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Coram Deo! 5
부서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텅, 공명음과 함께 등이 켜졌다. 차이안은 이곳이 이단심문관들이 이 순간을 위해 마련해둔 곳이라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 챘다. 창문이 나 있지 않은 밀폐된 방, 빛이라고는 천장에 매달린 등불 하나뿐이고 그 바로 아래 자리한 테이블은 무엇이 튀더라도 지워낼 수 있는 철제였다. 테이블은 하나, 의자는 둘. 차이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문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잡아뺐다. 저 철저한 이들이 이안에게 문 가까이 앉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으니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일 게 아니라면 순순히 협조하는 편이 나았다. '반마'와 얽혔다는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이단심문관과의 마찰은 악수이기도 했다.
심문실에 이안을 먼저 들여보낸 이단심문관이 문을 닫으며 바깥의 이들에게 지시했다. 사주 경계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적의 대처해. 마을 주민이 아닌 사람이 보이거든 붙잡아둬라. 알겠습니다. 언제 끝날지 예상 가십니까? 경께서 협조적이라면 금방이겠지. 늦더라도 해가 지기 전엔 끝날 거다. 반마의 특성을 생각하면 해가 떠 있을 때 마무리 되어야 수월하겠습니다. 그렇지.
끼이익, 철컹…. 문이 닫혔다. 차이안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아직 비어 있는 건너편 나무 의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꼿꼿하고 담담한 태도에 이단심문관이 조그맣게 감탄했다. 이런 곳은 처음 와보았을 텐데도 겁 먹지 않고 괜히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이, 과연 귀족이로구나. 이단심문관을 마주하고 추하게 구는 이들이 차고 넘치건만 눈 앞의 이 사내는 반마와 엮여 있다는 걸 들켰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 담대함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과 달랐다. 스스로의 행동에 떳떳하고 강한 확신을 가져 후회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였다. 대단히 근사했다. 폐하의 명이 아니었더라도 그의 죄를 사하여 모르는 척 했을지도 몰랐다.
상대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태도로 드러난다. 의자에 앉은 이단심문관이 투구 너머로 이안을 응시했다. 그의 곧은 자세에 이안을 향한 경시나 멸시 따위는 없었다. 남자는 최대한의 존중과 예의를 내비추어 첫 마디를 열었다.
"심문을 시작하기 전에 폐하께서 저희에게 내린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제가 알아도 되는 것입니까?"
"예. 저희를 너무 경계하지 않으셨으면 하여 말씀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절그럭. 이단심문관이 갑옷의 일부를 열어 고이 접힌 밀서를 꺼냈다. 이안이 읽기 좋도록 펼쳐 건넨 남자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반마를 처단하라. 단, 차이안 백작이 연관되어 있을 경우, 백작을 이단에서 제하라. 만약 백작이 반마에게 세뇌 당했다면 세뇌를 풀고 보호하라. 백작이 자발적으로 반마에게 협조하고 있다면 백작을 설득해 반마와의 연결을 끊고 보호하라. 백작이 반마와의 어떤 연관점도 없다면 마찬가지로 백작을 보호하라.'"
"……."
"국새가 찍힌 칙령입니다. 원칙대로라면 황명이 내려온다 할지라도 신전은 별개로 움직여야 하지만 반마와 관련된 예언이 있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언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예언은 신전 내에서 기밀로 다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발설할 수 없음을 양해해주십시오."
차이안이 들고 있던 칙령서를 내려놓았다. 몇 번 보아 눈에 익은 황제의 필체와 부정할 수 없는 제국의 인장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황제가 제국의 이름으로 말했다, 저는 어떠한 죄도 없다고. 제가 반마와 약속을 맺고 반마를 풀어주려 하고 반마의 힘으로 팔을 치료한다 하더라도 사교도로 낙인 찍히기는커녕 도리어 보호 받을 것이라고 황제의 이름으로 선언했다. 황제의 총애가 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종교 테러를 일으키는 사교도와 비견되는 이를 보호할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칙령서를 노려보며 차이안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예컨대, 이단심문관이 말했던 '예언'이라든가.
이안의 분위기가 처음과 사뭇 달라지자 이단심문관의 태도도 느슨해졌다. 태만해졌다기보단 서로 간의 긴장과 경계를 낮추어 효율적인 대화를 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이단심문관이 이안에게서 칙령서를 돌려 받으며 서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반마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할 겁니다. 경께서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거짓을 답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가 반마를 사살하는 목적을 이루기까지 이 좁은 방에 계셔주셔야겠지만 말입니다."
이단심문관이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틈없이 맞물린 손가락에서 단호함을 읽으며, 차이안은 첫 번째 질문을 들었다.
"반마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까?"
*
심문실 바깥으로 나오자 겨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르던 하늘은 어느 새 노을이 져 붉은빛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내 머리가 꽤 충격을 받았나 보지. 이안은 제게 인사를 건네는 이단심문관들에게 가볍게 눈짓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차이안을 잡지 않았다. 그를 끈질기게 쳐다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심문실에서 주고 받았던 대화가 차이안을 만난 목적 그 자체였다는 것마냥 자연스럽게 놓아주었다. 다른 이들은 반겨 마땅할 태도였지만 우습게도 차이안은 희미한 초조함을 느꼈다. 이들이 할 일을 알고, 그 말에 내심 흔들려버린 자신을 알기에 오는 초조함이었다.
