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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이안] Coram Deo! 7 完

신이 바란 결말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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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천재는 질투받지 않는다. 차이안은 황도로 돌아와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며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가 황도에 놓고 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백작령의 일도, 황실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의 자리도, 황제의 총애와 다른 음악가들의 선망도. 그의 자리는 언제든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자들의 마음으로 비워져 있었다. 다른 이로 채웠다가 다시 내어주는 게 아니었다. 차이안이 아니라면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위해 준비된 자리만이 완벽하게 남아 수 개월을 버텨냈다. 이럴 수가 있나? 차이안은 경의 의자를 무대에 둔 채 연주했다는 악단의 플루리스트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제 것이 그대로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데 무언가가 마음에 걸려 순수히 반길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마치 차이안이 서도윤을 만났던 사실 자체를 지워내는 것 같이 느껴졌다.

황도로 돌아온 뒤 이어진 첫 공연. 자유롭게 움직이는 왼팔을 느끼며 차이안은 마음을 정했다. 그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 바이올린을 켤 것이 아니었다. 시간에 지워지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지. 압도적인 축포가 쏟아지던 공연을 마무리 하고 3일 뒤, 황실의 제1바이올리니스트는 사표를 내던졌다. 사표가 사라진 그 품에 황명을 안게 된 것은 예상 외였으나 차이안에게 있어 분명한 소득이기도 했다. 오래토록 기다렸던 배알의 순간, 황제는 마치 그가 이럴 것이라는 걸 안 것처럼 미리 작성해둔 칙령서를 내려주었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이안을 굽어보며 늙은 황제가 나직이 속삭였다.

'네가 그 반마의 일에 마음 쓰고 있음을 짐이 모를 줄 알았느냐.'

'…폐하.'

'마음이 풀리거든 황궁으로 돌아오라. 짐은 아직도 네 음악을 놓지 못하겠구나.'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차이안을 물렸다. 떠밀리듯 밖으로 나온 차이안은 잠시 황궁을 돌아보았으나 곧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이 향한 곳은 이 제국에서 가장 큰 신전이자 가장 많은 신관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단심문관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을 갖춘 유일한 곳이며 나아가 모든 예언과 악, 마魔를 다루는 신성구역.

대신전.

본디 황실과 신전은 분리 되어 있으나 서로의 의사를 아주 무시하지도 않았다. 이안이 들고 간 칙령서를 본 대신관이 끌끌 소리내어 웃었다. 인자해 보이는 노인은 동그란 안경 너머 주름 진 눈을 찡긋거리며 이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무언가 관통해 보는 듯한 눈길에 이안의 낯이 희미하게 굳었으나 대신관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방글방글 웃었다. 과연, 과연.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대신관이 이안을 신전의 안쪽으로 이끌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새하얀 건물이 이안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새하얀 바닥, 새하얀 벽, 새하얀 기둥. 간간이 보이는 푸른빛이 아름다웠다. 이안은 대신관을 따라가며 어린 예비 신관들과 나이가 제법 있는 신관들을 보았고 눈에 익은 갑옷을 걸친 이단심문관을 보았다. 이안의 시선을 느낀 그들은 인사해오기도 했고 때로는 말을 건넸으며 근사한 경례를 보여주기도 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고 있다며 아이들을 소개해주는 대신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신전의 더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안쪽으로 향할수록 소음이 줄어들고 차분한 적막이 공기를 메웠다. 공기는 깨끗하고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차가운 구석이 있었다. 이안이 그 말을 전하자 대신관은 그저 웃으며 답했다. 그것이 신의 뜻 아니겠습니까. 딱히 할 말이 없어 이안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이윽고 도착한 서고에서, 이안은 대신관이 예지의 서를 꺼내오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 모든 예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꺼운 서를 한장한장 넘긴 대신관이 한 대목을 짚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반마를 구속하며 내려왔다는 예언이 주름 진 손가락 아래 반듯이 적혀 있었다.

"이게……."

"예, 백작님께서 찾으시는 예언입니다. 예언의 죄인은 반마 슈테펜 로스고, 반마의 죽음으로 희망과 의지와 등불을 얻을 신의 딸아들은 곧 백작님이시지요."

"제가 말입니까?"

"예, 백작님의 왼팔은 대신전의 치유신관들도 포기한 것이지요. 반마의 자폭으로 회복되셨다 들었습니다."

움찔, 이안의 손끝이 튀었다. 보름 가까이 지났음에도 그 순간의 기억이 바로 어제일 같이 또렷하기만 했다. 서도윤의 가슴을 물들이던 푸른빛과 부스러져 재로 화하던 신체, 피로 흠뻑 젖은 채 웃어보이던 그 얼굴까지. 차이안의 동요하자 대신관이 따뜻하게 웃으며 담요를 건넸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않았지요, 백작님. 보드라운 담요를 어깨에 두르며 차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백작님, 백작님께서 예언을 찾으신 까닭이 단지 지난 일을 복기하기 위함이 아님을 압니다. 아마 백작님의 마음에 걸리는 문장은 이것이겠지요?"

