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지 마소서

오르나리/4월 글스터디 3편

느루네 by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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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숨이 멎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되도록 오래 고통스러워 하길 바라.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해 웃어주었던 그를 위해. 얼음가루로 흩어진 그 사람을 위해.

그리 생각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기이한 표정이었다.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구름바다 너머 아지스 라 까지 날아간 교황을 찾아 온 길에서 자신들을 지키고자 얼음으로 흩어진 사람이 있었다.

또야, 또. 또…또 나 때문에. 안 돼. 이러지마….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으며 아직도 연습중인 웃음을 지어보인다. 알피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으나, 중요한 감각은 아니었다. 에스티니앙의 시선과 뒤따르는 한숨을 흘려넘기고 교황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너를 죽이는 날이야. 토르당. 벌레가 기어가듯 드글거리는 마음을 내리누른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지만 마냥 웃었다. 아아,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시여……

부디, 살인자를 구원하지 마소서.

이제 사냥 시간이다. 너희에게 멋진 사냥감을 선물할게. 오르슈팡, 이젤. 조금만 기다려줘.

살인자를 조각내서 너희의 무덤에 뿌려줄게. 아아, 시체조차 찾기 어렵겠지. 이젤. 괜찮아. 네가 흩어진만큼 이 하늘바다에 잘게 조각내서… 부족하다면 가루를 내서라도 너희의 넋을 위로할테니까.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리를 예민한 엘레젠이 듣지 못할리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알피노를 제 뒤로 보내고 입을 열었다.

“어이.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다만 그만하지. 곧 도착이다.”

그러네. 그러자. 응. 말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넌 행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응. 알아. 나 열심히 할게. 오르슈팡.

중얼거리며 활을 매만지는 모험가를 보고 푸른 용기사는 혀를 찼으나, 그 이상 말을 얹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상실의 고통은 자신 또한 익히 아는 것이었기에.

*

싱겁다. ‘나이츠 오브 라운드’? 우습기 그지 없어. 자신에게 있어 기사는 단 한 명이었으므로, 모험가가 썩어버린 기사를 세상에서 도려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아, 당신이 무참하게 죽여버린, 당신으로 인해 죽어야 했던 나의 사람들이 아직도 귓가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데…

쉽게 죽여줄 수는 없지. 야만신이 되었으니 가루를 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에 맞는 고통을 느끼도록 해줄 것이다. 영웅으로 살겠노라 다짐했건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붉은 감정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모험가는 그저 야만신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어릴 적부터 장난감보다 활을 잡았던 시간이 많은 만큼 표적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모든 화살은 독화살로, 바람을 담은 화살로. 죽이지는 않지만 고통은 느낄 수 있도록. 급소만 피해 꽂힌 화살들로 온 몸이 뚫린 야만신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천한 놈이 감히… 나를 이렇게 모욕하다니!”

그건 내 알 바 아냐. 대답조차 아까워 입을 다물며 웃은 모험가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손끝으로 시위를 퉁겼다. 일련의 움직임이 마치 죽은 이에게 보내는 애도같아서, 뒤틀린 열두기사의 잔재는 마지막 화살을 맞으면서도 그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쿵, 무릎을 꿇은 거체가 노쇠한 몸으로 줄어든다. 흰 옷을 입은 성직자는 자신에게 다가온 모험가를 올려다보았다. 빛을 등진 그는 자신의 눈에 너무나도 검어서, 그 사이로 유일하게 빛나는 녹안이 절망과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어 사람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그 것은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큰 감정이라, 마치…먹잇감을 눈앞에 둔 거대한 뱀이 아니던가?

잡아먹힌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포로 몸이 굳어 멈춘 교황의 바로 앞까지 선 나리엔은 쪼그려앉아 그와 눈을 맞췄고, 노인은 눈을 피하면 바로 제 목을 뜯길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 붉게 물들어 오히려 말간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영웅의 입이 열린다. 아름다운 노래를 자아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붉고 검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였다.

네가 영원히 고통받기를 바라. 네가 죽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차마 눈을 감지도 귀를 막지도 못한 채로 온전히 비난을 감내하길 바라. 아, 입 열지 않아도 돼. 말해도 나는 못 들을거야. 네가 죽인 사람들이…계속 내게 말하고 있거든.

히죽, 입꼬리를 올려 웃는 그를 교황이 봤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무어라 입을 움직이려다 그대로 에테르가 되어 사라졌으니.

에테르로 화한 야만신이 사라지자, 그들의 능력으로 발생했던 영역이 해제되며 붉은 하늘이 드러났다. 영웅은 쪼그려앉은 자세를 무너뜨리며 주저앉아 그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입은 여전히 히죽대는 채로, 그리고 활은 옆에 팽개쳐진 채로. 어쩔 수 없었다. 잘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야 했으니까.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모험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그 때, 그 기억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 주었으니까. 괜찮아. 이번에는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걱정마. 영웅에게, 슬픈 표정은…. 흐,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 드넓은 하늘로 퍼져버리는 웃음소리가 기괴하다. 입을 쭉 벌리며 웃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흙먼지에 헝클어져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나리엔은 혼자서 웃음소리같은 비명을 질렀다.

부디, 신이 있다면…신이시여.

이대로 오직 죽음을 바라나이다. 영원토록 지옥 가장 깊은 곳에서 불타기를 원하나이다. 제발, 제발… 소중한 이들을 앗아간 살인자를, …저를 구원하지 마소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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