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자

霜失

² 명사: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그 위로 켜켜히 눈이 쌓이는 것, 걷잡을 수 없는 것, 모든 애도가 끊길 무렵 혼자 남겨진 것, 비 올 일 없는 사무치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 무엇을 기다리냐면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 그제서야 돌아보는 것, 이 즈음에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깨닫는 것, 허나 발자국은 덮여 있다고 깨닫는 것,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 북받쳐 울다가 고작 몇 방울 가지곤 어느 하나도 녹일 수 없음을 깨닫는 것, 후에 혼자 자리를 뜨는 것, 방패를 손질하는 것,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였다고 자책하는 것, 다시 돌아가는 것, 목소리를 깨뜨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 그 위로 켜켜히 눈이 쌓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 설원을 탓하는 것, 걷잡을 수 없는 그 모든 것, 설원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 금속질들이 눈 탓에 차가워지는 것, 눈꺼풀이 포기하고 잠에 드는 것, 기어이 차가운 설원에는 나 뿐이라 깨달아버리는 것, 사람들이 이젠 나를 은빛 검날이라 부르는 것, 그러면 사실 이 세상에는 나 뿐이였다고 깨달아버리는 것.

그리하여 영영 없어지는 것.

이것은 霜失에 대한 이야기이다.

霜失

페 마하 Ⅹ

몇 달간 집에 들어오지 않은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얼마 안 되는 집사 급료로 고용한 집사들은 이미 진즉에 보따리 싸들고 튄 후였다. 그 탓에 쌓인 눈이 마당을 잔뜩 덮어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생기 없어 보이는 허여멀건 잔디 위로 진흙과 섞인 눈이 진탕 구르고 있었다. 밑창에 이미 진흙이 끼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더 가관이였다. 왜 창문은 열어놓고 간건지, 간밤에 들이닥친 눈서리와 추위가 반긴다. 달라붙은 진흙은 이미 온도에 의해 얼어붙고 있었다. “다녀왔어” 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 안쪽에서 무언가 쿠당탕 하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아직 돈이 될 만한 걸 덜 챙겼나 보다. 뒤져봐야 나오는 건 없을 텐데. 그 사실을 모른다면 어쩌면 집사가 아닐 수도 있다, 들려오는 숨소리가 익숙치 않았다.

다 꺼진 모닥불에 불쏘시개가 될 만한 것을 몇 개 집어넣었다. 장작이 떨어져 두어개 밖에 넣지 못 한 탓에 아직 부족했다. 결국 받아온 마물 수배서 몇 장도 함께 집어넣는다. 불을 붙여두고 열심히 코트로 펄럭여 부채질 해본다. 붙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파에 쓰러지듯이 앉아 늘어졌다. 주머니를 뒤지면 이미 눈보라에 잔뜩 젖어 또한 불이 켜지지 않는 시가가 잡힌다. 하는 수 없이 금속 케이스에 담긴 싸구려 연초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불을 켜 보면 성냥도 이미 맛이 갔고, 라이터에는 기름이 채워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무얼 해도 안 되는 날이 있었고 그게 오늘인가보다….

탄식하듯이 내뱉으면 저 안쪽에서 들리던 부스럭대던 소리가 잦아든다. 창문으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집에 아무도 없다. 그래, 아무도…. 축 늘어진 몸 위로 저린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얼었던 몸이 녹으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긴장이 풀리면 곧 무표정한 눈꺼풀 아래로 짠내 나는 물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인생이였다. 굳어버린 얼굴과는 반대로 감정만은 솔직했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과 진흙이 끈적끈적하게 녹아 바닥을 타고 흐른다. 곧 집 전체를 잠식할 듯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목 언저리까지 답답한 진흙탕이 차오르고 있었다. 눈물과 진흙탕, 진흙탕과 눈밭, 모든 것이 한데 뒤섞인 이 곳. 이슈가르드는 늘 그렇든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본디 가진 자들이 길거리 도둑보다 더해서 끝내는 외로움까지 훔치고 싶어 하는 법이다.