…뭐든 아직 늦지 않았다. 서도윤을 만나 진실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일 없이 스스로를 관철할 수 있으리라. 차이안의 눈이 산 봉우리에 걸린 태양에게로 향했다. 반마를 죽이는 것은 해가 떠 있을 동안. 서도윤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 못한 이단심문관들이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성당을 찾아내 서도윤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겨울의 노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밤하늘에 밀려 사라지므로 오늘 처단하러 움직이는 것은 지나치게 도박적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오늘이 기회였다. 오늘만큼 확정적으로 서도윤의 생존이 보장되는 날이 없었다.
차이안은 결정을 내리자마자 움직였다. 바이올린이 잠시 눈에 밟혔으나 우선 내려두었다. 빠르게 가서 중요한 것만 묻고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했다. 해가 떠 있을 때면 숲으로 들어가는 게 들킬 수도 있으니까 해가 지고 나서, 서도윤이 비교적 자유롭게 성당 안을 돌아다닐 수 있을 때에…….
'반마가 경을 속였군요. 구속을 푸는 것만으로 이안 경의 팔을 고친다니,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경께서 구속을 풀어주면 그대로 경을 죽이고 도망쳤을 겁니다. 그것이 마魔의 특성입니다.'
'다만 반마의 힘이 이안 경의 팔을 일부 회복시킨 것은 사실이니… 반마가 원료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안 경. 우리가 반마를 죽이고 그것의 죽음과 피로 당신의 팔을 고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말해주십시오.'
'반마는 어디에 있습니까?'
"…직접 대답을 들은 뒤에 결정해야지."
이안이 마치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팔을 회복에 사활을 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구속을 푸는 데 모든 의지를 쏟았다. 이안이 구속의 빛을 잡지 못해 허망해 했을 때도 서도윤은 참고 기다렸고, 몇 번이고 언젠가 있을 바이올린 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넌지시 건네진 그 말들에 묻어나던 감정은 거짓 하나 없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연주에 취해 눈을 반짝이던 사람의 표정까지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차이안의 감각이 녹슬진 않았다. 차이안은 자기 확신이 있었고 과거에 있었던 일을 후회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차이안은 서도윤의 진심을 믿었다.
하여, 그날 밤, 차이안은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는 성당 앞에 섰다. 낡고 오래된 나무문은 차이안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똑같았으나 문을 여는 그의 기분만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오래된 삐걱거림, 희미한 먼지 냄새, 아스라이 들려오는 풀 스치는 소리. 차이안은 별빛을 매단 서도윤을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평소와 같이 돌아올 미소를 기대했으나, 서도윤은 무언가 들켜버린 사람처럼 뻣뻣한 표정을 띤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짧은 적막이 둘 사이에 가라앉는다. 어색한 침묵 끝에 차이안이 서도윤에게 다가가며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좀 늦었어. 혼자 있는데 심심하진 않았고?"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말투에 평소처럼 투덜대던 사람은 없다. 서도윤이 고개를 삐걱삐걱 흔들며 등 뒤로 숨긴 팔을 더욱 움츠렸다.
"나야 늘 혼자였으니까 색다를 건 없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자연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이 모든 게 단절된 것 같았다. 돌덩이 같은 침묵을 등에 진 채 차이안이 서도윤의 옆에 앉았다. 낡은 의자가 삐걱댔다.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게 전부라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이안을 떠받쳤다. 오늘 부서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차이안이 서도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차이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갈피를 잃어버린 잿빛 눈동자가 고집스럽도록 깨진 성당 타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 이안은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서도윤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무언가 잔뜩 찔린 얼굴을 한 채 눈도 못 마주치며 입술을 씹어대는 모습은 꽤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한참의 침묵 후 서도윤이 간신히 꺼내든 말이 이런 거였다면, 차라리 제가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적어도 이런 실망감은 느끼지 않았을 테지. 차이안이 눈을 맞추지 못하는 서도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흔들리지 않으려 너를 만나러 왔는데, 넌 되레 날 더 흔들리게 해.
"…서도윤, 다시 말해 봐. 오늘은 이만 가보라고?"
"……."
"도윤아."
돌아오는 답이 없다. 오늘이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인데도 서도윤은 입을 다물길 택했다. 하. 차이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됐어,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할 것이다. 차이안은 단 하루뿐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건 차이안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서도윤, 난 이단심문관이 널 죽이러 오기 전에 네게서 진실을 들을 거야. 단단해진 이안의 목소리가 서도윤이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을 찔렀다.
"하나만 물을게. 네 봉인을 풀면 내 팔을 고칠 수 있는 거, 맞아?"
침묵. 그것이 답이 되어 이안의 마음을 비워냈다.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이안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 카테고리
- #기타
- 페어
-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