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이 되어

글스터디 2월/ 주제: 이심전심

느루네 by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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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슈팡은 가끔 신기하다. 알려준 적이 없는 것들, 혹은 티내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는 듯 군다.

예를 들어 밖에서 의뢰를 해결하고 집으로 왔을때, 눈발을 헤치고 돌아왔으니 내가 추울 것이란 사실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레 내 겉옷을 받아들고 따스한 생강차를 내준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만 생강차는 특유의 떫은 맛과 매운맛이 어려워 즐기지않았는데, 오르슈팡은 늘 꿀을 가득 넣어 단 맛이 부드러운 생강차를 내주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가 생강차를 달게 마시는구나 했었지. 

조금 전 비몽사몽한 채로 그가 자신이 마시려 타둔 생강차를 마시기 전까지는.

세상에! 잠이 확 깨는 맛에 혀가 순식간에 말려들었다. 우뚝 서서 그 맛을 곱씹고 있자니 뒤에서 인기척이 났고, 곧 쑥 뻗어진 단단한 팔이 내 손에 들려있던 생강차를 가져갔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눈썹이 밑으로 내려간 오르슈팡이 곤란한 듯 웃고 있다.

"이런, 넨. 네 것은 지금 만드는 중이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괜찮아?"

참 이상했다. 얼굴에 표정이 그리 드러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단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들어온 이야기였다. 도통 생각을 알 수가 없다나?- 그는 꼭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굴고는 하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난 모양인지 그가 의아한 기색을 띄었다. 언제나와 같은 웃는 얼굴이지만, 알 수 있었다. 

내 멍한 표정은 그리 좋은 얼굴이 아니었고, 더 오래 기다리게 하기는 싫었으므로 나는 따라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오르슈팡. 배고프지 않아? 나는 조금 고픈데 뭐라도 만들어줄까?"

"...그러지 않아도 돼. 지금 막 식사가 완성된 참이다. 자, 어서 이쪽으로 앉아! 네 차는 여기있다."

대답에 뜸을 들인 오르슈팡이 나를 가볍게 움직였고, 얼을 타는 사이 의자에 앉혀지며 테이블에 식사가 차려졌다. 쌉싸름하고 달콤한 생강과 꿀의 향, 끄트머리가 조금 타버린 빵과 살짝 얼었다 녹은 흔적이 보이는 샐러드, 마찬가지로 오래 구워 단단해진 고기가 보인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을지도. 살짝 차갑다 싶은 샐러드와 속까지 완전히 익혀낸 고기는 내 취향이었다. 그러고 보면 또 내 취향이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대다 말했다.

"오르슈팡, 이건 너무 나만 좋은 메뉴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해도 됐을텐데."

"음? 아니야, 넨. 탄수화물과 지방, 그리고 단백질과 섬유질까지 고려한 식단이다. 내 취향에도 꼭 들어맞아."

"거짓말, 오르슈팡이 좋아하는 건 다른거잖아."

그에 또다시 유쾌한 듯, 아니면 조금 민망한듯이 그가 웃었다.

"네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하겠군. 맞아. 내가 좋아하는 쪽은..."

""덜 구운 고기나 생선이지.""

말이 겹쳤다. 그와 식사를 함께하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산악도시에서 자란 탓인지 그는 고기보다 해산물에 흥미를 보였고, 고기는 살짝 덜 익힌 것을 선호했다. 오래 익히면 신선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려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게 중요했지. 

"...그것 봐, 너무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도."

"내가 그러고 싶으니 이해해다오. 그나저나, 취향을 알고 있다니 놀라운 걸? 코랑티오에게 들은건가?"

"이 정도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걸. "

그 말에 오르슈팡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상한가? 평범한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와 나는 서로가 바쁜 탓에 -혹은 그간 함께 감정을 외면해온 탓에-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드물었고, 함께 살게 된 최근에서야 아침 혹은 저녁을 나누어 먹는 일이 종종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그냥 알게 되었으니까. 

그건 마치 같은 잠자리를 쓰게 된 이후로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거나, 혹은 둘 중 하나가 식사를 준비하면 그 날은 일찍 귀가하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그저 빤히 그를 바라보니 귀 끝이 슬쩍 붉어진 채로 뺨을 긁고 있었다.

