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äumerei
Donne-moi un baiser, pas de l'amour
자캐 글 합작 덕질의 민족에 투고한 글입니다. 공포 18649.
삽화 및 퇴고 도움 서지컬 스틸
컬러 삽화 근채 @ponponsonson
인물 소개
상드린 드파르롱 몽마르트의 유명 카바레 La pieta의 주인이자 드랙퀸. 거리를 떠돌던 시절 파티광인 마담 드베즈 부인과의 인연으로 프랑스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불량한 행실과 도산으로 청년 시절 방황하게 된 상드린은 우연히 드베즈 부인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여장을 하게되고 영국 비밀 클럽인 디오게네스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리넷 헬렌 핀치 인도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 광산 독점 채굴권을 가진 랭커스터 백작의 외동딸이자 작위를 두 개나 가진 핀치 백작가의 부인. 상냥하고 그림으로
그린듯한 귀부인이나 디오게네스 클럽 안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으로 쾌락을 탐하는 말괄량이다. 위험이 앞에 도사려도 여흥거리로 생각하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슬하에 3명의 성인이 된 자식이 있으며 그 중에 상드린의 피를 가진 아이가 있다는 것은 리넷과 상드린만 아는 비밀이다.
소개글
파리 몽마르트를 주름잡던 드랙퀸 상드린이 은퇴 선언을 한다. 자신의 사랑했던 이들을 뒤로 하고 남부 프로방스에서 전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망령에 휩싸이곤 한다. 한편 상드린의 친구인 리넷은 그의 안부를 듣고 찾아가고자 마음 먹게 되는데…….
광장의 호를 따라 이어진 보도블록이 햇빛에 익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차양이 드리운 카페 그늘에 앉아 분수를 바라보았다. 20여 년 전, 이곳에 앉아 보았을 때처럼 오늘날의 광경 또한 풍경은 오늘날에도 눈부실까? 노쇠해진 그의 눈은 분수에서 물보라가 튀는 광경을 담을 수 없고, 먹어버린 귀는 물결에 파묻힌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때와 같은 자리에 앉아 햇볕을 쬐고 분수에서부터 불어오는 물 내음 머금은 산들바람을 맞으면 젊은 날의 풍경이 눈앞에 그리듯이 나타났다.
“눈부신 날이구나.”
깊게 주름진 눈매를 휘며 마담 드파르롱은 미소 지었다. 짙은 초록빛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노인은 올해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뼈대가 큼직했다. 노인은 일어서면 남들보다 머리 하나 반은 넘게 키가 컸는데,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정말 정정한 노파라고 감탄할 테다. 하지만 남부 프랑스의 작은 이 도시에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작년 여름. 파리의 부르주아가 소유하던 포도밭 별장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주인이 이사 왔다. 이사 셋째 날까지는 그가 입고 있던 최신 유행의 퍼프 드레스나 커다란 백로 박제로 장식한 비단 모자 등이 화제였지만 일주일 채 지나지 않아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높이 그린 눈썹과 새된 가성. 몇몇 눈치 없는 사람 빼곤 첫 만남에 그가 여자가 아님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물론 마담 드파르롱은 늘 그렇듯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작은 마을의 소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이 세상 어디를 가던 호사가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꿈꾸던 곳에 돌아가고 싶었다. 2년 동안 생 레미에서 느꼈던 나무 그늘 사이를 비추는 햇빛, 혹은 까만 물결 위에 빛나는 달빛을 다시 누린다면 그것만큼 기쁜 것은 없을 것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를 떠나기 일 년 전부터 그는 뒤풀이에서 술에 취하면 곧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생 레미에서 마지막을 맞을 거야. 피에타의 뮤즈 드파르롱은 내가 파리를 떠나는 순간 죽는 거지. 내가 선 하나 긋지 못할 정도로 꼼짝도 못 하게 되기 전에 너희는 사랑하는 뮤즈의 죽음을 애도하며 꽃다발을 바치도록 하렴. 그럼 난 세 시간에 한 번씩 꽃을 바꿔가며 그것을 감상할 테고. 꽃다발 세례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끊기게 된다 해도 그만큼의 영광은 더 없겠지. 죽어서 받는 국화보다 살아서 즐기는 수레 가득한 부케가 더 아름다울 게 뻔하잖니.”
대부분은 웃어넘겼지만 개중에는 이런 질문을 심각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드파르롱을 끔찍이 아끼던 몇몇 팬-혹은 애인들은 앞다투어 그의 마지막 보금자리를 마련하려 했다. 바호 호수 근처의 아담한 저택에서부터 시가지 중심의 고급 저택까지. 그들은 드파르롱 생애의 마지막 연인이 되고 싶어하였고 열렬히 사랑을 고백했다.
