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Coram Deo! 6
신의 뜻으로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해. 그 말을 못한 것은 대화해낼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굉장한 의지를 품고 있었건만 고작 하루만에 차이안은 많은 것들을 잃었다. 서도윤과의 신뢰, 팔이 나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의 일부, 나아가야 할 방향. 순탄히 풀리고 있다 믿었던 것이 사실 살얼음판 위에 지어지는 오두막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너는 일부러 나를 속였을까? 이단심문관이 했던 말처럼.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겨울 바람이 드나들었다. 올 겨울이 이렇게 추웠던가. 차이안이 깍지 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과한 힘을 실은 왼쪽 팔꿈치가 시큰하게 아팠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차이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은 유기적으로 일어난다.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면 결국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 따위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하는 것은 갈 곳 잃은 마음과 날을 뾰족히 세운 원망을 뿌리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침묵을 고집하는 서도윤의 입을 여는 것이다. 제가 실망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변명 한 줄 하지 않는 저 반마에게서, 조금이라도 진심 어린 말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네가 정말 나를 속이려 했고, 정말로 나를 죽이려 했으면 어떡하지. 두려움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마음이라는 웅덩이에 파동을 일으켰다. 희미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다독이며 차이안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혹여 지금보다 더 상처 받을까 봐 마음이 방패를 치켜드는 게 느껴졌다. 다만 차이안은 회피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맞부딪쳐 방패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았다.
"서도윤."
"……."
"네 구속을 푸는 걸로 내 팔을 고칠 수 없다면, 네가 나에게 해야 할 말이 있지."
침묵. 또 침묵. 지긋지긋한 적막에 차이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 줌의 화, 한 줌의 실망, 한 줌의 믿음이 마구 뒤엉켜 울컥였다. 오기라고 부를 만한 고집이 그 감정의 파도에서 홀로 살아나 떠올랐다. 네가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고 돌아설 것 같아? 차이안은 언제고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포기하지 않으니 서도윤을 만났고 팔을 고칠 방법을 찾아내었다. 결국 꺾이는 것은 서도윤이 될 것이다. 차이안은 진실로 그렇게 만들 작정이었다.
"말해. 숨기고 있던 게 있잖아."
"……."
"왜 숨기고 있었는지, 사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변명이라도 해. 일단 들어줄 테니까 변명하라고."
"……."
"서도윤!"
차이안이 서도윤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돌아보는 얼굴을 보며 차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서도윤의 팔을 움켜쥐었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저런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느껴지는 것이 분노라니 내가 아주 단단히 실망했구나. 혹은 걱정하는 것이거나. 차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는 서도윤의 양 뺨을 꽉 감싸쥐고 제 쪽으로 고정했다. 날 봐! 날 보고 말해!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마구 떨리는 회색 눈동자를, 또렷한 은빛이 마치 꿰뚫듯 응시했다.
그렇게 겁 먹은 얼굴 할 거면 날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차이안은 서도윤이 도망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마쯤이나 되어서, 제 팔을 나아지게 만든 주제에, 겁 먹고 주저하다 결국 한심한 머저리가 되는 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제 엉망인 연주를 들으며 기대하는 표정을 짓던 게 어젯밤처럼 선명했다. 성당의 어느 새벽, 깜박 잠이 든 제 왼팔을 만지작거리며 심각한 낯을 한 것도 보았다. 제가 들려준 연주를 홀로 남은 성당에서 흥얼거리는 것도 들었고 다 무너져가는 성당을 뒤져 낡아빠진 악보를 찾아낸 것도 알았다.
그것들이 전부 저를 속이기 위한 블러핑일 리가 없었다. 블러핑이라면 이렇게 솔직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내 말 잘 들어. 내가 안전하게 너를 만나러 올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어째서……."
"마을에 이단심문관이 왔어."
움찔, 서도윤의 뺨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두려움이 맺히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습게도 차이안의 그의 두려움을 읽으며 되레 확신을 얻었다. 서도윤은 저를 속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자신을 구속하는 빛에 대해 잘 몰랐던 것과 같이,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걸 뒤늦게 알았을 테고 그래서 제게 말하기 무서웠으리라. 제가 팔을 고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차이안이 자신의 희생을 바랄까 봐 무서워서.
나한텐 뭐 하나 제대로 숨길 줄 모르면서, 눈만 피하면 다 될 줄 알지. 차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의미를 몰라 눈만 깜박이는 반마를 보며 그가 단호하게 속삭였다.
