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자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가내빛전 x 야슈톨라 드림

플롯 - 가내빛전이 반년간 잠적 → 이후 야슈톨라가 찾아다니다 처음 만났던 곳에서 겨우 찾음

(가내빛전은 림사에서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최근까지의 메인 스토리 스포일러 있음

고증 안 맞을 수 있음 날조도 이것저것 많음

알기 힘든 그뭔씹 가내드림 잔설정 많고 퇴고 안 거침 보고싶어서 막 휘갈긴 글

본인집 가내빛전 넣으셔서 읽어도 ㄱㅊ지만 아마 그뭔씹잔설정이 너무많아서 안되실수도있어요

안사귀는관계임


함께 일을 하던 인물이 돌연 사라지는 것은 본디 모험가의 일상이다. 자유로운 바람처럼, 혹은 어디에나 작게 흐르고 있는 물처럼. 어쩌면 동굴 속에 잔뜩 껴 마냥 향기롭지만은 않은 냄새를 자아내는 이끼같이… 자연과도 같은 삶을 추구하는 모험가인 만큼 한 달 정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고 크게 문제를 삼는 인물은 없다. 그도 그럴게, 원래 그 사람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걸. 그래서 알리제는 가벼운 불평만 하며 ‘돌의 집’의 마지막을 정리한다. 자잘한 서류와 잡동사니로 가득해 터질 것 같은 상자 안에도 남은 것이라곤 구두상으로 작성한 서류 한 장 뿐이였다. 그가 새벽에 입단할 때니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누렇게 바란 종이를 누군가가 주워들고 찬찬히 읽는다.

페 마하, 25세, 무직 용병. 생긴 것과는 달리 정갈히 쓰여내려간 글씨, 이름 석 자 옆에 찍힌 도장의 각인. 마법이 섞인 잉크와 인주만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선명했다. 그래, 그러면 그를 데려온 장본인은 그제서야 기억이 나는 것이다. 단검을 너무 쓴 탓에 지문이 없다, 그래서 다른 모험가들처럼 지장은 못 찍는다며 상처투성이 손으로도 정갈히 찍어누르던 그 도장의 생김새를 어렴풋하게. 그리고 딱히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동굴에서 뒤집어 쓴 곰팡내 나는 구부 입냄새 같은 것을 선명하게….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알리제가 저 멀리서 여자를 부른다. 흰 색의 귀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제 야슈톨라는 그 남자의 에테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된 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났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페 마하 X 야슈톨라

창 밖에 시끄러운 빗소리가 확연하다. 그럼에도 여자는 창문을 활짝 연다. 드디어 식물 위로 앉은 흰색 먼지들이 빗방울을 맞으며 하나 둘 씻겨내려간다. 화병의 꽃은 이미 바싹 시들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이를 테면 이미 빠져나간 에테르를 식물에 정착시킨다 한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여전할 수 있었던 것을 ‘편리한’ 마법으로 순식간에 바꿔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여자의 취향이 아니였다. 처음부터 마법으로 자동화 시켰으면 모를까.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으나 창문을 닫을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여자는 어딘가로 링크펄을 건다. 곧 집사 한 명이 찾아오면, 여자는 손수 동전 몇 닢을 건네주며 방을 적당히 치워달라고 말한다. 당연히 여자의 집사는 아니다. 그래서 여자는 더 화가 났다, 마녀 마토야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애초에 내 말 듣고 마법으로 방청소를 했으면 이 사단도 나지 않았을 텐데. 집사도 안 돼, 마법도 안 돼, 그렇다고 직접 청소하는 건 더더욱 안 돼. 그렇게 말 해 놓고는 반 년 동안 찾아오질 않았다고?

