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커미 샘플 3
병사/장례
우리는 모른다.
아주 먼 미래에 근원의 돌이 어떻게 이 대지를 파멸시키는지. 저 먼 하늘에는 뭐가 있는지. 북쪽의 재이와 남쪽의 해사가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지. 쉐이와 베헤모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떠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주 먼 옛날에 라이타니엔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라테라노가 얼마나 경건했는지. 이베리아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그리고 우리의 손에 쥔 유적 조각 하나가 얼마의 가치와 얼마의 시간을 품고 누군가를 기다려 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하늘길
T x N
모래바람이 불었다. 묫자리로는 별로 좋지 않은 곳이었다. 본래 나이츠모라의 전사들은 풍장(風葬)을 하곤 한다. 시체를 사막이나 평원에 두어 비스트들이 쪼아먹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츠모라는 다시 자연과 하나가 된다. T은 그리 되어도 별 상관은 없다고 말했으나 N는 그에게 묫자리를 찾아주고 싶었다. 아. 오해는 말길. 그의 유일한 부하인 T은 지금 발걸음이 뭐 이리 빠르냐고 고함을 지르며 오십 미터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건강한 편이었다. 흔히들 회광반조라고들 한다. 황혼의 태양이 가장 찬란하고 꺼지기 직전의 불이 가장 강하게 타오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도스 아일랜드 중환자실에서 쓰러져 있던 T은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
‘묫자리나 찾으러 가죠. 마지막으로 걸을 수 있을 때 사르곤 땅이나 좀 걷고 싶습니다.’
켈시는 어림잡아 다섯 번 정도 경고했다. 자칫하면 광석병 발작이 일어나도 오지라서 도움을 받기 힘들 수도 있으며.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남겨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T은 매우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섯 번을 전부 똑같이 그래도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대검을 등에 메었고 지팡이를 손에 짚었다.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고 절뚝거리는 게 누가 봐도 병자였으나 T이나 N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N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켈시의 말대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남은 치료를 받는다면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살 수 있을 터였다. 기껏해야 일 주일? 온 몸에 링거줄을 매단 채로 일이 주 정도 더 버티다가 끝내 숨이 끊어질 터였다. N는 그 투명한 재질의 관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N는 T에게 환자복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N는 T과 걷고 싶었다.
그리하여 N은 비틀거리는 제 부하의 팔뚝을 잡고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켈시한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몇 어린 오퍼레이터들은 천진하게 웃으면서 예쁜 언니랑 꼬질이 아저씨 또 오세요! 라며 인사를 건넸다. 잔인할 정도의 천진함에 말문이 막힌 N를 대신해 T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같은 도적 새끼들 자주 마주치면 못쓴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는 마치 보물상자에서 발견해낸 귀한 수정구슬들이 부딫히며 내는 소리 같았다. 그제서야 N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보물 찾아서 돌아올게!
N가 사색에 빠진 사이 T이 거리를 좁혀 왔다. 그는 몇 번 거칠게 숨을 내뱉고 투덜거렸다.
-대장. 대체 절 어디 묻으시려고 이러는 겁니까? 일단 힘을 빼서 지쳐 죽게 두려는 건 아니죠?
-오아시스. 오아시스를 찾고 있어.
-굳이요?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오아시스가 사막의 보석 아니겠어?
-예에. 계속 말씀하시죠.
-내 가장 소중한 부하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보석 옆에 묻는 거야.
-대장은 가끔 보면 참 소녀감성 이십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N는 실눈을 떴다. 지평선부터 바로 발치 앞까지의 땅을 잡아먹을 듯 훑어보았다. 다시금 모래바람이 불었고. T이 마른 기침을 몇 번 했다. 사실은 이 땅에 오아시스 따위는 없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녀는, N는 오아시스를 찾고 싶지 않았다. 너를 오아시스에 묻겠노라 큰소리를 떵떵 쳐놓고서는 아이러닉한 일이었지만. 오아시스를 찾으면 T이 죽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모래바람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비벼야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정말로 야속하게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오아시스. 저기 있네요.
T의 거친 손이 N의 손을 뒤에서 감싸 잡았다. 그 손은 곧 N의 손을 대신 들어 지평선 너머의 한 점을 가리켰다. 분명히 푸른 빛이 순간 반짝인 것도 같았지만 N는 짐짓 모른 채 다시금 물었다. 저기? 저긴 아무것도 없는데? 너 광석병으로 눈이 나빠진 거 아냐? T이 부스스 웃었다. 그가 손을 놓자 N의 손이 그대로 툭 떨어졌다. 땅에 대검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T은 괴상한 확신을 품었는지 느릿느릿 지팡이를 짚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느린 발걸음이라 따라잡고자 하면 쿠란타인 그녀로서는 한순간에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도 도무지. 도무지 발걸음이 옮겨지지를 않았다. 왜인지 T이 돌아올 수 없는 멀리로 떠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멀어져서는,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곳으로…
N는 다급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T은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푸스스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가끔 보면 대장은 어리광쟁이에요. 그는 중얼거렸다.
-난 분명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이 빌어처먹을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겁니다.
오아시스에 담근 맨발이 시려왔다. 비록 죽기 일보직전이라면 먹어서는 안 되는 고인 물이었지만 적어도 물만큼은 매우 맑아 보였기에. 더위를 식힐 겸 시작한 족욕이었다. 둘의 가방 안에는 일주일치 식량이 들어있었다. 근처에는 나무그늘도 수두룩했으므로 만약 T이 죽지 않더라도 여기서 며칠 묵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는? 음. 로도스에 돌아가서 켈시한테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야지. 돌아오는 건 T이 죽은 후 다시 시체를 묻으러 오는 걸로 충분했다. 그것도 모르고 T은 지금 자기를 생매장하냐고 실없는 소리나 해댔고 참다못한 N는 그의 머리를 한 대 후려갈겼다. 그리고 지금. 침묵이 이어지는 도중 T은 꽤나 괴상한 소리를 꺼냈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
-몰라요. 죄 지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왜. 그 극동에서 온 상인이 그랬잖습니까.