기어이 일어서면 모든 무기력함이 다시 육체를 끌어내리려 하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무중력 상태인 것 마냥 머리가 붕 뜨는 기분도 든다. 아직 술기운이 많이 남아 있었다. 평소보다 더 진탕 들이마신 덕분이다. 동시에 복부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친다. 고통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긴 시간동안 벼려온 단검은 생각보다 날카로웠고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이 좆같은 인생을 끝내버리는 것도, 별바다인지 뭔지로 돌아가는 것도! 찌지직 하는 가죽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 만든 싸구려 영화의 효과음은 생각보다 리얼했음을 깨닫는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찬공기가 폐를 급하게 채운다.

누군가의 삶은 통제할 수 없었으니 내 인생만큼은 내가 어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입에서 뜨거운 피가 왈칵 하고 쏟아진다. 동시에 얼어붙어가는 피와 붕대가 시야 안에 들어왔다. 아, 맞다. 평소에 칼 맞을까봐 늘 하던 붕대. 드문드문 잘린 붕대가 드러난 살갗과 함께 맞닿아간다. 곧 나는 고통에 몸부림 치며 바닥을 추하게 기었다. 생각해보니 내 목숨은 온전히 내 것인 적이 드물었다. 그러면 그제서야 깨닫는다, 방금 스스로가 저지른 행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완연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오늘만 열댓명은 죽이고 왔는데 고작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일을 마무리 하지 못 했다. 바닥으로 당일 분의 현상금만큼의 금화가 쏟아져 내린다. 손 끝으로 계속해서 몇 닢을 그러쥐어본다. 그러나 손 틈 새로 계속해서 흘러내려가는 것 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온전한 내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당연하게도 내 목숨 또한 내 것이 아니다.

무얼 해도 안 되는 날이 있었고 그건 오늘이였다. 아니, 어쩌면 어제.

· · ·

눈을 뜬 것은 익숙한 저택이였다. 내 집 과는 다르게 벽난로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관념적인 따뜻함을 안겨주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바닥. 축축해진 이마를 한 번 닦고나면 사용인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발소리다. 몸을 일으키면 복부에 통증이 느껴진다. 작은 엘레젠 사용인은 늘 말이 많았다. 내 담당도 아닌 사용인인데. 아마도 동생 쪽이 최근 들어 의젓해져 더 이상 이런 사용인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을까.

사건은 이러했다. 최근 들어 포르탕 가에 연락이 뜸해져 걱정이 된 사용인이 내 집에 찾아왔고, 본 것은 참극. 이 저택의 사람들은 내가 무얼 해서 먹고 사는 지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개중에는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다. 충성을 맹세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복종이 뒤따라오는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친절을 베풀었느냐로 사람의 평판은 갈린다. 이 사용인은 내가 친절을 베푼 인물 중 하나였다. 운 좋게 발견된 나는 채 흘러나오지 못한 내장 위 살덩이를 부여잡고 사용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돈은 나중에 낼 테니 의사를 불러달라고. 제 몸무게보다 두 배는 나가는 핏덩이를 붙들고 저택에 도착한 나는 달갑지 못한 시선과 경악하는 시선을 동시에 받은 것만 기억이 난다.

끝내 자신이 완수하지 못 한 일을 가지고 남에게 화내는 것은 어린애나 할 법한 발상이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대강 쓰다듬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고생했겠네, 걱정했나? 같은 형식적인 말도 꼭 덧붙이고. 친절과 적당한 불쌍함은 늘 사람을 가장 길들이기 쉬운 방법이였다. 몸을 일으키면 다시금 찢어질 것 같은 복통이 덮쳐온다. 그러나 이제 떠나야 할 때다. 여긴 내가 가끔 들리는 곳이지, 집이 아니니까.