"네가 겁 먹은 거 알아. 이단심문관이 왔으니 날 믿지 못하겠는 것도 알아. 하지만 도윤아, 그들을 저버리고 네게 올 만큼 난 너를 믿어."
"이안…."
"말해줘. 뭘 숨긴 거야?"
서도윤이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갈팡질팡 떨리던 시선이 곧 침착하게 가라앉았더니 이안을 정확히 응시했다.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양 덜덜 떨리는 손이 이안의 손등을 덮었다. 이안의 체온에 기대어 매달리는 모양새로 서도윤이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순간, 공기가 터져나갔다.
그건 정말로 '공기가 터져나갔다'는 표현 외에 어느 것도 붙일 수 없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성당을 뒤흔들고 파도 같은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강력한 힘에 떠밀린 몸이 휘청여 쓰러지려는 것을 서도윤이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이안은 오래된 성장 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상까지 쭉 날아갔을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듯 성당 안의 모든 기물이 파손됐다. 사방팔방에서 파열음이 폭발하자 이안이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제 손등 위로 덮이는 서도윤의 체온을 느끼며 이안이 발에 힘을 주어 버텼다.
성당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가 자욱이 일어 시야를 가렸다. 차이안이 콜록거리며 기침하는 가운데, 정제된 듯 뻣뻣하고 딱딱한 어투가 망가진 성당에 울려퍼졌다.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이안 경."
"콜록, 이단… 심문관, 어떻게 여기에…."
"이안 경 덕분이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경 앞에서 흘린 정보이긴 했으나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주셔서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오늘 오후의 대화가 떠올랐다. 언제 끝날지 예상 가십니까? 경께서 협조적이라면 금방이겠지. 늦더라도 해가 지기 전엔 끝날 거다. 반마의 특성을 생각하면 해가 떠 있을 때 마무리 되어야 수월하겠습니다. 그렇지. 그것을 되새기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차이안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감히! 감히 나를 유도하려고!
오늘 밤이 유일한 기회라고 여기게 만들어, 내가 도윤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만들려고.
"나를 추적했나?"
"말투가 변하셨군요. 예,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점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이안 경, 저희가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비켜주십시오."
"밤은 수월하지 않다더니."
"고작 반쪽짜리 악마를 죽이는 데 시간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컥, 이단심문관이 검을 뽑아들었다. 신성의 푸른빛을 띤 검이 웅웅 공명하며 떨렸다. 마치 눈 앞의 반마를 죽이고 싶어 안달난 것 같아 보였다. 이단심문관이 놓아준다면 곧장 날아가 반마에게 꽂히겠다는 것처럼 검이 마치 살아있는 듯 진동했다. 그 새파란 검 끝에 서며 차이안이 집념 어린 눈으로 이단심문관을 노려보았다. 푸른 검, 이단심문관의 상징, 그들이 가진 신성력으로 구현되는 것.
세상의 모든 악을 사멸시키는 멸악의 검.
"비켜주십시오."
"난 얘한테 들어야 하는 말이 있어."
"비켜주시지 않으시겠다면, 무력으로 끌어내겠습니다."
"황명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내게 손끝 하나 댈 생각 마라."
"우리는 신전의 명을 따릅니다."
절그럭, 절그럭. 이단심문관들이 하나 둘 성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둘, 넷, 다섯, 여덟. 차이안이 알고 있는 모든 인원이 성당에 모였다. 마치 덫을 놓듯 서서히 죄여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차이안이 서도윤의 앞을 막고 섰다. 혹여 작은 틈 사이로 검이 들어올까 최대한 바짝 붙어서 서도윤을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절대 비키지 않겠다는 아집이 훤히 드러나는 자세에, 가운데 서 있던 이단심문관이 손을 까딱였다.
"끌어내라. 반항한다면 기절 시켜."
"예."
"…감히 누구를 끌어낸다고?"
콰가각! 성당 바닥이 쪼개지며 명 받은 이단심문관을 공격했다. 살벌하게 날아드는 마법이 그의 발을 으스러뜨렸다. 신음조차 흘리는 법 없이 검으로 버티고 선 이단심문관이 검을 꽉 쥐며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뻗은 손, 그 너머의 이질적인 회색 눈동자. 차이안의 허리를 감싸안은 반마가 마력을 끌어당겼다. 마력에 응답한 공기가 우르르 떨리며 반마의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희번뜩 빛났다.