…생각을 하다보면 끝도 없는 것이 현인들의 나쁜 버릇이다. 그래서 여자는 집사에게 당장 저 화병부터 치워달라 명했다. 원체 구실을 중요시 하는 사람인 것은 알고 있었다. 방 한 켠을 내어 줄 때도 뭐 그리 미사여구가 많았는지. 그냥 좋아서 주고 싶었다고 말 하면 될 것을 나라의 미래까지 운운하며 맡겼었지. 그러니 청소를 하루에 한 번, 심지어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나선 시점에서 여자는 그 사람의 속내를 전부 간파했었다. 광장에서 일주일마다 사 오는 꽃이 매번 바뀌는 이유는 말 할 것도 없고.

- 이래서 어디에도 거처를 두지 못 하는 사람들이란….

-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짤막하게 대답한 여자가 겨우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축축해진 바닥을 보며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사과 한다. 어쩌면 자신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구해야 할 세상이 많은 것이나, 누군가에게 부탁받은 보이드 관찰 보고서 같은 것 보다 더 중요한. 이를 테면 문서로 작성할 수도 없는 것이. 그래서 여자는 빗줄기가 더 거세기지 건에 여행을 떠나야 했다, 모험이 아닌 여행을.

그 사람이 아무리 관념에서 벗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유흥의 정도에 따라 가치 판단을 달리 할 정도로 나사빠진 사람은 아니였다. 돌아올 곳이 있을 때 그는 늘 여행을 떠났고, 돌아올 곳을 버릴 수 밖에 없을 때 모험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집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다. 마음을 둘 수 있는 것, 그래서 여행을 끝내면 언제든 돌아와 편하게 몸을 눕힐 수 있는 것, 휴식을 취할 때 누군가가 들어오면 불편한 것. 어쩌면 그래서 영영 모험을 떠난 것은 아닐까? 원래 거처를 두지 못 하는 사람들은 오래 본 것에 질리고는 하니까. 그리고 새로운 모든 것을 사랑하겠지. 여자가 먼지 쌓인 지팡이를 닦으며 생각한다. 이제 본인 또한 너무 오래된 것에 매료될 나이는 지났다고.

- 들려요? 휴가를 좀 가려고요. 아뇨, 단순한 여행이요. 잠깐, 한 명씩 말 좀…. 사실 연구 중인 것이 있는데, 도저히 책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라….

가설을 세우자면 끝도 없다. 여자는 현인들의 나쁜 버릇을 다시금 상기하며 우산을 꺼내들었다. 그 중에는 거짓말이 매우 능숙한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인들도 때로는 금서를 허용해 주는데, 마녀라고 못 할 이유가 있겠는가. 더 하면 했지.

· · ·

- 뭐야, 여행 간다더니?

- 식사는 중요하니까요. 그 사람도 늘 말했잖아요?

태평하게 샐러드와 스프를 휘젓던 여자가 대답한다. 음식이 반 절 정도 준 것을 보아하니 여자는 이미 식사를 끝마친 모양이였다. 반 쯤 뜯긴 빵이 스프 그릇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등에 지고 있던 건블레이드를 내려놓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눈을 게슴츠레 뜬다. 의자에 털썩 앉는 모양새는 불량하기 보다는, 뭐랄까. 나이에 따른 기력 부족에 가까워 보인다. 남자가 이내 뭐라 말할 양 입을 열면 여자가 금새 입을 막아버린다.

- 산크레드, 라스트 스탠드는 기본적으로 1인 1주문이랍니다.

- ….

한숨을 쉰 산크레드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 여자는 여전히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이미 녹을대로 녹아 형태도 알아보기 어려운 컵푸딩 같은 것을 스푼으로 계속해서 휘젓고 있었다. 그 뒤로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 평소엔 음식 안 남기잖아.

- 남겨도 먹어줄 사람이 있었던 것 뿐이죠.

- …야, 이번에 시킨 건 좀 새롭다? 평소엔 그런 거 입에도 안 대더니.

- 글쎄요, 제가 직접 주문을 한 적이 드물어서.


