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가 죽은 날

4월 글스터디 /주제 : 소중한 기억

느루네 by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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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슈팡이 죽었다.

사인은 과다출혈 및 장기손상. 이걸 손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빛에 관통된 몸은 내장이 타들어가 사라졌으니까. 이건 소실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모험가는 눈물에 짓무른 눈을 비비며 허탈하게 웃었다.

오르슈팡이 죽었다.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왜, 어째서… 제발, 거짓말 하지마. 모험가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며 목숨처럼 끼고 다니던 장갑도 벗어둔 채로 손끝을 벌겋게 물들였다. 너덜너덜해진 손톱은 이미 본래의 모습을 잃어 톱니마냥 삐죽거렸고, 모험가의 입가에도 손에서 묻어나온 피가 가득했다. 평소라면 그것을 말려줄 이가 주변에 한 사람 쯤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포르탕 가에서 자신에게 내 준 손님방에서 창문과 문을 모조리 걸어 잠근 채 커튼까지 쳐두었기 때문이다.

잔뜩 어두워진 방에서 난로는 커녕 촛불조차 켜지 않은 채,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험가는 누가봐도 미친 사람이었다. 오르슈팡의 장례식이 시작되어서야 잠시 얼굴을 내비친 영웅은 자신이 우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히죽댔다. 처음 웃는 모습을 연습하는 사람처럼 어색한 모습에 포르탕 백작은 물론이고 알피노와 타타루도 말을 걸 수 없었다.

웃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보며 혹여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는걸까 싶어 알피노가 가까이 다가갔다가 조금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묘지 앞에 주저앉아 있던 모험가가 눈만 굴려 어린 엘레젠을 쳐다보았기에. 아니, 이걸 보고 있다고 해야할까? 모험가의 눈에는 그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럼에도 입은 쉼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어릴지언정 밝은 귀를 가진 그는 꺼질듯한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응, 오르슈팡. 걱정마, 나, 나 잘 웃고있어. 걱정마. 나 괜찮아. 정말, 나는 괜찮아. 응. 괜찮지? 이제 곧 알피노가 올거야. 치유술을 써줄테니까, 미안해. 내가, 안 돼. 제발, 오르슈팡… 어디 가? 가지마. 제발…”

어린 학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영웅은 눈과 흙 밑에 묻혀있을 사령관에게 말을 걸고 있다. 자신의 품에서 차가워진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색하진 않은지, 어딘가로 가는 것인지, 발등에 입을 맞출 듯 애원하고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제발… 내가 잘못했어. 내 곁에 있어줘. 내가 지켜줄게, 부족하다면 내가 대신 죽어줄게. 날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럼 이렇게 되면 안되잖아. 이런 건 원하지 않았어. 제발…입을 찢어서라도 웃어줄테니까. 이러지마. 어떻게 네가 날 혼자 둘 수 있어.

울부짖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기어코 땅을 긁어내기 시작한 손끝은 여전히 붉어서, 하얀 눈이 붉게 물드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놀란 백작이 옆에 서있던 기사에게 명령을 내려 얼굴까지 흙으로 엉망이 된 모험가를 제압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손자국이 길게 남은 눈길 위로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붉은 빛이 점점이 흔적을 남겼다.

그 후로 소문이 돌았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영웅이 돌아버렸다는 이야기. 밤마다 포르탕가의 한구석에서 비명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에 따라 성도의 불안감은 날로 불어났다. 아직 용시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영웅은 해야할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비행선을 타고 도망친 토르당7세와 창천기사단을 뒤쫓는 것. 그에게 미칠 시간은 사치였다.

만약 이대로 영웅이 영영 미쳐버린다면, 그가 찔러놓은 벌집은 누가 수습할 것인가. 비난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영웅은 영웅으로서 책임을 져라, 라는 속편한 비난이었다. 포르탕 가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백성들을 보며 백작은 혀를 찼다. 자신의 권력을 놓기 싫은 성직자와 귀족들이 손을 쓴 것 이겠지.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질 급한 영웅의 파트너—본인의 말로는—는 그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며 우선 자신들끼리 출발하겠다고 하는 것을 알피노가 말렸다.

—그는 늘 답을 찾는 이일세. 조금만 시간을 주지 않겠나. 에스티니앙 공.

아닌 척 해도 작은 학자에게 약한 에스티니앙은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이다. 그 이상 늦어지면 네가 뭐라고 하든 갈거니까 알아서 해라. 알피노는 그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굽혔다.

모험가는 여전히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방 한가운데 서있다는 점일까. 귓가에 쉴 새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과히 광인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건만,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거울을 보고 있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은 온통 그의 목소리였다. 전부 뒤섞여 모든 것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마 자신은 과거 속을 유영하고 있는 듯 했다. 여전히 눈 앞은 붉었다. 눈의 핏줄이 터진 건지, 아니면 그 날의 풍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를 찢는 파공음과 살을 찢는 소리, 그리고 뼈가 분쇄되는, 불길한 소리… 그 사이로 숨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슬픈 표정은…영웅에겐, 어울리지 않아…’

눈을 꾹 감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던가? 어지러이 섞이는 목소리 중 선명한 소리가 몇가지 들려왔다.

‘하지만 걱정마, 널 지켜줄 사람은 여기에도 있으니까!’

‘그래, ’눈의 집‘ 이라고 하자!’

‘오늘은 특히 춥군. 모두에게 네 마음속 따스함을 나눠주는게 좋겠어.’

‘정말로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곁에는 아직 동료가 있어요.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아주 좋은 동료들이지요.’

그가 없다. 언제나 나를 반겨주던, 나에게 손을 뻗어주던 그가 이제는 없었다. 그가 남긴 말들만이 영웅의 머리속을 맴돌았다.

…우선은, 해야할 일을 하자. 아직 부러지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으니, 나는 영웅으로써 행동해야했다. 너의 맹우 나리엔은 너와 함께 죽었으니까. 앞으로는 잘 웃어볼게. 영웅에게 슬픈 표정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내 곁에 아직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나의 필요와 관계없이 곁에 있어주던 너는 이제 없으니까. 네가 남겨준 이 기억을 안고서 무너지지 않아볼게.

오로지 에오르제아의 영웅으로 살겠다. 그리 다짐하며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오르슈팡이 죽었다. 아주 춥고, 붉고, 그리고…

오르슈팡의 맹우 나리엔이 죽은 날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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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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