반마라고 생각되지 않는 강력한 마력에 이단심문관 전원이 칼을 치켜들었다. 드드득, 드득, 땅이 진동했다. 긴장감으로 팽팽히 당겨진 공기 속 반마가 짓씹듯 읊조렸다.
"이안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콰르릉! 붉은 마력이 울부짖었다. 반마가 이안을 끌어안으며 허공으로 날아오름과 동시에 이단심문관의 영창이 시작되었다.
*
반마의 항전은 거셌다. 구속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마력이 그의 손짓에 화답해 성당에 재해를 내렸다. 멀쩡히 남아 있던 창문이 요란하게 깨지고 성당의 벽 한쪽이 우르르 무너졌다. 훤히 드러난 내부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찼으나 그 누구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쉬는 반마의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겨울의 냉기 서린 공기가 마력을 실어날랐다.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이었으나 그보다 더한 바람이 칼처럼 몰아쳤다.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찢어내고 그 아래의 피를 얼어붙이는 악의 힘이 이단심문관의 갑옷을 후려쳤다.
이미 셋은 행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남은 것은 다섯뿐. 성당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이단심문관들을 내려다보던 반마가 손을 휘둘렀다. 콰가각! 으스러진 유리조각이 비처럼 쏟아진다. 마력이 깃든 파편이 갑옷의 틈새를 비집고 꽂히자 한 명이 추가로 나가떨어졌다. 새하얀 갑옷 아래 예복이 붉게 물드는 것이 공중에서도 보였다. 죽지는 않았어. 서도윤이 거칠어진 숨을 정리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구속의 빛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밤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은 못 했을 것이다. 지금도 한계였다. 마력으로만 공격하지 않고 주변 기물을 이용하는 게 그 증거였다.
땅 위에서는 이안을 제대로 보호하며 싸울 수 없었다. 이안은 인간의 사회로 복귀해야 하기에, 이단심문관들을 죽여가며 항전할 수도 없었다. 여러 변수와 한계와 문제점을 끌어안고 거듭해서 싸워야 했다. 명백이 이쪽이 열세다. 그러나,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싸워본 적이 있었나? 이안을 치료하기 위해 썼던 치유마법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힘에 부쳤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안과의 관계가 변화했다는 것과 이안이 구속의 빛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뿐인데. 서도윤이 하하, 낮게 웃었다. 이안이 저를 의아하게 돌아보는 게 느껴졌으나 서도윤의 시선은 여전히 이단심문관들을 향해 있었다. 저들이 쪼개졌다. 셋, 그리고 하나. 뭘 준비하는 거지? 바닥을 치기 시작하는 마력을 다독이며 반마가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하나 남은 이단심문관이 검을 치켜들었다.
"경고한다. 네 목과 함께 이안 경을 내려두라. 그것만이 네 평온이니."
"입 닥쳐. 여긴 내 구역이고 이안은 내 사람이다. 땅을 기어다니는 놈이 내게 명령할 자격은 없어."
"굳이 벌주를 삼키는군."
벌주 같은 소리를. 반마가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성당의 천장에 매달려 있던 등불이 산산이 깨지며 벌떼처럼 쏟아졌다. 이단심문관이 검으로 급소를 보호하며 웅크린 찰나.
등이 뜨거웠다. 머리가, 아니… 전신이. 피부를 끓어오르게 하는 작열감에 반마의 시선이 제 머리 위를 향했다. 새하얀 구가 푸른 전류를 빛내며 허공에 떠 있었다. 온몸이 아리도록 번뜩이는 푸른빛. 신성력. 저를 구속했던 빛과 마찬가지로 속이 뒤틀릴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구가 당장이라도 번개를 내릴 것처럼 일렁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본 순간 서도윤의 입이 마법을 읊었으나―
한 발 늦었다.
구에서 쏟아진 사슬이 서도윤을 꿰뚫었다. 강렬한 통증과 함께 피가 튀었다. 팔, 다리, 복부. 여덟 개의 사슬이 서도윤의 전신을 관통했다. 당겨라! 셋으로 모인 이단심문관이 외쳤다. 그와 동시에 길게 늘어졌던 사슬이 팽팽해지며 반마의 사지를 당겼다. 마치 표본과 같이 반마의 몸이 뒤틀려 고정됐다. 이안을 단단히 고정해 안던 팔이 열리고 익숙한 무게감이 훌쩍 떨어졌다.