덜 꿰매진 복부로 벽난로의 뜨거운 공기가 헤집고 들어온다. 다시금 숨을 참아본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보면 점차 통각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추위가 다시금 살을 마비시킨 탓이다.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면 머리가 맑아지기까지 한다. 유독 아플 복부에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이 이상해 고개를 숙이면, 셔츠 앞이 풀어져 있던 것을 눈치챈다. 어쩐지 유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 여기는 누구도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 내 옷차림 따위에 당연히 신경써주지 않겠지. 돈이라도 좀 있어보였음 말이라도 걸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거리의 구석에 앉았다. 길쭉귀는 오늘 보이지 않았다. 확인 후에 내뱉은 긴 한숨이 입김과 연결되는 것을 멍하니 보면 상처 틈이 벌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피가 흘러내렸음에도 차가운 바닥이다. 흐르는 것보다 식어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도 거지도 똑같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구름안개 거리. 여기서 말도 안 되는 그 애를 만나고 나서 내 피는 검은 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이드 뭐 그런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혹은 아예 모든 것이 그 애로 이루어져 있는 검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도 정말 너랑 하나가 되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시뻘겋게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생각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게 소리 질러도 어느 하나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내가 느끼기로 죽음은 가장 비겁한 도망처라서….

인생이 누더기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준 돈, 어머니에게서 받은 생명, 동생에게서 받은 먹을 것들. 핏줄 섞인 것들에게만 뭔가를 받았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베인 상처를 아물게 하며 달라붙어가는 실. 생판 남에게 받은 방패. 이슈가르드를 지켜달라는 부탁. 그리고 자신이었던 줄 알았던 것에게 받은 앞으로를 살아가 달라는 부탁.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부탁, 혹은 기약 없는 약속. 그래, 계속 함께….

나를 구성하는 에테르는 결국 남에게서 받은 것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나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가 터진다. 누군가 못 다한 삶을 등에 지고 내 의지를 배제한 채 모험을 떠나는 것은 유배당한 삶과 비슷하다. 아니, 어쩌면 여행이겠지. 어차피 내가 돌아올 곳은 이슈가르드 성도가 아닌가. 어딜 가든 그 지긋지긋한 귀족의 뒷모습과 따뜻한 벽난로가 보인다. 그리고 끝내 내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혼자만 편해진 듯한 그 파란 웃음도. 이슈가르드를 지켜달라는 말은 어딜 가나 족쇄가 된다. 나는 어딜 가도 용시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돌려받은 성도의 영웅이다. 좆같은 수식어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이미 진즉 버렸어야 할 누더기 인형이 그렇게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꿰매지고 있었다. 함께라는 단어가 언제부턴가 망령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어째서 인형은 자신을 계속해서 아껴줄 사람을 찾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면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더 이상 웃는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차라리 영원히 가동을 멈춰버린 채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를 애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참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점점 눈이 감겨올 때 즈음 일어났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옷을 멀끔하게 차려입었다.

코트 자락은 원래 여미지 않았으나 추위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괜찮았다. 흘러내리던 피도 초코보를 타고 오는 길에 딱딱하게 굳어 있으니 상관 없었다. 어차피 모험가에게서 피 냄새가 조금 난다고 이상하게 여길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안도한다. 다만 초코보 두 마리가 내 몸을 계속해서 킁킁거렸다. 검은색의 초코보가 유난히 그러는 것이 거슬렸다. 이슈가르드에서 군용으로 키운 초코보는 역시 다르다 이건가. 다른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강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건물 옆에 둘을 붙여두었다. 둘 다 추위를 잘 견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이건 기분 상의 문제다. 내 몸보다 훨씬 큰 문을 열고 이제는 반겨줄 이가 없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반가운 얼굴들이 몇 보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을 보면 그제서야 내가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올 때는 늘 다른 대륙의 보석이나 장신구, 생필품 같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슈가르드 군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라는 걸 세 번 정도 반복한 후에 알게 되었다. 갖다 팔라고 했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라. 결국 그 쪽에서 내 준 코코아를 마시며 벽난로 근처에서 몸을 녹였다. 장명종들은 으레 이런 식으로 애취급을 하고는 한다.

