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커미 샘플 4
명일방주 스펙터 드림/약고어
종족의 자기 보호 본능은 때로는 매우 잔혹해진다.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젊은 헌터 한 명의 몸을 꿰뚫고 찢어발겨 걸레짝만도 못한 고깃덩어리로 만든다. 어느새 스펙터의 눈 앞에는 바다로 흩어지는 진득한 핏물과 피 냄새만이 가득하다. 지독한 갈증을 일으키는 냄새. 동시에 지독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냄새. 원시의 바다는 피의 색을 띠었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뭉글뭉글 피어나는 피안개 속에서 오늘도 스펙터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손목이다. 차마 바다 괴물들이 찢어발기지 못한 그 손은 마치 지금이라도 스펙터를 잡을 것처럼 펼쳐져 있다. 저 손을 잡으면. 잡으면 어떻게 되지? 비록 고깃덩이만도 못한 손이지만 그것을 잡으면 무언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 손은 모든 것의 열쇠였다. 하지만 스펙터는 손을 뻗지 못한다. 마치 해류가 그녀의 몸을 휘감은 것처럼.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로렌티나는 눈을 뜬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푹신하지만 푸석푸석한 침대다. 에기르의 액체 침대를 구현해낼 수는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평소였다면 이 푹신한 건조 침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런 악몽을 꾸고 난 후에는 영 불유쾌한 기분을 준다. 로렌티나는 몸을 일으킨다. 오늘은 그녀가 이 꿈을 다섯 번째로 반복하는 날이었다.
갈라테이아는 붉은 피를 흘린다
어비셜 헌터 x 로렌티나
-이런 **. 황새치. 저 정말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아요.
황새치라 불린 고고한 여자는 언제나 그렇듯 로렌티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로렌티나는 그녀의 앞에서 허탈하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같은 어비셜 헌터즈. 같은 에기르인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에기르인들은 자신의 꿈이나 정신상태에 대해. 특히 악몽 같은 가벼운 기복에 대해서는 ‘조력자’ 의 도움을 받는다. 만약 그 에기르인의 정신 상태가 심각한 선을 넘으면 ‘조력자’ 가 알아서 병원행을 조언해줄 것이다. 하지만 육지에는 ‘조력자’ 가 존재하지 않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메딕 중 일부는 어비셜 헌터즈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로렌티나가 맘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은 같은 어비셜 헌터즈인 황새치. 즉 글래디아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로. 로렌티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에기르 비속어까지 섞어 가며 그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더 기분이 나쁜 건 그런 꿈을 꾸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단 거에요.
-아무런 감정도?
-보통 악몽을 꾸면 식은땀이라던가 그런 게 나지 않나요? 그런 게 없어서, 더 찝찝해요.
-꿈에서 나온 헌터의 얼굴은 기억하나요.
-흰 단발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복식은.
애매하게 뭉그러진 꿈의 편린을 드문드문 입에 담던 로렌티나의 말에. 한참을 생각하던 글래디아는 다시 입을 연다.
-갈라테이아로군요.
-...뭐라고요?
꿈 속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로렌티나가 들은 목소리는 마치 꿈 속의 무언가처럼 뭉개지고 있었다. 로렌티나는 그 목소리를 해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목소리는 갈수록 일그러지고 뒤틀려.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로렌티나.
-...네?
들리지 않는다. 헌터의 목소리가. 헌터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공포감이 순간 온 몸을 조수처럼 타고 밀려왔다 사라진다. 드디어 헌터들에게만 있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것인가. 다음 순간이면 글래디아의 작살이 자신을 향하는 걸까. 하지만 로렌티나의 예상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글래디아는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방어기제로군요.
-방어기제?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었을 때. 특정 정보를 뇌에서 무시하곤 한다는 건 알고 있겠죠? 에기르의 기초 교육에서도 배우는 내용이니까요.
-그거라면 들어보긴 했어요. 제게 일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로렌티나. 당신도 인간입니다.
-그거야 그렇겠죠.
-스스로 강인한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해도 언제든지 정신에 손상이 올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죠.
–... 꽤 자존심 상하네요. 그 사실은.
-자존심까지야. 문제가 심하면 다시 부르도록 하세요.
상담해줘서 고마워요, 황새치. 그리 말하고 로렌티나는 일어났다. 그녀가 열 걸음 정도를 걸어 복도에 들어선 순간. 로렌티나. 로렌티나. 로렌티나. 그리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새치? 그리 부르며 뒤를 돌아선 로렌티나는 복도의 끝이 암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눈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로렌티나. 우리의 로렌티나. 목소리는 좌향에서 들리다가 우향으로 흘러간다. 위에서 들리다가 아래에서 속삭인다. 멀리서 손짓하다가 귓가를 간질이기도 한다. 마치 어디에나 있는 해류와 바다같이 그녀를 유혹한다. 로렌티나. 나의 로렌티나… 나를 찾아줘. 나를 잡아줘. 나를 기억해줘. 죽여줘. 죽여줘. 살려줘. 죽여줘… 바다 동굴 속 시테러의 합창과도 같이 소리가 울려퍼진다. 아니. 그때의 그 바다에서 있었던 모든 목소리가 갈라테이아의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한 순간. 바다가 갈라지듯 소리가 죽는다. 로렌티나는 거부할 수 없는 졸음을 느낀다. 로렌티나는 벽을 잡고 주저앉는다-
스펙터는 바다 괴물을 죽이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자유로워서. 마치 별바다를 날아오를 수 있을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하게 큰 해신에게는 그 원형의 날이 닿지 않아 애가 탄다. 마치 끝나지 않는 춤을 추는 것 같다. 붉은 구두를 신은 것처럼 느껴진다. 헌터 하나가 쓰러진다. 스펙터는 톱을 휘두른다. 헌터 둘이 조각난다. 스펙터는 톱으로 단단한 키틴질의 껍질을 가른다. 헌터 셋이 으깨진다. 이제는 스스로도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전기톱의 진동에 손이 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멈출 수 있는 이유는 이 춤에 종족의 존속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멀찍이서 보면 춤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런 것이다.
