어도 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우리는 배당금을 받는 스크루지와 다리에 결핵이 걸린 타이니 팀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그렇다면, 고통 없고 힘들지 않은 유토피아를 목표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리뷴> 편집자들이 반대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행복은 하나의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렇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표는 인류애이다.
p287.
유토피아를 창조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치통 없는 세상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치통 환자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소중했던 뭔가를 끝없이 영속화함으로써 완벽한 사회를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인류는 계속 나아가야 하고, 거대한 전략이 준비되어 있지만 자세한 예언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완벽을 상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공허함을 드러낼 뿐이다.
<자유와 행복>
p302~303.
이 소설이 왜 출간 금지를 당했는지 이유는 분명하다. D-503과 I-330 사이에 오간 아래 대화(약간 축약했다)를 보더라도 이 소설은 검열당하기 충분했다.
"당신이 제안하는 것이 혁명이란 걸 알고 있어?"
"물론이지. 혁명이야. 문제라도 있어?"
"혁명이란 있을 수 없어. 우리 혁명은 마지막으로 끝났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는걸."
"이봐, 당신은 수학자야. 마지막 숫자가 무엇인지 말해봐."
"무슨 말 하는 거야, 마지막 숫자라니?"
"그럼, 가장 큰 숫자는?"
"그것 참 터무니없군. 숫자는 무한대야. 마지막 숫자는 있을 수 없어."
"그렇다면 왜 마지막 혁명이라는 말을 들먹이지?"
(중략)
이 소설은 실제로 기계, 다시 말해 인간이 병에서 무분별하게 꺼내지만 도로 집어넣을 수 없는 정령에 대한 연구이다.
<고물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
p311.
하지만 고물상의 매력은 싼 물건을 찾아내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 고물 중 5퍼센트 남짓만 가지고 있는(후하게 잡아 그렇다) 미학적 가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매력은 아이에게 구리 못, 시계태엽, 레모네이드 병을 깨서 갈아 만든 유리구슬 등을 모으도록 하는 우리 내면의 본능에 있는 것이다. 고물상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사아겠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사고 싶어 할 필요도 없다.
<코앞에서>
p326.
아무튼 이것은 상반되는 두 가지 신념을 동시에 믿는 힘이다. 분명하고 바꿀 수 없으며 조만간 직면하게 될 사실을 무시하는 힘은 이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p331.
대체로 정치적 예측은 틀리게 마련이지만, 예측이 맞을 때에도 그 이유를 대야 그런 의견이 분명한 타당성을 지닐 수 있다. 대체로 소망 혹은 두려움 중 하나가 현실과 일치할 때 자신의 정치적 판단은 옳게 된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더라도 물론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런 감정을 자신의 사고와 어느 정도 분리시켜 수학 교과서대로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다.
<어느 서평가의 고백>
p338.
나머지 책에 대한 서평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건 욕을 하건 간에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 속으로 한 번에 한 컵씩 흘려보내는 것이다.
<유럽 통합을 위하여>
p370.
가톨릭교회는 자체의 신분이 보장된다면 사회주의와 타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한 조직으로 살아남게 된다면 진정한 사회주의의 설립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영향은 언제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반대하고, 인간의 평등을 반대하고, 지구상의 행복을 증진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p371.
그래도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핵폭탄 투하를 막을 만큼 충분히 짧은 시간 안에 현실화될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있다면 오직 유럽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중략)
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명백히 미래가 없는 관계로 영원할 수 없다. 그러니 미국에서 다음 변화가 더 나은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
p372.
하지만 우리는 한 세대가 이전 세대의 사고를 거부하는 경향은 내무인민위원회도 뿌리 뽑지 못하는 변치 않는 인간의 특성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의 문학상 수상에 대한 의문>
p377.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입장, 즉 미학적 진실성과 상식적 예절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라는 입장에서 판결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두 개를 별개의 사안으로 간주해서 그가 훌륭한 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정치적 경력을 용서해주는 일은 없도록 하자. 그는 훌륭한 작가일 수 있다(난 개인적으로 항상 그를 겉으로만 그럴싸한 작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작품을 구실 삼아 다른 것을 덮어버리려고 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터이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