그 이후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누군가의 방문에 우리는 겉면이 조금 탄 크로크무슈를 다 함께 먹었다. 소금간이 많이 된 햄은 추운 곳에서는 좋은 동력원이다. 물론 이런 요리에 쓸 만한 것은 아니다만. 음식의 간 탓인지 서서히 코코아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철없는 애가 자신의 연애사업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실없는 평화에 모두가 웃는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웃을 때마다 고리 갑옷의 철그럭대는 효과음이 좋다고 느껴졌다. 익숙하기도 하고. 그들은 부러 내 앞에서 영웅이라 칭하지 않았다. 내가 관여한 일에 대해 말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다섯이서 모이는 시간은 제법 기껍다.

교황을 쓰러뜨린 이야기가 간만에 나왔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그들도 이젠 내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는다. 그 썩을 놈! 영영 돌아오지 못 할 곳으로 가라지. 술에 취한 사람처럼 과장된 행동까지 취해보였다. 다섯 명 분의 웃음소리가 커진다. 그 뒤로도 화기애애 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내 말에 웃는 것 같았다. 영웅의 말에 웃는다. 간소하지만 나를 위한 식사, 음료, 일부러 자리를 내어준 따뜻한 주황색의 모닥불 옆. 공기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다. 나쁜 것들은 전부 매달아 죽였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게 웃는다. 나는 그 파란 웃음이 좋았다. 더 이상 나는 불행해질 일이 없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한 명이 소리 없이 일어나다 다시 곤두박질친다.

곤두박질쳤다.

해가 산 너머로 곤두박질치며 하늘에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쓰러진 사람의 외마디 탄식이 들린다. 파랗게 빛나는 치유 마법이 곧 포기한 듯이 거둬진다. 총장의 기다란 망토가 하늘에서 호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푸른 용기사는 어째서인지 갑옷을 벗은 채 맨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흰 머리의 치유사가 기어이 손을 내려놓는 순간 생각한다. 방금 전까지 음식을 가져다줬던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곧 나는 영화의 잘 짜여진 대본처럼 다급하게 무릎을 꿇어 쓰러진 사람의 옆에 앉는다. 그 사람은 나에게 다정한 손길을 건넸고, 나는 다급하게 그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맨살이 장갑 위로도 느껴졌다. 간간히 만져지는 흉터는 비현실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차가운 갑주가 아닌 것은 지금은 신경쓰지 않기로 하자. 다음 대사를 알고 있는 나는 금새 얼굴을 만들 수 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 곧 소중한 것이 없어질 사람의 얼굴이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연다. 그의 오른쪽 흰 눈에 나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세게 붙들린 손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 잘 사네?

거울 속에서 32년간 봐온 사내가 소중한 것이 없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 정신을 잃은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스듬한 자세로 잔 탓에 온 몸이 뻐근함을 느꼈다. 그런 나를 반겨주는 것은 다 꺼져가는 모닥불과 거칠한 담요다. 눈 앞에 다 마신 코코아가 컵 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얼굴이 축축하다. 식은땀과 눈물은 이제 눅눅한 일상 속에 자리잡은지 오래였다. 물론 이 눈물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의한 것이다. 체온이 올라가며 아물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늘 따뜻함은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벌어진 상처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교체된 뒤다. 밤을 지새우는 이들은 바뀐 생활에 익숙치 않은지 간간이 졸고 있었다. 저녁 쯤에 온 것 같은데 밖은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네 명 분의 잔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대강 잔을 닦고 있자니 눈을 뜬 보초병 한 명이 본인이 하겠다고 했다. 예의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으나 갑작스레 피곤해진 탓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쥐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어제치 마물 현상금 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대략 한 달 정도는 먹고 살 수 있으리라. 휘둥그레해진 얼굴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다. 여전히 공기는 차갑기만 하다. 나와서 막연히 걸으면 어느샌가 그 애랑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에 도착했다. 커르다스의 전경이 매우 잘 보이는 곳이다. 날아간 꽃을 떠올리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꽃은 이미 땅으로 떨어져 썩었을까, 아니면 닿았을까 하는. 방금 전의 꿈결같은 헛된 생각.