별로 맛이 있진 않네요, 너무 달아요. 산크레드의 말에 꼬박 대답만 하는 모습은 대화를 할 의지가 영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산크레드에게 굳이 여자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도 아니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다. 실제 있었던 일을 말했을 뿐. 둘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사람을 떠올린다. 여자는 자신의 입 안이 여전히 달아빠졌다고 느낀다.

모든 일이 끝나고 여기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애들은 애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백 몇살의 어린애는 조금 떼어 놓기 힘들었지만, 아무튼. 그 사람은 이런 류의 기름진 것과 이 가게의 하우스 와인은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답지도 않게 과일향이 나는 에일 맥주를 한 잔 시켰기에 기억한다. 여자는 늘 먹던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하며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와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여자는 곧 입안을 가득 채운 묵직한 레드 와인과 따라오는 고기의 비린 향에 꼬리를 쭈뼛 세웠다. 야채만 입에 밀어넣고 있으면,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입도 대지 않은 자신의 잔을 슬쩍 여자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샬레이안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안다. 딱히 맛있다, 없다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여자도 마찬가지다. 미각에 둔감해진 여자 또한 눈을 조금 크게 뜰 정도로 놀랐다. 여자가 식사를 반 쯤 끝마치고서 앞을 쳐다보면, 위리앙제와 산크레드는 진작 취해서 둘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제서야 여자가 들을 정도로만 작게 말하는 것이다. 조금 취했나봐요, 잔이 바뀌었네. 바뀐 김에 그냥 이렇게 먹어요. 무표정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 행동. 여자는 물을 벌컥 들이킨다. 입이 너무 달았다. 그놈의 구실, 여자는 작게 중얼거리다 산크레드가 제 앞에서 손을 휘적이고 있는 것을 알아챈다.

- 듣고 있었어?

- 여행의 행선지를 물은 것, 맞죠?

- 그냥 무시였냐….

조용히 웃어넘긴 여자가 말을 이어나간다. 보이드나 제 1세계같이 당장에 혼자 갈 수 없는 곳은 제쳐둘 예정, 지금부터 에오르제아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사람을 찾을 예정이라고.

- 그럴 거면 인원을 몇 명 모아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편이 좀 더….

- 아까도 말했듯이 개인적인 연구라서요. 사적인 일에 사람을 동행시키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여자의 입에서는 이상적인 답변이 나왔으나, 그렇다고 산크레드가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로는 당장에 그 사람을 앞으로도 데려올 수 있다. 그러나 에테라이트가 설치된 곳 부터 아닌 곳, 작은 마을이나 동굴, 안 되면 던전 구석구석을 뒤져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와 다름 없다. 3초 후 산크레드는 경악한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직접 찾으러 가보던가” 라고 말 한 적 있었으나 당연히 툭 던진 말이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야슈톨라는 이토록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는 여자가 아니였다.

수많은 가느다란 실 사이에서 단 하나의 가닥을 잡아낸다는 것은 집착과 닮아 있었다. 몇 십, 몇 백, 몇 천 개의 에테르가 풍족하게 흘러넘치는 세상에서 이미 무뎌진 가닥 하나를 찾는 것은 마녀 마토야에게도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칩거하던 아파트에서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여자는 제 1세계에도 두고 온 것이 많았으니까. 처음으로 갑작스러운 무력감을 느낀다. 사막도 아닌 바다 저 밑에 가라앉은 바늘 하나 찾겠다고 모든 곳을 쥐잡듯이 뒤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흔적을 남긴 존재도 사라져 버리면 정말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언젠가 자신이 필요해지면 연락하라며 건네준 사무실 직통 링크펄은 여전히 답장이 없다. 여자는 검은장막 숲으로 향한다.

· · ·

가을박 마을의 여관은 남자가 간간이 숨어드는 겁쟁이들을 팔아넘기거나 자잘한 정보를 모으기에 좋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찾아오는 사람이 대도시보다 드물어 편히 쉬기 좋다고도. 이름 그대로 늘 가을인 것 같은 주황색의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평화롭다 했다.