노인의 손이 예언을 가로 질러 한 문장을 가리켰다. '마침내 그가 새로이 태어날 수 있게 하소서.' 그 문장을 물끄러미 쳐다본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이 인자하게 속삭였다.

"사실 이단심문관의 검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

반마.

반은 인간이요, 반은 악마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를 이른다. 역천의 피와 순리의 피를 모두 잇고 있으니 이는 곧 제가 살 세계를 선택할 수 있음이라. 악의 핏줄로 인해 신성검으로 사멸되는 것이 마땅하나, 아주 소수의 반마는 신성검으로도 사멸되지 않고 스스로의 역천을 버려 인간이 되기를 택한다. 이때에 신성검은 반마의 몸에 남은 악의 핏줄을 모두 태우니 진정 역천을 버린 이는 살고 그렇지 못하면 사멸하리라. 이들을 인간으로 정의해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오랜 논의가 있었음이 자명하다. 기나긴 논의 끝에 대신전이 결정하였으니, 마력과 힘과 악의 핏줄을 모두 잃은 자만을 인간으로 정의한다.

인간이 된 반마는 더 이상 악의 존재가 아니니, 신관들은 다만 그를 가엾게 여겨 인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라.

*

언 땅이 모두 녹아내린 계절, 차이안은 어느 시골 마을로 향했다. 마을 변두리에 낡아빠진 성당이 있는 마을은 과연 번성한 마을 사이에 끼어 있는 탓에 여관의 시설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여관 주인에게 인사하고 익숙한 방의 값을 지불한 뒤 바이올린을 짊어지고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아, 청년, 그 성당 말이야, 곧 싹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다 하더라고. 길 가던 저를 붙들고 전해준 소식에 차이안이 가벼운 감사를 전했다. 가판대 앞에 선 여자는 낄낄 웃더니 고마우면 이쪽에서 빵이나 하나 사 가달라 부탁했다. 다시 성당으로 향하는 차이안의 팔에는 바이올린 케이스와 빵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거의 다 부서진 성당의 모습은 차이안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똑같았다. 한 면이 뚫리다시피 한 것과 다 부서져 나뒹구는 성당 의자들이 그러했다. 서도윤이 마법으로 마구 헤집어 깨진 바닥 타일도, 그가 마지막으로 추락해 금이 간 곳도 그대로였다. 차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가 어느 한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낡은 악보가 있었다. 언젠가 서도윤이 제게 내밀었던 성가의 악보였으나 그 뒤에 마구잡이로 낙서 된 글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 싸우면서 같이 찢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안이 그쪽으로 발을 돌려 악보를 주웠다.

무슨 말을 적어놓은 걸까. 웃으며 글에 시선을 꽂은 순간이었다.

'황도에서 만나, 이안.'

급하게 휘갈긴 듯한 문장. 거친 필체가 재를 손끝에 묻혀 그은 양 투박했다. 상세한 설명 하나 없이 그저 본론만을 담은 간결한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누가 이 글을 썼는지까지.

더 볼 것도 없었다. 이안은 곧장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산산이 부서졌던 몸을 다시 인지한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빛 때문이었다. 그 따뜻한 온기와 부드럽게 감싸안는 듯한 감각. 오래도록 저를 얽매왔던 빛이 따뜻하게 느껴질 거라 상상이라 한 적이 있던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려 뻥 뚫린 천장을 보았을 때, 그는 봄날의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달았다. 모든 게 눈부셨다. 눈부시고 아름답고 찬란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앉자 다 부서진 성당이 보였다.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과 똑같았다. 신성검이 제 심장을 찌르고 제가 진명와 존재를 내걸어 이안의 팔을 고쳤던 그 순간과.

헉. 그가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가슴팍을 문질렀다. 옷을 걷어내자 검에 찔렸던 가슴은 흉터 없이 매끈했다.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통이 부서지는 것을 분명 느꼈건만. 멍청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제 몸 안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구속을 풀며 미친듯이 넘쳐흐르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전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더라니 그는 마력도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 완전히 인간이 된 것 같으니 핏줄마저 잃었다 함이 옳을까? 그는 바보 같이 주저앉아 상황 파악에 힘 썼다.

한참 뒤 그가 깨달은 것은 첫째, 그의 몸에 흐르던 반쪽짜리 인간의 피가 그를 살렸다는 것과,

둘째, 이안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반마 슈테펜 로스가 아니게 된 한낱 인간 서도윤은 그저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 무너져내린 성당을 뒤져 오래된 악보를 찾아내 언젠가 반드시 전하고 싶었던 말을 써내렸다.

*

똑똑.

"실례합니다, 여기 황실의 제1바이올리니스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약속한 연주를 들으러 왔다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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