닿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람의 영혼이 늘 생전의 사람을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묘비를 만들고, 그 자리에 꽃을 바치는 행위는 어째서 지금까지 이루어지는가. 가장 가까운 바다에 사람들의 시신을 떠내려보내는 행위는 아주 돌아오지 말라고 지내는 행위 같지 않던가. 나는 시체를 영원히 끌어안고 싶었다. 땅에 파묻거나,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 따위의 무속적인 행위에는 영 정이 가지 않았다. 썩어녹아내린다면 그대로 함께 그러고만 싶었다. 다른 이가 이상하게 본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보이고만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한 이들은 그러지 않길 바랐고, 그렇기에 그럴 수 없었다. 죽은이는 말이 없었고 남겨진 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목적 없는 걸음이 길게 이어진다. 걸어나가면 눈이 쌓인 비석과 방패가 보였다. 이기적인 행동이였지만 구멍이 뚫린 방패를 집어들었다. 쌓인 눈이 녹고 어는 것을 반복해 걷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단검으로 긁어내듯 걷어보면 오랫동안 손질되지 않아 녹이 슨 것이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맹우라 친애하던 사람의 방패가 지금은 이런 꼴이다. 영원히 누군가의 구설수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다. 종내에는 잊혀지고,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없어졌을 때 이어져오던 발자취가 끊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에오르제아의 영웅 또한 포함이겠지. 삶은 태어나서부터 늘 길었고 죽기 직전의 순간에도 누군가의 얼굴로 인해 살아날 것만 같았다. 여생이 지긋지긋하다. 사실은 이렇게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기 싫은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모든 것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나는 가장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가장 싫어하는 그림자가 내 발치로부터 짧아지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생각이 답지 않게 길었다.

설원에 남은 발자국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그 위로 눈이 켜켜히 쌓이면 흔적은 점차 사라진다.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이 곳의 눈을 모두 녹여줄 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처음부터 나의 것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멀쩡한 방패를 끌어안고 북받쳐 울면 고작 몇 방울 가지곤 어느 하나도 녹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 오느라 얕게 쌓인 눈 조차도. 결국 혼자 자리를 뜬다. 일어나기 전 눈 쌓인 방패를 다시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너는 나와 만난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였다고…. 괜히 크게 한 번 울부짖는다. 이후에는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는다.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한다. 세상은 여전하고 방패 위로 켜켜히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세상 만물을 탓한다. 설원을 탓한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설원의 메아리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으나 이번엔 오히려 차가운 눈바람이 정신을 깨운다. 등에 맨 방패가 무거워 걸음을 포기하고 싶으나 세찬 바람이 계속해서 앞으로 떠밀었다. 방패와 합쳐진 바람의 무게는 딱 사람 손 두 개 정도의 무게다. 그러면 나는 기어이 차가운 설원에 나 뿐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사람들은 나를 은빛 검날이라 부른다. 이제 그 칭호로 불리는 이가 나 뿐이라고 깨달아버린다. 깨달아버렸다. 설원의 발자국이 그렇게 사라졌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젠 이 익숙한 방황도 끝낼 때가 왔다.