​"넨.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가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내 생각을 알아준다는게 정말로...기뻐서."

그 말에는 과연 나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람.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네가 나를 받아줬을 때부터, 나는 널 알아도 됐으니까.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너를 알지 않으려 외면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마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 ...정말 무슨 말을 하는거람. 잊어버려. 너무 바보같았지."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었고, 수많은 언어와 글을 배워 그것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배움이 멀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로 이 마음을 표현해야할까. ...알 수 없었다.

나와 눈을 맞추던 그는 반쯤 비워진 접시에 식기를 내려놓고 놀라 살짝 커졌던 푸른 눈을 부드럽게 접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커르다스의 하늘과도 같은 웃음. 마음을 모르던 시기에는 그저 시리게 박혀왔던 얼굴이지만, 이제는 내게 무엇보다 따스해진 표정이다.

오르슈팡은 포크를 꾹 잡고 있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얹으며 그 손만큼 따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다. 넨.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왜냐면...나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외면하려던 마음과 너를 드디어 받아들이게 되었을때, 내게 쏟아지던 너를 평생 잊지 못할거야. 사소한 버릇, 생각하는 모습, 너의 방식. 무엇 하나 잊을리가 없지 않나. ...그러니 지금은 식사를 하자. 그 뒤에는 네가 알고있는 내 취향으로 휴식을 취하고, 집을 꾸미도록 하지. 시간은 많고, 우리는 함께 있으니 말이야."

정말로 그다운 말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내가 그의 마음을 알고, 그가 나의 마음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서로에 대한 마음이라고, 오르슈팡은 말하고 있었다.

문득, 오르슈팡이 말했던 '참을 수 없다' 라는 말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울렁거렸다. 곧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내 손 위에 겹친 그의 손을 잡아 뺨을 부비며 웃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었으니 나도 말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눌러둔 마음이 넘쳐 해일이 되어 쏟아질 때, 우리는 그것을 오아시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며,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그게 바로, 마음이 통한다는 거겠지.

———————

나리엔은 간혹 자신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가령, 의뢰를 끝내고 돌아와 옷을 벗으면 따뜻한 생강차를 내어줄 때 라던지.

자신의 연인은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유독 생강차의 맛을 못견뎌 하곤 했다. 맵고 쌉싸름한 맛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건가 싶어 꿀을 타준 이후로는 마음에 들어해 그렇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사실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모른다고 답한 것처럼, 자신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알지도 모르지. 이걸 안다고 표현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그는 평소에 표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다져진 습관일지, 타고난 것인지는 모른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얼굴을 읽기 힘든 건 마찬가지 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과 조금 더 깊은 사이가 되고 나서는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꼬리나 귀, 유독 제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 눈빛, 단단한 가면 사이의 부드러운 웃음까지. 너는 이렇게나 내게 보여주고 있었구나.

그동안 외면해왔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까운만큼 네 마음을 알아야지. 알고, 느끼고, 받아들여서 네 마음에 온전히 안착할 수 있도록. 그러니 이 아침상과 네게 보이는 웃음은 오롯이 네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지.

한번도 말해준 적 없지만 알고있는 네 입맛에 맞춘 식사와 온기가 너만을 위한 것이라고. 네가 나를 알고 있는 만큼 나도 너를 알고 있다고.

요리는 지독히도 못하지만 의외로 혀가 예민한 너는 내가 어설프게 만든 음식에서 너에 대한 애정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실수로 넘길 수 있는 약간 타버린 빵, 오래 구운 고기, 얼었다 녹은 샐러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인다. 그럼에도 그 애정을 받는 것이 버거운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게 좋겠다고 한다.

그럼 또 알려줘야지! 내가 너에게 해주는만큼, 너도 내게 해주고 있다고. 내 취향을 알고, 서투른 손으로도 식사를 만들어 주려 하고,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유독 차가워진 귀를 난로에 미리 쬐어놓은 손으로 녹여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아직 서로의 해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버겁지만, 그또한 우리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받아 마실 수 있겠지.

같은 부분이 많지 않은 우리지만 마음이 통한다는 건 그런 것 아닐까. 너의 부족한 부분, 나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그것이 퍼즐처럼 맞춰진다는 것. 그리하여 하나의 조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오늘도 나에게만 보여주는 너의 따스한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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