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주현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네 남자를 바라봤다. ……한 명은 남자보단 남자애였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이 아이들이 제 앞에서 이러고 있느냐가 중요했지.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이제는 눈을 찌를 만큼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잠깐의 틈을 비집고 침투하는 머리 언제 잘라야 하지,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치워버리며.
“그래, 이미 새벽에 출발했어야 할 너희가 왜 내 앞에 있는지부터 설명해주련?”
“작별 인사하려고요!”
“……그러니? 근데 아가, 우리 작별 인사 어젯밤에 했단다. 혹시 나만 기억하니?”
“아니요?”
“그렇구나…….”
순수하게 자라 거짓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를 뜨뜻미지근하게 쳐다본 주현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열다섯 살 소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한 평균 나이 약 서른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야 순수하게 자랐지만 지금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간 이후라 그렇게 순수하지도 않을 텐데……. 이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선 뭐라도 태워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소파 옆에 있는 탁자를 더듬었다. 담뱃대가 손에 걸리자 주현은 약초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라이터가 필요 없는 점은 참 편한데.
“주현,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담배는 안 돼요, 주현님!”
“주현님… 담배 말고 다른 걸 하세요.”
“다, 담배는 싫어요!”
약초를 담배라고 착각하는 아이들은 편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피우고 있는 건 몸에 하나도 해롭지 않고 이롭기만 한 약초란다, 얘들아.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엘 너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니? 주현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자신 앞에 앉은 네 명의 면면을 훑었다. 곱게 자란 놈 셋, 아직 크고 있는 애 하나. 근데 왜 행동은 다 애 같은지. 나한테야 애지만 밖에 나가면 한창때인 어른인데……. 한숨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을 길게 내쉰 주현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너희들이 가져가라. 네 쌍의 눈동자와 고개가 같이 움직였다.
주현이 소파에서 일어나 가져온 것은 작은 상자였다. 소나무로 만들어져 송진이 묻어나고 솔향이 나는 상자. 장식이라고는 상자 위에 금색으로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다였다. 그러나 그 문양이 공개되었을 때 가져오게 되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상자를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현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무의식적으로 다시 입에 가져갔다. 당연하게도, 앞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다시 담배의 해로운 점을 강조했다. 주현은 담뱃대를 아예 손에서 놓아 버렸다. 아니, 던져 버렸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맥없이 추락한 담뱃대는 소파 위에 그을음과 재를 남겼다. 물론 물건의 주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을음은 없애 버리고 재는 다시 털어 버리면 되는 일이다.
“아가.”
“네?”
“네.”
두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제풀에 놀라 주현을 바라봤다가 서로를 바라봤다. 주현은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따스한 감정이 그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트린 담뱃대를 다시 주워 상자에 딱딱, 두드렸다. 그는 손에 들린 담뱃대가 지휘봉 같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금방 지워 버렸지만.
“내가 아가라고 한다면 그건 미하엘이란다, 한. 너는 아가라고 불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잖니. 물론 미하엘도 스물을 넘기면 더 이상 아가라고 부르지 않을 거고. 그래도 오 년은 남았구나. 아가, 형들 말 잘 들어야 한다. 나 없다고 반항하지 말고. 알겠니? 사실 여기서 네가 제일 걱정이구나. 마음 같아선 아카데미 가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니 원. 그리고 이 상자는 너희들이 가지고 가 주렴. 원래는 내가 가지고 가려 했지만, 너희가 새벽에 출발하지 않았으니 떠넘기마. 아카데미 안에 있는 신전에만 전달해주렴. 어느 신을 모시는지는 상관없단다. 아, 그리고 상자 안을 열어보면 절대 안 된단다. 세계의 탄생 신화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니니. 세계수로 만들어진 상자라 너희가 그리 쉽게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나는 사건을 일으켜 왔으니 혹시 모를 일이지.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너희와 같이 가지 않는단다.”
한 문단에 걸친 설명을 끝낸 주현은 지친 얼굴로 담뱃대의 약초 넣는 부분을 입술에 대었다 떼는 것을 반복했다. 갈색 머리의 남자, 빈이 수업받는 아카데미 학생처럼 팔을 머리께까지만 들고 입을 열었다.
“주현, 왜 같이 안 간다는 거예요?”
“그야 귀찮기 때문이지. 이 대인원을 데리고 아카데미를 텔레포트로 가기엔 마력이 너무 많이 들고. 그리고 너희들이 내 도움이 없으면 금방 조난해서 목숨을 잃을 나이니? 어린 미하엘은 그럴 수 있지만, 너희가 있으니 그러지 않겠지. 만일 그 나이 먹고도 내 도움이 없다고 길에서 조난한다면 내 제자가 아니겠구나. 그러니 당연히 도움을 주지 않을 거란다. 또 궁금한 거 있니?”
주현은 담뱃대의 약초 넣는 부분을 힐끗 바라보고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연기가 올라오며 향긋한 약초 냄새가 거실을 조용히 잠식해 갔다. 분홍색 머리의 남자, 시리엘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담뱃대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응시했다.
“엘. 계속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태우고 있는 건 담뱃잎이 아니라 약초란다. 담뱃잎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것은 인정한다만, 들이마셨을 때 매캐하지 않고 오히려 향긋하다는 것을 못 느꼈니? 아카데미에서 약초학 수석은 어떻게 차지한 거니? 부정 시험을 의심해 보아도 좋을까?”
주현은 이마를 꾹꾹 눌렀다. 계속 뭉그적거리는 아이들 덕에 내일은 목이 쉬어도 제대로 쉴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살짝씩 음 이탈이 날 것 같은 걸 티 나지 않게 말을 끊어 말하며 숨기고 있었다. 후우…….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주현은 담뱃대로 상자를 아이들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소파에 등을 기대며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같이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는 않은 건지 아이들은 주현의 행동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상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일어나 짐을 챙겼다. 작별하고 싶지 않아 뭉그적거렸으나 주현이 인제 그만 가라고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으니 가야만 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이별하고 싶지 않아 한다더니, 주현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약간은 서운했다.
“잘 다녀오렴, 아가들. 기다리고 있으마.”
금방 녹아내렸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서운한 표정을 지우고 밝게 웃으며 저마다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 아이까지 문을 나서자 집은 금방 고요해졌다. 주현은 담뱃대의 연기를 들이마시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번 아이까지 아카데미에서 무사히 졸업한다면 드디어 육아에서의 해방이었다. 그게 그를 들뜨게 했다. 육아에서 해방된다면 뭘 할지 미리부터 고민해놓는 게 좋으려나. 역시 여행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주현은 부엌으로 가 머그잔에 남은 커피 가루를 털어 넣고 물을 부어 천천히 저었다. 아이들이 없는 것만 뺀다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한 아침이었다.
느리게 이어갑니다. 장르는 판타지고, 비엘인지 헤테로인지 지엘인지는 모르겠으나 염두에 두고 봐주세요. 아직은 NCP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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