사실 남자의 입단 후 여자는 영 예전만큼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늘 불안하게 흔들리며 곧 사라질 것만 같이 구는 남자의 에테르는 그의 인생 전반과 닮아 있었다. 전혀 영웅같지 않은 언행 탓에 남자 스스로도 새벽 소속이라 밝히지 않는 날이 많았다. 늘 가방에는 빈 술통과 싸구려 담배곽이 굴러다녔고 주위에는 사람이… 아니, 정확히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 조금은 당신을 데려온 제 체면도 살려주세요.

다음 날 모래의 집에 찾아온 사람만 스물 정도가 넘었다.

개중에 여자가 기억하는 것은 밝은 머리의 미코테 셋에 루가딘 한 명, 엘레젠은 물론이고 라라펠까지. 특이사항은 전부 20대의 여성이였다는 것. 남자는 자신보다 키가 큰 루가딘 여자에게 뺨을 시원하게 얻어맞고 나자빠진 채로 다시 라라펠 여자에게 반대쪽 뺨을 얻어맞았다. 미코테 여자 셋에게는 시원하게 밟혔나. 그리고 몇 주간 창피한 건지 뭔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때는 반 년이나 자리를 비우진 않았다. 길어봐야 한 서 너주 정도.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으므로 크게 놀랄 일도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모험가 중 남자만큼 일을 깔끔하고 빠르게, 뒤탈없이 처리해 주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남자의 뒷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때의 여자는 남자를 잘 몰랐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것이 정확하다.

잠적 후 남자가 꼬리를 밟힌 것은 이 마을의 여관이었다. 남자는 방문을 열더니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여자는 벽 옆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선명히 기억한다. 샛노란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가을박 마을을 묘사한 그림. 못 본 사이 색이 바래 흰색에 가까워진 남자의 눈동자가 그 그림으로 잠깐 노랗게 반짝인 탓이다. 들어오세요, 몇 주가 지나고 제법 의젓해진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여자를 방 안으로 들였다.

장갑은 여전했지만 입은 옷의 차림새가 많이 달라졌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전부 계절감이 없었다. 한겨울을 살다 온 사람 같은 옷 들 뿐이였다. 체형을 가릴 정도로 투박한 매무새의 옷, 시력을 보정하기 위한 안경, 단정해진 말투. 여자는 남자의 근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쩐지 버겁게 느껴진 탓이다. 남자 또한 여자가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부러 묻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한다, 원래 저렇게 컸었나. 그러니까 남자가 마실 것을 내오겠다며 여자에게 등을 보였고, 그리고. ….

단 둘만 있는 것이 불편해진 여자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바람맞았다. 미지근하게 식은 다날란 산 홍차를 우린 찻잔을 들고, 얼빠진 얼굴을 한 채로.

- 저기?

- ….

여자가 방문 옆의 그림을 다시금 바라본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림은 하얀색에 가까운 파란 물감을 사용한 폭포가 흘러내리는 생동감 있는 그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엘레젠 남성은 여자 앞에 몇 번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곧 맥 빠진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심기가 불편해 진 여자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대로 로비로 내려온 여자는 여관 주인에게 간단하게 남자의 인상착의를 설명한다. 주인은 간단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으나, 언젠가 남자가 자신에게 ‘맡긴’ 은화 주머니를 생각해냈다. 몇 개 쥐여주면 주인은 술술 불었다. 사실 이런 방법은 요샌 잘 안 쓰이는데, 진짜 아가씨가 딱해보여서 이런 말을 해 주는 거고, 사실 그 남자가 왔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왔단 걸 알리지 말라고 여자보다 딱 한 닢의 은화를 덜 지불했다는 사실까지.

원래라면 이런 방법은 잘 쓰지 않았으나 수사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부터 시작한다고들 하지 않나. 여자는 조금 남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에 취한 채 구석에서 돈이면 전부 된다고 중얼거리던 남자를 기억한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특히 뒤가 구린 마을에서는 이런 ‘정보료’가 비싸게 먹히는 법이였다.