· · ·

눈과 진흙으로 뒤덮인 구두를 털어냈다. 집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나갈 때 태워둔 장작은 내가 집에 들어온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문을 여는 순간과 동시에 불씨를 꺼뜨렸다. 눈이 녹아 물바다가 된 바닥을 보고 있자니 긴 한숨이 나왔다. 축축해진 카펫을 밟으면 물이 죽 나왔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나가 슬금슬금 닫히려는 창문을 열어제꼈다. 여전히 추운 곳에도 아침해는 뜨고 새는 지저귄다. 파란 새벽의 햇빛이 창문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일순 눈동자까지 닿은 빛에 손으로 급하게 가렸다. 밝은 것을 쬐기에 나는 아직 약했다.

내 의사는 무시하듯이 어두컴컴한 실내로 계속해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희게 뜬 먼지와 빛을 손으로 휘휘 쫓아낸다. 구석에 처박힌 대걸레를 꺼내들고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화분의 썩어가는 흙을 전부 갈고 새 나무를 심었다. 상인에게서 장작을 사지 않고 집에 굴러다니던 목재 가구 몇 개를 부숴 장작을 만들었다. 제법 값이 나가는 가구로 기억한다. 무슨 변덕이였는진 모르겠다. 배가 찢어져도 배는 고프다. 찢어질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농담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헛웃음도 나왔다. 깨끗해진 바닥에 기대앉아 식사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르는 사람이 집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내 집은 내가 집을 비웠을 때도 초보 모험가들에게는 늘 열려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대개 늦은 시간에 잘 곳이 없다며 수소문 끝에 오는 사람들 뿐이였기에 이런 이른 시간의 방문객은 드물다. 키는 대략 나와 비슷했고, 듬성듬성 자른 것이 아무래도 본인이 자른 머리 같았다. 귀를 봐선 휴런족이다, 남자이고…. 그나저나 방문객은 내 몰골에 당황한 듯 했다. 피가 새어나오는 붕대와 한 탕 크게 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 같은 헝크러진 머리를 보면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벽난로 근처 소파로 안내했다. 한숨 돌린 그는 횡설수설하며 본인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 받은 일의 수당을 떼먹힌 것 부터, 오는 길에 마물들이랑 구르고 와서 앉을 수 없다는 것 까지.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미심쩍은 것으로 보아 내 첫인상이 영 좋지 못했나보다. 그러나 곧 그 사람의 얼굴은 대부분의 사람이 무언가를 숨기려는 얼굴로 바뀌었다. 아닌가, 수치심? 곧 집 안에 공복으로 인한 소리가 울렸다. 방금 가구를 정리한 탓에 더 크게 울리면서.

- ….

- 저, 저는 괜찮습니다.

- 아직 아무말도 안 했네만.

마침 식사를 준비하려던 참이였다고 안심시켰다. 문제는 집에 몇 달 들어오지 않았더니 성한 식재료가 얼마 없다는 것. 보냉고에 들어있던 소금에 절은 랍토르 고기, 포포토, 그리고 언제 처박아뒀는지 모를 향신료가 굴러다니는 것을 집어들었다. 맛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할 것 같았다. 저 애는 그렇다 쳐도 내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스튜 뿐이였다. 먹어보니 고기 탓에 물을 몇 컵이나 더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집안에 짠내가 가득했다. 여긴 림사 로민사도 아닌데. 그리고 담는 것 조차 어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흰 그릇에 스튜를 한 국자 퍼담으면 조금 튀어 갈색의 소스가 묻지를 않나, 균일하게 썰리지 않은 포포토가 유독 크게 나와있질 않나. 무얼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는 법이다. 결국 포기한 채 윗층으로 올라가 방문객에게 내밀었다. 잠시동안 냄새나 형태를 보던 모험가는 한 입 먹더니 그 뒤로 접시 하나를 아주 빠른 속도로 비웠다. 그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접시를 반절정도 비웠을 때 알아챘다. 결국 나는 남은 스튜를 양동이 째로 윗층으로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배를 채운 모험가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앉던 것도 마다하던 사람이 이제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눕듯이 앉아있었다. 소파가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른 모험가가 오면 다시 더러워 질 곳이니, 그 전까지만 청소해두면 됐다. 졸음이 몰려올 때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 있다던데 눈 앞의 모험가가 딱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늘어진 태엽처럼 이것저것 말 하기 시작했다. 여기 집이 참 따뜻하다, 이런 집을 사려면 어느정도 모험가로 굴러먹어야 하는 거냐, 돈 벌려고 시작한 건데 요샌 나가는 돈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용병을 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다. 대부분이 이런 푸념이였으므로 빈 그릇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다 축축해진 붕대를 갈 생각이였다.

