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때로 꿈은 지독하고….
NCP 일상 커미션 샘플
엘가 아인테일즈는 꿈을 꾼다. 사람들의 환호와 열기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내보이는 꿈을 꾼다. 에일덤에 있는 모든 이들이 엘가의 이름을 연호한다. 하얀 꽃다발이 엘가의 발치로 날아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의 열기가 뜨겁다. 환하게 웃는 피아니스트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 강한 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이 빛무리처럼 흩어진다.
끔찍한 꿈이다. 엘가는 이 꿈의 끝을 알고 있다. 하지만 꿈 속의 자신은 제 의지와는 다른 또 다른 존재인 양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럼, 다음 곡은…. 안 돼. 그만 둬. 그만하고 돌아가…. 부드러운 선율이 피아노의 건반을 타고, 현을 타고 흘러 증폭된다. 점점 더 크게, 강하게, 더욱 강하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가 서로 부딪히고 깨지며 엉망인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 관객들은 더욱 크게 엘가의 이름을 부른다. 엘가, 엘가, 엘가…. 박수 소리와 피아노 소리, 찢어지는 비명 소리 끝에 엘가는 피아노에 손부터 잠겨 삼켜지고 만다.
퍼뜩 눈을 떴을 땐 텅 빈 방이었다. 이걸 방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고민 될 정도의 넓이였으나, 엘가가 처음 인식한 건 자신이 흰 방에 있다는 것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켜 앉자 엘가를 인식한 것처럼 물건의 형상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둥근 손톱이 있던 손에 털이 돋아난다. 자신이 움직이며 나는 소음이 더욱 크고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엘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전신 거울로 제 몸을 돌아본다. 크림빛에 가까운 털이 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귀가 쫑긋이고 꼬리가 살랑인다. 자신의 꼬리가 그리는 궤적을 따라 엘가는 한 바퀴를 제자리에서 가볍게 돌아보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데도 깨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종종 있다고 들었지만 그걸 자신이 직접 겪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거기에 그렇게나 끔찍한 꿈을 꿨는데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엘가는 자신의 키만한 문을 노려봤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변하는 건 없다. 어쩐지 엘가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린다. 제오 폴랑…. 이런 비슷한 일이 언젠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땐 자신이 호텔에 영영 남아버릴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고, 밖으로 나가는 건 그의 몫이었다.
그 때 당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때와 맞지 않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이 곳이 꿈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꿈은 어찌보면 이야기가 적힌 환상과도 같지 않은가…. 그래서 리베스퓌인 그가 떠오른 걸지도 모른다.
작은 발자국이 한 발자국 딛어진다. 체구보단 커다란 손이 문고리를 쥔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길거리다. 익숙하지만 낯설은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닥은 기묘한 금빛으로 일렁이고,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 빛을 띈다. 건물들은 둥글게 휘어진 것부터 뾰족하게 선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제오 폴랑이 서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했던 때처럼 그저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오 폴랑이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어떤 인사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재회한 예전의 친우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하는 게 정답일까? 친우이면서 동시에 숱하게 많은 상처를 공유하고 보듬어주었던 사이라면…. 진짜 당신인가요? 조금 멍청한 목소리가 나갔다. 엘가는 금방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젠, 당신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리베스퓌인가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뻔뻔하게 제 목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연기를 하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제오의 허리가 숙여진다. 이번엔 내가 도움을 주러 왔어. 엘가는 빛이 다른 두 눈동자에서 진의를 읽어내려 노력한다…. 대담한 사람일수록 눈빛에서 거짓말을 읽어내는 건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그 상대가 제오 폴랑이라면…. 자신은 젠에게 유독 무르고 연약했으니까.
나를 어떻게 도울건가요? 젠이 내민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엘가가 묻는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널 도와줄거야. 젠이 답한다. 꿈 속의 세계이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울 건 없었다. 그게 이별한 동료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다는 일이어도…. 생각하면 별난 일도 아니다. 자신이 너무 지친 탓이겠지. 힘든 일을 겪었고, 그보다 더 많은 곤란하고 고된 일을 함께 한 상대를 떠올렸기 때문에 그를 닮은 존재가 나타난 걸테다….
젠은 마치 엊그제 만났던 친구처럼 엘가를 대했다. 기이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함께 들어선 잡화 가게에선 나비 모양 브로치가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했다. 엘가가 말도 안 된다고 핀잔을 줄 적마다 젠은 지금 우리가 만난 건 말이 되고? 라고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엘가는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지만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이건 꿈이다…. 꿈에서까지 인상을 쓰고 다닐 순 없지. 여긴 젠이 머무는 곳인가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자신에게 달린 셈이다. 바삭바삭한 와플을 베어물며─달콤한 꿀같은 금빛 크림이 흘러내렸다─ 엘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동안 넌 어떻게 지냈어?”