해신이 울부짖는다. 해양 생물의 울부짖음은 해저 동굴의 벽을 타고 내장 깊은 곳까지를 뒤흔들어 놓는다. 아니. 울부짖는 것은 해신이 아니다. 그녀는 분명히 듣는다. 자신의 이름을. 로렌티나. 로렌티나. 어디 있어? 해류를 타고 떠다니던 손목을 떠올린다. 절단면을 제외하고서는 대리석으로 깎아낸 것처럼 흰 손목을… 그것은 말한다. 너는 로렌티나가 아니야. 우리의 로렌티나는 더러운 돌을 품고 살지 않아. 너는 로렌티나가 아니야.
너는 망령(specter)이야, 너는 망령이야, 너는 망령이야.
우리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망령이야!
그녀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치는 여린 손가락이 아프다. 스펙터는 자신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낀다. 스펙터는 눈을 감는다. 다시금 졸음이 밀려온다.
-광석병 발작은 아니야.
-그거 참 희망적인 소식이네요, 제가 완전히 정신병자가 되었단 소리같이 들려요.
-상어. 말투에 주의하도록 하세요,
글래디아의 일침에 로렌티나는 배시시 웃었다.
복도에서 주저앉아 발작 비슷한 증세를 일으키는 로렌티나를 부축해서 억지로 의료부에 데려온 것은 글래디아였다. (그 외에 누가 있겠냐만은.) 그리하여 켈시와. 이름 모를 정신과 메딕과. 글래디아와 로렌티나는 의무실에서 사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차트를 한참 바라보던 이름 모를 정신과 메딕이 입을 연다.
-혹시 그림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그림보다 조각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뭐든 그려보고 깎아보는 건 어때요? 손바닥만한 작은 조각상도 좋고. 남는 비누를 조각해도 좋아요. 어떤 형태든 좋으니 깎아서 가져와줄 수 있나요? 창작은 무의식 깊은 곳을 반영하거든요.
못할 건 없었다. 로렌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켈시는 간단하게 조각할만한 재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치료의 일환이니 자재값은 네 월급에선 안 까도록 하지. 그리 말한 켈시는 떠났고. 로렌티나는 켈시가 말한 대로 지하 창고로 향했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부산물을 추출해내기 위한 원암들을 많이 채취해두고 있었다. 로렌티나가 발견한 것은 제 키를 아슬하게 넘는 흰 돌덩이였다. 온전히 희지는 않지만 창백한 빛을 띄우고 있는 거대한 암석. 로렌티나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갑다. 그리고, 무언가가 손 끝에 걸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흰 돌은 일반적으로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다. 바닷속 조개와 뼈의 부산물이다.
홀리듯 로렌티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 돌. 가져가도 되나요?
이후의 일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녀는 정과 해머를 들었다. 시험관 안에 갇혀 있었던 자신처럼. 그 안에 갇혀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조각가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돌 안에 있는 형태를 읽어내는 사람만이 조각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렌티나는 분명히 보았다. 희고 창백한 돌 안에 잠들어 있는. 손을 뻗은 채 굳어버린 헌터의 모습을. 아. 갈라테이아. 나의 갈라테이아. 홀로 잠들어있었던 나의 조각상이여.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히던 나의 악몽이여… 로렌티나는 정과 해머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돌을 조각한다.
드문드문 인체의 형태가 드러나기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뭉툭하고 정제되지 않은 형태일지언정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도 알 정도가 되기에는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스펙터는 경건한 마음으로 돌을 쪼았다. 한 번의 망치질은 이미 떠나간 동료를 위해. 한 번의 망치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나를 위해. 마지막의 망치질은 너와 내가 만들어내어 영원히 존속할 에기르를 위해. 일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깎아낸 후에야 로렌티나는 비로소 돌 안에 있는 형태를 온전히 구해낼 수 있었다.
헌터였다. 무언가를 향해 간절히 손을 뻗는 헌터.
그제서야 로렌티나는 갈라테이아를 기억해낸다. 2대대의 헌터. 눈에 띄지 않는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2대대의 일원이었고 해신 이샤믈라와의 사건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마지막 말로. 인간으로 죽어야 한다고, 꼭 인간으로 죽어야 한다고 수 번을 당부하며 해류에 잘게 찢겨내려간 그녀를. 그제서야 로렌티나는 기억해낼 수 있었다. 풀썩. 로렌티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흰 돌가루가 마치 안개처럼 날렸다. 다시금 일어난 로렌티나는 자신을 향해 뻗은 조각상의 손을 잡는다. 조각상을 향해 춤추듯 다가가 제 가슴에 대리석으로 된 손을 얹는다. 심장박동이 전해지도록. 자신이 인간으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당신과 이름이 같은 조각상이 있어요.
피그말리온이 깎아낸 평생의 역작. 돌 안에서 살아 숨쉬는 여인을 깎아낸 오래된 이야기를 로렌티나는 떠올린다. 모든 걸 쏟아부은 몸에 기분좋은 탈력감이 감돈다. 그건 마치 한참동안 수영을 하고 난 후 햇살을 받으면 느껴지던 기분과 같아서. 로렌티나는 헌터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지근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로렌티나는 손을 뻗어 자신이 깎아낸 악몽의 눈꺼풀을 쓰다듬는다.
-편히 잠들기를. 갈라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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