-그 콜람 상 팔던 사람?
-예에.
-특이한 사람이었지. 머리도 박박 밀고…그래서. 다시 뭘로 태어나려고?
-몰라요.
그는 끌끌 웃으며 여전히 발을 담근 채 뒤로 누워버렸다. 사막의 밤하늘은 찬란했고.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가 하늘에 박힌 별의 길처럼 한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천도란 하늘의 길이란 말도 되던가… 그가 침묵하며 밤하늘을 바라보자 N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파디샤로 태어나면 좋겠어?
-그건 싫습니다.
-칸으로 태어나면 좋겠어?
-그것도 싫습니다. 난 도적질이나 할랍니다.
-넌 도적질 하다 죽어놓고 또 도적질이야?
-대장 부하로 태어나야 하니까요.
T은 다시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뭐가 그리 웃긴지 N도 웃음을 터트렸다. 물고기가 흩어지며 그들의 발을 스쳤고.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오아시스 전체가 같이 웃는 것처럼.
-그때 되면 젊은 나는 없다? 나도 나이를 먹어. 아마 네가 다시 태어나 도적질을 시작할 때쯤 나는 네 나이일 거야.
-상관없어요. 나는 식언은 안 합니다. 내뱉은 말 주워먹는 게 사내새끼로서 할 일입니까.
-너 예전엔 내뱉은 말 많이 주워먹었다며.
-사기치다가 배에 칼 맞았죠. 그것 때문에 수명이 이십 년은 줄은 것 같은데…
-...
-대장, 속상합니까?
-지금 안 속상하면 그게 사람이겠어? 결국은 네가 병에 걸린 건…
고요한 한숨 소리가 낮게 울려퍼졌다.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뜨리고 도망쳤다. N가 아무렇게나 펼쳐진 붉은 머리카락을 다시금 묶고 T의 옆에 드러누웠다. 손이 맞닿았고. 이내 두 손은 깍지끼어 얽혀들었다. 그의 손의 굵기가 줄어든 것 같다고. 문득 N는 생각한다. 그러나 손을 잡는 힘만큼은 변함없다. 마른 기침 몇 번이 이어지고 그가 다시금 입을 연다. 조금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여전히 능청스러운.
-대장. 나 멀리 안 갑니다.
-...
-그러니까 이건요. 내 천도인 겁니다. 이 테라 땅 대신 좀 먼 하늘길을 돌아서 오는 내 나름의 천도인 겁니다. 대장이 여기 있는데 내가 왜 안 돌아와요.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할 겁니다.
-그런 게 어딨어. 죽으면 끝 아냐…
-대장 죽어보셨습니까?
-...아니.
-그럼 모르는 거죠. 나도 이런거 원랜 안 믿어요.
-그럴 것 같았어.
-근데 헤어질 때 다 되니까 믿고 싶어지는 거 있죠.
-심경의 변화야?
-심경의 변화랄 것도 없어요. 그냥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구나.
차마 옆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옆을 보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N는 시선을 하늘로 향한다. 마치 길처럼 깔린 은하수를 바라본다. 보름달 직전의 거의 차오른 달과 눈을 마주친 채로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있자니 두꺼운 손이 눈을 덮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서야 눈 위를 빗겨나가는 손에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조금 흘렸음을 안다. 눈치를 챘는지 아닌지. T은 다시금 입을 열어 실없는 소리를 입에 담는다.
-아. 그래도 돌아왔을 때 늙어서 쭈글쭈글해진 대장은 지금보다는 좀 별로… 으윽. 지금 병자를 폭행하는 겁니까?
-지금 말은 두들겨 맞아도 싸.
-아니. 왜요. 남자란 다 그런 법..아악!
-이게 양심이 있어야지!
옆구리를 몇번 치다 손을 거두면 T이 신음성을 낸다. 이내 고통에 찬 신음은 작은 웃음소리로 변한다.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한참 후에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장. 좋아해요. 아마 그로서는 처음으로 입에 직접적인 감정을 담는 일이리라. 하지만 N은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나직하게 그 답장을 전할 뿐이다. 응. 나도. 그렇게 그들은 나직나직하게 몇 번이고 바보 같은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수마가 그들을 덮칠 때까지.
T은 그날 새벽 숨을 거뒀다.
아침에도 심장이 멎었을 뿐 온기는 남아있었으니 숨을 거둔 시각은 아마 새벽이리라. 그녀는 혼자 길을 떠나야 함을 알았다. 누군가 그러던가. 모든 관계는 언젠가 떠나야 하는 관계라고. 잠들듯 숨을 거둔 그의 눈은 이미 굳게 닫혀 있어 N가 다시금 감겨 줄 필요조차 없었다. N는 가만히 근처에 땅을 파고 T을 안치하고 묘비 대신 칼을 박아두었다. 마지막으로 단말기에 서툴게 좌표를 기록하면. 그러면, 마치 T이라는 사람은 같이 오지 않은 것처럼 그녀 혼자만이 남는 것이었다. 여전히 N은 단 한 명 뿐인 대장이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여전히 주변에 붉은 빛을 이염시킬 것처럼 붉었다.
삶은 길었고 N은 걸어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올 때 집을 찾았노라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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