여자는 에테라이트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남자에 대한 정보를 산다. 처음에는 한 두닢이었던 것이 점차 부르는 액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남자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도 특히나 몸값이 높았다. 그를 찾는 사람은 평소에도 많았으므로 정보료는 어느새 소형집 하나는 살 정도로 치솟는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것은 여자의 다리가 아파올 때 즈음이였다. 여전히 링크펄에는 어떠한 문장도 들려오지 않는다. 남자를 살 수 있는 은화가 이젠 정말 몇 닢 남지 않았다. 하루 빨리 찾아야 했다.

· · ·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던 여자는 결국 지고천 거리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다시 찾아간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늘 질책했던 시가의 잔향 조차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깨끗한 집안은 남자를 늘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래서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물었나? 본인이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런 실없는 소리를. 모험가라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어느 날 내가 숨을 한 번 크게 쉬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남자가 알려준 비상금 위치에는 돈이 얼마 들어있지도 않았다. 실망한 여자는 남은 은화 몇 닢을 탈탈 털어 림사 로민사를 거쳐 라노시아의 항구에 정착하는 뱃삯을 냈다. 여전히 링크펄에서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자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닫는다. 소랏고둥에 귀를 대고 들리지 않을 답을 기다리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미친 여자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에서 진정으로 바닷소리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철없던 나이는 한참 지났으니까.

바다를 내려다보는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영웅이 구한 세상은 건재하니까, 더 이상 세계 멸망 따위는 나의 관할이 아니지 않을까. 우주에서 영웅이 돌아왔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 사람을 깎아내려야만 유지시킬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어쩌면 이 세상은 효율이 극도로 나빠 구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방금은 너무 아씨엔 같았나. 머리로는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일임을 알아도 사람이 지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여자가 이 세상과 영웅을 포기할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여행을 통해 겸사겸사 본래의 목적을 환기하는 것이고.

부산스러운 새벽 전용 링크펄을 충동적으로 귀에서 빼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여자는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라자한으로 돌아가기엔 뱃삯이 모자랐고, 올드 샬레이안으로 돌아가기엔 입국 절차를 다시 밟는 것이 귀찮았다. 그렇다고 마련해준 아파트로 돌아가 연구에 몰두하기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은 여행이였다. 수확 없는 여행은 단순히 시간을 허비한 느낌이라 손해보는 기분 마저 들었다. 바다 건너로 타오르던 해가 꺼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다.

빛의 전사.

재회했을 때 빛으로 흘러넘치다 못해 불길해서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았던 빛의 전사.

늘 빛으로 찬란했으나 그렇기에 동시에 부서지기라도 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빛의 전사. 그러다가 스스로 빛을 확 꺼뜨려 자신을 숨기는, 정체불명의 빛의 전사.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빛의 전사.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림자만….

- … 결국 돌고 돌아 여긴가.

손에 익숙치 않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 때는 등이 참 작았지.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이제는 모든 일이 해결된 비석 앞에서 주황색 악령들이 일렁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구석으로 몸을 옮기면 축축한 이끼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운 라노시아의 햇빛과 끈적이는 바다 내음을 피하기에는 최적이였다. 야슈톨라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일 없는 이상 여길 찾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야슈톨라는 여행하는 내내 남자와 함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의 소문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으나 주위에서 맴돌았고, 함께 있을 때 보다 알게 된 정보의 질이 달랐다. 알리제의 말이 이제서야 떠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와 함께 할 때 야슈톨라는 단 한 번도 힘든 적 없었고 배고픈 적 없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좋으니 당장 쓰러져 잠이나 자고 싶다는 점일까.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야슈톨라를 가만 두진 않았다. 동굴 속으로 계속해서 짠내음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자꾸만 땀이 밴 얼굴 위로 달라붙었다.

결국 야슈톨라는 남자가 건넨 링크펄을 툭 던진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계속 붙들고 있어봐야 좋은 꼴 볼 리가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음 연구로 넘어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 안 되는데.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어서는….