추락의 순간, 눈이 마주쳤다. 크게 벌어진 은색 눈동자. 놀란 표정. 그것을 마주한 서도윤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몸에 새겨진 것처럼, 오래 전에 정해진 규칙처럼, 예지된 것을 따르듯이. 반마가 입을 열어 총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안!"
타앙! 서도윤이 마치 쏘아지듯 이안에게로 떨어졌다. 반마를 저지해 당겨지던 사슬이 새된 소리를 터뜨렸으나 그뿐이었다. 끊어지지 않는 신성의 사슬이 반마의 몸을 찢어냈다. 사슬에서 벗어난 몸뚱이가 피를 쏟아냈으나 서도윤은 신경쓰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팔을 이안에게로 뻗는다. 신성 사슬에서 벗어났으니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이단심문관들이 있는 땅으로 떨어지길 자처했다. 그저 이안이 추락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제 전부라는 듯이 반마가 강하했다.
이 순간.
신이여, 기도합니다.
태어난 죄로 이곳에 매달린 우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의 더럽혀진 마음을 정화하여 주시옵고,
…마침내 그가 새로이 태어날 수 있게 하소서.
그를 얽매고 있던 별빛이 산산이 조각났다. 구속이 깨지며 짓눌려 있던 마력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그의 온몸을 휘감는 붉은 마력이 서도윤의 의지에 응답했다. 그가 손짓하는 대로 따르고 그가 명령하는 대로 이행한다. 마력의 힘을 빌어 서도윤이 속도를 높였다. 간절히 내뻗어진 손끝이 이안의 옷에 스쳤다. 이를 악문 서도윤이 마력을 더 끌어올림과 동시에, 손아귀에 익숙한 체온이 잡혔다. 이안의 것, 이안의 팔, 이안의 몸. 서도윤이 이안을 필사적으로 부둥켜 안았다. 쿠당탕탕! 강한 충격이 온몸을 때렸다. 신성사슬에 찢겨 회복되지 않는 상처가 충격에 눌려 피를 울컥울컥 쏟아냈다.
그러나 괴로워할 틈이 없었다. 서도윤이 빠르게 몸을 일으켜 이안을 살폈다. 추락했을 때의 문제인지, 혹은 바닥에 부딪치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이안은 정신을 잃은 채였다. 눈이 감긴 창백한 낯에 서도윤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안 돼, 제발. 서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로 더러워진 손이 이안의 가슴을 짚었다. 벌벌 떨리는 손 아래서 강력한 마력이 범람했다. 구속이 해지되며 이 성당은 물론 마을 전체를 파묻을 수 있는 힘이 생겼건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무르기 그지 없는 인간의 육체였다. 농도 짙은 치유마법이 이안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절실함 그것 하나에 의지해 모든 마력을 치유마법에 쏟았다. 다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 끝내 서도윤의 뺨이 젖어들려던 때였다.
이안의 눈꺼풀이 열렸다. 생기가 가시지 않은 그 은빛 눈동자에 서도윤이 기쁘게 미소 지은 순간.
푹.
푸른 검날이 서도윤의 가슴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반마의 피가 묻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그의 가슴을 가르고 솟은 검날은 티 없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서도윤의 가슴이 붉게 젖어들었다. 놀라 크게 열린 눈과, 벌어진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뒤에서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몇 번 검날을 쑤석인 이가 거칠게 검을 뽑아냈다. 그 사나운 충격에 간신히 버티고 섰던 상체가 무너져내린다. 풀썩 쓰러진 이를 반사적으로 안으며, 차이안이 충격 어린 눈으로 너머를 보았다.
"반마 따위가 고생시키는군."
절걱, 절걱. 은빛 갑옷이 검날이 발하는 빛을 반사해 푸르게 반질거렸다. 신성의 축복을 받은 갑옷엔 반마의 피조차 튀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걸어온 이단심문관이 차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퍽 다정한 어투가 이안에게 건네졌다.
