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생강을 좋아하지 않아
글스터디 4월/주제 소중한 기억
이슈가르드의 하늘이 아름답다. 비단 자신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요 며칠 커르다스는 신기할 정도로 계속 맑았으므로.
오랜만에 성도에 방문한 나리엔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홀장거리로 향했다. 이 곳은 오르슈팡과 거닐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럼에도 하늘 가득 푸른 빛이 가득해 그것이 꼭 그와 함께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충분해졌다. 여전히 눈 냄새가 그칠 일 없는 곳이건만, 슬쩍 눈만 위로 올리면 따스한 푸름이 내려앉아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 행복을 따라 모험가의 입가에도 어쩐지 사령관의 것과 비슷한 웃음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아주 좋아!’ 를 외칠 듯한 얼굴이었으나, 금세 평소의 무감한 얼굴로 돌아온 이유는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용머리 전진기지로 돌아가야지. 오늘은 새로운 찻잎이 나왔다는 소식에 들러본 차였다.
그와 자신에게 차는 조금 특별했다. 커르다스는 추웠고, 그가 내어주는 차는 언제나 따뜻했기 때문일까? 돌아가 새로운 차로 티타임을 가질 생각을 하니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이제는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승전 축하연. 그 끔찍한 상황을 뒤로하고 모험가는 설원을 밟았었다. 양 손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동료들의 손을 꼭 쥔 채. 그리고 별 기대 없이 두드린 문이었다. 당연했다. 타국의 왕을 시해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를 누가 쉬이 허락할 수 있을까, 자칫하면 국가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은 위태롭고, 좁게… 단 하나만 나 있었으므로.
놀랍게도 사령관은 자신을 받아주었다. 세상에, 맙소사! 나중에 백작에게 들어보니 자신을 개인적으로 찾은 적 없던 그가 직접 백작을 설득했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하며 사실 자신은 곤란했다며, 아무리 국호 개방에 찬성하는 입장인 포르탕 가도 과연 국왕을 시해한 자를 들이기는 부담스러웠다고. 그럼에도 둘째 아들의 얼굴을 보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고 말이다. —모험가는 그 말을 들으며 ‘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성부터 물려주는게 낫지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왜 자신을 들여준걸까. 전진기지의 응접실을 내주며 우리의 기분을 살피고, 새벽의 방식을 존중하여 ‘눈의 집’ 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여전히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찌되었건 그 날 사령관이 내어준 생강차의 맛을 모험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도, 생강차의 매운 맛에 말려들어가는 혀를 애써 펴며 그에게 희미하게나마 웃었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금세 귀한 꿀을 가져와 한 스푼 타 주던 그 다정한 얼굴이란.
‘저번에도 한 번 내주었었는데 깜박했군.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으마, 맹우여!’
기분이 이상했다. 단 한 번 그와 티타임을 가졌었을 뿐이고,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당연히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동료들이 의아한 얼굴인 것을 보면 표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텐데 어떻게 안 걸까. 달콤하고 알싸한, 그리고 따스한 찻잔을 쥐어 얼굴을 가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얼굴이 평소같은 상아색은 아닐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코를 박듯이 찻잔만은 뚫어지게 보고 있자면 문을 두드렸을 그 당시의 오르슈팡이 생각났다. 잊을 수가 없지. 그런 말을 들었는데 잊을 리가.
‘…하지만 걱정마, 널 지켜줄 사람은 여기에도 있으니까!’
주홍빛의 촛불이 일렁이고, 생강향과 알피노의 결의가 가득한, 그리고 오르슈팡의 호의와 다정이 포근하게 느껴지던 그 날의 ‘눈의 집’ 에서는, 정말로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 간질간질하고 울 것 같지만, 그것이 결코 부정적이지는 않은… 입가에 맴도는 건 매운 생강향이지만 꿀이 한 스푼만 들어가도 이토록 부드러이 좋은 맛이 되듯이, 너라는 사람이 더해지면 설원과 같은 내 삶에도 싹이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넨? 어디 아픈 것 아닌가?”
“…아.”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찻잎을 든 채 고개를 들면 햇살 냄새가 나는 남자가 자신을 심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급히 고개를 저으며 안심시키듯 그에게 웃어보였다.
“아냐. 미안해. 잠깐 예전 생각을 좀. 나쁜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래? 그렇다면야! 오늘은 네가 사온 차로 티타임을 갖는 거겠지? 후후, 정말로 기대가 된다. 차를 우리느라 집중한 너의 얼굴…그리고 신중히 움직이는 팔 근육… 그 모든 것이! 음, 아주 좋아!”
평소와 같이 웃으며 모험가의 움직임을 찬양하기 바쁜 그의 입을 보니 어쩐지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너와 동료들의 덕이겠지. 오르슈팡. 그러니까… 이 정도 장난은 받아줄거지?
“그런데 그거 알아, 오르슈팡?”
“음? 뭘 말이지?”
“난 사실, 생강 별로 안 좋아해.”
“……어?”
그간 숱하게 타주었던 생강차가 스쳐지나가는지, 점점 눈처럼 새하얘지는 얼굴을 보고, 나리엔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오르슈팡이 몰랐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횡설수설 이어간다. 그런 그에게 농담이었다 말하며 안심하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너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지만, 실은 말야. 지금은 좋아해. 그렇잖아, 나를 위해 꿀을 타주던 눈이, 안타까움을 담고도 나를 향한 신의와 애정으로 빛나던 눈동자와 마주쳤는데 어떻게 싫어하겠어. 그건 아마…
그건 아마도,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가장 소중한 향일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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