- 나는 떠받치는 파도, 나는 인도하는 바람. 나는 밤하늘의 별, 나는 아침의 하늘.

나는 바다에서 삶을 받고, 바다에서 죽음을 향해 가노라. 익숙한 목소리가 작게 동굴을 울린다. 뱃사람들을 위한 진혼가라기에는 너무나도 바짝 말라버린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야슈톨라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동굴 입구를 바라봤지만 어떠한 인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곧 그 소리는 잦아들고, 높은 구두 굽이 돌바닥 위를 걷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다. 발치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링크펄이 어떠한 소리로 인해 진동하고 있었다. 야슈톨라는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밤 사이로 온통 빛나는 사람이 너덜너덜하게 몸을 겨우 기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실제 모습이 온통 검었던 사람. 특히 오른쪽 눈이 검었던 사람. 동시에 나와 같이 흰 눈을 하고 있는 사람. 다만 나처럼 에테르를 볼 수는 없는 사람. 낡은 기계에서 흘러나오듯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바다에서 죽을 수는 없더라고요. 미안해요, 연락할 수단을 잊어서….

자리를 비운 건,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점차 빛이 사그라들면, 야슈톨라는 그제서야 남자가 지금 어떤 꼴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늘 입던 멀끔한 정장 세트는 없어졌다. 대충 걷어올린 셔츠 소매는 너덜너덜하다. 깔끔하게 정돈하고 다녔던 머리는 바닷물에 절여지기라도 한 건지 잔뜩 떡진 채로 반 쯤만 넘어가 있었다.

야슈톨라는 잊고 있었던 환술을 걸어주곤 심술을 부리듯 어깨를 툭 밀었다. 그러면 남자는 힘없이 웃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더욱 짜증이 난다. 애초에 안경도 어디에 팔아먹은 주제에 단번에 자신임을 알아챈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누구는 단 하나의 에테르를 찾기 위해서 이 개고생을 했는데. 새벽에게 연락하려고 주머니를 뒤졌을 때 링크펄이 보이지 않은 것도 짜증에 한 몫 했다. 야슈톨라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절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정신 잃을까봐 일부러 강하게 나가는 것이다, 하면서.

- 돈 어딨어요. 가요,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 잠, 잠깐만요. 멀미가….

- 아, 여깄네. 버틸 수 있죠? 예드리만으로 와요.

할 말만 하고 먼저 텔레포 마법을 시전한 야슈톨라를 남자는 허망하게 주저앉은 채 보고 있었다. 비척대며 일어난 남자는 세 번의 시도 끝에 엄청난 에테르 멀미와 함게 에테라이트 근처에 주저앉았다. 소지금까지 탈탈 털린 남자의 옆에 야슈톨라가 다시 다가왔다. 아므라 라씨를 손에 들려준 야슈톨라는 그대로 남자의 셔츠를 벗기고는 슬쩍 밀어냈다. 남자가 몸을 웅크린 채 힘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에 갓 입단하고 산크레드와 함께 이름도 모를 단원들과 4차까지 달린 후 후폭풍을 맞이했던 때 같았다.

사베네어의 밤은 쌀쌀했다. 대충 셔츠를 덮은 야슈톨라가 남자의 옆에 차분히 앉으며 말했다.

-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 ….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힘겹게 웃어보였다. 야슈톨라 또한 웃음으로 화답했으나 그 웃음이 진짜인지는 모를 일이다.

· · ·

새벽이 둘을 찾은 것은 섬의 동이 트기 전이였다. 그 라하가 질색하며 왜 샬레이안으로 오지 않았느냐고 야슈톨라에게 물었지만, 태연하게 ‘예드리만 특제 해산물 꼬치구이(15000길)‘ 를 먹고 있는 모습에는 기어이 모두가 두 손을 들었다. 열심히 페 마하를 들쳐업던 그 라하는 결국 힘에 부쳤는지 얼마 안 가서 산크레드와 교대했다.