- 집이 정말 예쁩니다….

- ….

- 창가에 꽃이, 사실 아까 들어왔을 때 봤는데요.

- 꽃?

- 네, 파랗고, 약간 하늘색이 섞인 꽃.

- 그 꽃이 햇빛에 닿아서 반짝이는데, 그게 정말 예뻤어요. 금방 물을 주신 건지 이슬이 반짝반짝…. 그래서 창문을 닫질 못했어요.

사실 엄청 추웠는데. 말을 듣고 의아했다. 창가에 꽃이 있다지만 물을 준 기억은 없다. 창가 화병으로 발걸음을 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대략 5분 정도 서있었다. 멍하니 바라봤다. 자의든 타의든 꽃병이 깨지면 받아들인 채 죽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바람 탓에 넘어져 깨진 화병이 있었다. 그리고 그 화병 조각 사이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린, 다 죽어가는 꽃이 보였다. 파란색과 하늘색이 섞인 꽃. 인간으로 치자면, 그래. 어제의 나 같은 모습을. 이름도 모를 꽃이 숨을 헐떡이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어쩌면 자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화병의 물은 햇빛 탓에 진작 녹아 물웅덩이가 되었고, 절묘하게 뿌리 끝에 닿아있었다. 그리고 자주 꽃 위로 눈이 날아오더니 녹아내려 이슬이 되었다. 모험가는 아마 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 잠들기 전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라도 좋았다.

창 밖은 여전히 겨울이다. 깨진 화병은 보기 흉해 갈아치웠다. 꽃은 여전히 죽어가는 상태다. 모험가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얕은 잠에 들었다. 집에 있던 담요 중 몇 개를 꺼내 덮어주고, 창문은 다시 닫았다. 일 하지 않는 낮시간은 길었다. 해가 점점 방향을 바꿔 모험가의 얼굴 쪽으로 닿고 있었다. 모험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반대로 그늘진 방향에 앉은 나에게는 머리쪽만 미미하게 온도가 느껴졌다. 다음 모험가가 오기까지만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맞은편의 그와 비슷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듯 눕는다. 햇빛이 더 이상 머리에 닿지 않았다. 벽난로가 타닥이는 소리가 집안을 조용하게 채운다. 쌓여있는 것들이 많았으나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속은 여전히 답답한 채다.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대로 집을 뜨면 방문객은 줄어들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영영 없어지는 것보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¹이슈가르드 배경 + 오르슈팡 + 프레이 + 그 외 이슈가르드 인물들

²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전적 의미 맞습니다)

서리 상과 잃을 실을 섞어서 상실이라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존의 잃을 상으로 쓰려다가 전하고자 하는 바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서리 상으로 바꿨습니다

³동시에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화자와 비슷하게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빛전들은 자신의 명줄이 왜 유지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우리의 목숨은 누군가들이 힘내서 지켜온 것이니까요.

내일을 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그들의 몫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반 쯤 농담이고요, 우리를 살려준 누군가가 우리가 쉽게 목숨을 포기한다면 마음이 많이 아프겠죠~

그러니 우리는 영영 없어지는 것 보다는 녹아내리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햇빛에 녹는 눈 같이요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업 플리

뭐냐고 물으시면 제 자캐코어라고밖엔 대답이 안 나오네요 전반적으로 조용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모두에게 혼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말씀을 올리며 말을 줄입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내가 죽을 때 까지 영원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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