"이안 경, 기다리셨지요. 팔을 고쳐드리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맞추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차이안은 투구 너머를 볼 수 없었다. 여태 그러했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의 무심한 손길이 서도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강하게 당겼다. 덜컥 들어올려진 목 아래로 새파란 검날이 끼어들었다. 그대로 베어낸다면 머리가 잘릴 것이다.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는 서도윤은 제 목 밑에 뭐가 들어왔는지 모르는 낯이었다. 핏물이 번진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이안의 얼굴만을 보고 있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 핏기가 가신 낯을 그저 걱정스럽게. 덜덜 떨리는 손이 이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을 따라 피가 번졌다.
철컥. 검날이 마치 경고하듯 서도윤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서도윤은 신성력이 주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처럼 몇 번이나 이안의 뺨을 매만졌다. 이, 안…. 서도윤이 색색거리며 속삭였다.
"알고 있었, 구나…."
"반마, 입 닥쳐라."
"내, 가 죽어야… 네 팔을 고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그런데도 여기, 와준… 거야. 이들과 손잡으면, 더… 편했을 텐데도…."
이단심문관의 말을 듣는 순간 서도윤은 깨달았다. 이안은 내 죽음으로 팔의 재액을 누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나를 믿어서, 믿고 싶어서 여기 왔고, 나에게 숨긴 걸 말해달라고 한 거야. 진실을 아니 되레 편해졌다. 눈과 입으로 모자라 코와 귀까지 피로 먹먹했다. 하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귀가 피에 젖어 제대로 웃었는지 들을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자신은 죽는다. 이단심문관의 푸른 검이 심장을 꿰뚫었으니 예외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서도윤이 차이안의 왼팔을 붙잡았다. 화인처럼 새겨지는 핏자국에 이안이 움찔거렸으나 서도윤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어. 이안과의 약속은 이단심문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안이 저를 믿으러 와주었듯, 저 역시 믿음을 돌려줄 차례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태웠다. 성검이 낸 상처로 줄줄 새어나가던 마력이 얕게 진동하며 반응했다. 마魔를 비롯한 모든 마력생물이 할 수 있는 것. 가장 아름다운 최후.
자폭.
서도윤의 가슴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선명한 신호에 이변을 예감한 이단심문관이 급히 물러섰으나 푸른빛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신성처럼 빛을 뿜어내던 가슴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부스러진 신체의 파편이 이안의 다리 위로 떨어진다. 그 위로 피를 왈칵 쏟아내며 서도윤이 피와 함께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단자의 명단에 새겨진 진명이 핏물처럼 터져나왔다.
"반마 슈테펜 로스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니…! 아버지는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라! 아들의 생명과 피와 축복은 마지막 기적을 끝으로 재가 될지니!"
"서, 도윤…."
"…아버지는 아들의 기도를 들어 염원을 이루어주소서."
"서도윤!"
차이안의 손이 서도윤을 붙잡았다. 그런다고 재처럼 부스러지는 신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닐진데 어떻게든 틀어막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안의 손이 떨리는 걸 느끼며 서도윤이 웃었다. 심장이 으깨지는 듯한 통증에도 그저 행복하게 웃으며 이안의 왼팔을 쥐었다. 기도의 끝, 하늘이 울부짖었다. 진명을 건 희생은 그 존재를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치지 않을 리 없다. 낫지 않을 리 없다. 이안의 팔은 서도윤의 죽음으로 낫게 될 것이다. 성력을 닮은 푸른빛이 이안의 팔을 휘감았다. 마력이 쭉 빠져나가자 그와 동시에 다리가 재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두려워한 죽음이 닥쳐오고 있음에도 서도윤은 다만 만족하여 웃었다. 다급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이안의 체온이 따뜻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하늘의 울부짖음을 뚫고 다정히 이안을 불렀다. 어디서 누군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 약속했잖아. 내가 팔 고쳐준다고."
"서도윤, 제발…!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이런 방식은, 이건…! 제발……."
부스러진다. 다리가, 머리가, 눈과 몸통과 팔뚝이.
간신히 남은 입으로 서도윤이 속삭였다.
"…그래도 네 근사한 연주를 듣지 못한 건 아쉽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진 한쪽 팔만이 이안의 왼팔에 아득바득 붙어 있다 끝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서도윤이 존재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흘렸던 피와 눈물과 하다못해 옷자락 하나 없이 모든 것이 공평하게 부스러졌다. 아무것도 없이 비어버린 허공을 끌어안으며 차이안이 괴로움을 토해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왼팔만이 서도윤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
일주일 뒤, 황도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재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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