- 근데 왜 벗고 있는 거야.

- 사베네어 섬의 밤은 추우니까요.

- …아, 그래.

짐짝처럼 실어져 가는 페 마하에게 위리앙제가 열심히 회복 마법을 걸어보지만 어쩐지 상태가 더 안 좋아 지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에테르 멀미를 하고 있었으니 분명 다른 사람의 에테르가 닿으면 안 좋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야슈톨라의 말이 들려온다. 슬쩍 페 마하의 상태를 본 위리앙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행동을 그만두었다. 원래 탱커의 목숨은 힐러의 손에 달려 있는 법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힐러들은 탱커가 어느 정도여야 죽는지 그 정도를 알고 있다. 위리앙제가 보기에 페 마하는 아직 건재했다.

야슈톨라는 생각한다. 빨리 이 짐짝같은, 무능한 남자를 침대에 눕혀버리고 뭐든 좋으니 캐묻고 싶었다. 앞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본인의 지식욕에는 이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고, 야슈톨라는 자신이 세상에서 모르는 것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했다. 이번에도 말 하지 않는다면 한동안 일을 못 받게 검이나 방패 중 하나를 부숴버릴 생각이였다.

페 마하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저녁이였다.

답지 않게 다양한 음식 냄새에 눈을 떴다. 당연히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생각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킨 그는 눈 앞의 광경에 다소 놀랐다. 긴 탁자에 잔뜩 늘여놓아진 음식들의 가짓수가 어마어마했다. 새벽 전체가 와서 먹어도 남을 것 같은 그릇의 갯수에 페 마하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향신료를 가득 발라 간을 해서 구워낸 닭고기나, 제로가 좋아했던 매운 카레. 그리고 이름 모를 야채들을 넣어 졸인 스프나 거대한 빵 같은 것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거기에 야슈톨라 혼자만이 앉아있다는 사실이다. 방에는 페 마하와 야슈톨라, 둘 밖에 없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더운 바람과 함게 왁자지껄한 주점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라자한도 불꽃 축제를 맞이해서 무슨 축제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페 마하가 고개를 다시 돌린다. 야슈톨라는 페 마하의 먼지 가득한 방패를 물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그 옆에 태연하게 걸터앉은 페 마하는 바깥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조용한 분위기가 영 적응되지 않아 헛기침으로 운을 텄다.

- 다른 사람들은요?

-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어요.

- 그럼 저희도 잠깐 나갔다 오는게….

- 페 마하.

석 자 이름 불린 페 마하는 잠시 꼬리를 움찔했다. 동시에 탁, 탁 하며 의자 위로 꼬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미코테족들이 흔히 불만을 표현할 때 자주 들리는 소리다. 본인의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 여기 있는 음식은 주점에서 특별히 준비해주셨어요.

- …혼자 먹기엔 양이 많으니 같이 들죠.

- 전 이미 식사를 끝마치고 왔답니다.

- 그래도,

- 아, 그리고 그릇은 싹싹 비워서 아침까진 가져다 달래요.

기껏 영웅을 위해 준비해 준 음식들인데, 다 못 먹으면 주점에서 많이 아쉬워들 하겠어요. 덧붙인 야슈톨라가 손길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페 마하를 바라본다. 페 마하는 다른 의미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 잠을 자다 일어난 제로에게도 이런 음식은 먹이지 않았으면서, 하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놈의 성격 탓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유로운 척 웃어보였다.

그래도 몇 개는 거들어 드릴게요. 야슈톨라가 사과를 하나 꺼내들면 페 마하 또한 사과를 집어든다. 한 입 베어물면 정말이지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달아빠진 사과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 많은 음식을 혼자 먹어치우면서 말 까지 하려면 아침까지도 시간이 한참 모자랄 것 같았다.

눈 앞의 여자는 자신이 만난 여자 중 가장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이건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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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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