“…예? 아, 일찍도 물어보네요.”
반박자 늦게 톡쏘듯 밀어붙인다. 조금은 어른처럼 보였을까? 이런 말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엘가는 내심 뿌듯했다. 흠흠, 헛기침한 엘가는 자신의 하루를 돌아봤다. 무료하고 조금은 성가신 사람들이 많은 나날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해달라, 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느냐 묻는 사람들은 하루에 수백 수천명을 상대해도 다음 날은 배로 불어서 찾아오기 바빴다.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아인이 변했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 일쑤였고.
“피아노는 어때?”
“이야기 꺼내지도 말아요. 방금 삼켜지고 오는 참이니까.”
“한 입에 꿀꺽?”
“ 한 입에 꿀꺽.”
마지막 남은 와플 조각을 꿀꺽 삼킨다.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와플을 감싸고 있던 종이호일로 닦아낸 뒤 저만치 떨어진 쓰레기통에 호를 그리며 던져넣는다…. 쓰레기통 안으로 쏙 들어간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다. 아싸. 등 뒤에서 젠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뒤늦은 부끄러움에 엘가는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렸다.
주위는 조용했다. 살아 숨쉬는 건 제오와 엘가 둘 뿐이었다. 누가 귀기울여 소리를 들을까, 소문이 새어나갈까 걱정할 필요 없는 곳이었다…. 그 점이 엘가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어른스럽고 많은 일을 겪었다 해도 이제 갓 스물이 된 사람이었다. 아직은 마음에 여린 구석이 한없이 많을 시기였다…. 사실은 말이죠… 엘가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당신과 만남이 필요했어요.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바보 같은 생각이라던가, 또는 당신의 바보 같은 생각을 같이 끌어안고 고민하면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었죠….”
젠은 그저 미소 지으며 엘가를 바라본다. 한없이 빛나던 바닥이 딱딱한 벽돌 길로 변하고 주위에 풀내음이 난다. 여전히 이질적인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막힌 입이 뚫린 것처럼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다시 피아노를 쳐야할지 고민이 된다거나, 피아니스트가 아닌 자신을 떠올려보았다던가…. 만약 그 때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도 궁금하다는 이야기. 그런 것들….
만약에, 정말로 혹시나, 진짜진짜 만약에…. 그런 말이 계속 붙었다. 변명처럼 계속 붙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엘가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웃는다. 이러니까 내가 정말 당신을 기다린 것 같네요…. 푸스스 웃음이 새나온다. 작게 소리내어 키득인다.
참, 우스운 일이죠. 날 그렇게 힘들게 하던 일들이 이렇게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바람이 불어온다. 둘은 어느샌가 바닷가에 가까운 절벽에 앉아 해넘이를 보고 있었다. 짭쪼름한 바다냄새가 섞인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힌다. 춥지 않아? 젠의 물음에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편하게 놓은 손 위로 제 손을 겹친다. 따스한 온기가 퍼진다. 충분히 따뜻해요.
목이 쉴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따뜻한 홍차를 한 잔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듯 목이 깨끗하게 낫는다. 이야기가 끝을 보이기 시작한 건 더이상 쥐어짜내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것 같은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는다. 엘가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깰 시간이구나….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에 선 둘은 손을 맞잡은 채 한참을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감정이 많았다. 괴로움, 그리움, 서글픔, 허탈함, 아쉬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엘가가 물었다. 제오 폴랑의 입이 잠시간의 침묵을 지키더니 호선을 그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안 할게. 엘가 아인테일즈는 그 말이 누가, 언제 했던 말인지 기억한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끝까지 사람 놀리기는…. 하도 웃은 탓에 말에 물기가 서려있었다.
젠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떠민다. 열린 문 앞에 선 엘가는 한 번 뒤를 돌아보곤 언젠가와 같이 눈을 접어 웃는다. 저는 또 꿈을 꾸겠죠. 하지만 그건 마냥 끔찍하기만 하진 않을 거에요…. 그런 기분이 드니까요.
문이 닫힌다. 제오 폴랑은 흔들어주던 손을 서서히 내린다. 엘가의 새로운 이야기가 써내려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돌아갈 때였다. 살아있는 생명은 언제고 수정되고 다시 쓰일 수 있는 커다란 책과 같다. 리베스퓌에게 글이 새로 써내려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주 찰나와 같으니 기다림이 외롭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루하지도 않을 테고.
폐허가 되어 곰팡내 나는 도서관에 쌓인 책더미 위에 앉은 제오 폴랑이 책 하나를 집어든다. 다음에 만났을 땐 어디에서 만나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생각보다 즐겁다는 걸 이제 제오 폴랑은 알고 있다. 함께 갈 친구가 있고,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볼 존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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