허나,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이미 겪은 마담은 제 추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다. 병상에 누워 똥오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노인을 역겹지 않아 하는 인간은 얼마 없다. 하물며 무대 위에서 제가 반짝이는 시절을 사랑하는 이라면 얼마나 더 괴로울까. 뮤즈를 잃는 팬의 심정보다 팬을 잃는 뮤즈가 더 초라한 법이다. 마담은 지인의 중개로 와이너리에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기억에 침식된 이가 곧잘 깨닫듯 추억은 시간을 되돌리진 못했다. 시골 마을은 파리에 비해 형편없이 따분하였고, 맑은 경치를 누린다 하여 젊은 날처럼 영감이 샘솟는 것도 아니었다. 한 때 몽마르트를 주름잡고 여성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뮤즈는 이 시골에선 괴상한 옷차림의 노파일 뿐이었다. 때로는 개구쟁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마담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가 지난 한 세대동안 그랬듯.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때면 남자는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연지를 바른 후에야 거울 앞에 섰다. 이것은 몇십 년간 지켜온 그만의 의식이었다. 생 레미에 온 후 가장 큰 변화라면 남자가 이를 지키지 않는 날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체로 잠들어도 감기에 들지 않을 유월의 밤. 남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곧바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은 낯설고도 익숙한 노인. 이마에 주름이 파이고 처진 볼살의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살피다 텅 빈 방을 보았다.
창문이 닫힌 방은 소리도 없이 공허하였다.
자신의 남은 날은 이보다 더욱 외로운 날들만 남았으리라.
엄습하는 공포에 남자는 표정이 굳어 거울에서 물러나 하녀 방의 종과 연결된 줄을 당겼다.
“투생!!”
신경질적인 고함이 온 건물에 울려 퍼졌다. 막내 메이드가 헤드 드레스도 흘리고 방 안에 뛰어들 때까지 남자는 몇 번이고 종을 쳤다.
“부르셨나요 마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보름 밤에는 꼭 커튼을 쳐두라고 했잖니?”
“하, 하지만 오늘 저녁엔 보름달을 보는 게 좋으니 놔두라고...”
“투생.”
신입 메이드가 경을 치기 전에 하녀장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다시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담, 잠이 달아난 것 같으신데 포도주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지금 술이...”
“얼마 전에 마담 트루와가 보내주신 와인이 낮에 도착했더군요. 마담이 좋아하던 걸 기억하신 모양이에요.”
추억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르게 한다. 하물며 감수성 많은 사람은 작은 키워드 하나에도 심상에 잠기기 마련이었다. 그가 여장하기 전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만큼 하녀장은 예민한 주인의 성미를 다루는데 도가 텄다. 남자는 하녀장이 자신의 말을 끊었다는 것도 잊은 체 기억을 떠올리다 손을 내저었다.
“상 준비는 천천히 해. 그보다 찔레 장미가 보고 싶어.”
“알겠습니다.”
하녀장이 신입 메이드를 흘겨보자 하녀는 서둘러 나이트가운을 챙겨 그를 덮어줬다. 야밤 중의 산책이건만 남자는 인두로 머리를 지지고 사향 기름을 바른 뒤 화장을 하는 것까지 빼먹지 않았다. 분침이 한 바퀴 돌아 이제 몇 시간 뒤면 동이 틀 터지만, 아직 드파르롱을 잘 모르는 하녀도 마담이 자신을 꾸미는 것이나 ‘여자 행세’를 할 때의 즐거움을 거슬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만히 문 앞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투생, 베란다 문을 열어주겠니?”
하녀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유리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조금은 서늘한, 그러나 차갑지는 않은 새벽 공기에 짙은 풀향기가 섞어 들어왔다. 남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이내 미소지었다.
“밤 정원을 거닐기 딱 좋은 날씨야. 맞은 편에 장미 나무를 심어놓긴 잘했어.”
투생은 그 말을 따라 코로 깊이 숨을 들이 마시었다.
드레스업을 마치고 마담은 기분이 좋은지 하녀장에게 오늘 조식은 먹지 않을 예정이니 부엌에 말을 전해달라는 지시를 내리고 정원으로 내려갔다. 덕분에 마담의 시중은 투생이 맡아야 했다. 마담은 드레스 끝자락이 이슬에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지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 깊은 곳까지 거닐다 흐뭇하게 피어난 찔레꽃을 마주하곤 어떤 추억이 떠올랐는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담은 왜 찔레꽃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흰 레이스를 겹쳐 폼폼을 만들 것 같은 그 모양새가 아름다워서, 혹은 누군가와의 추억이 떠올라서, 아니면 파리에서 했다는 쇼를 떠올린 것일까? 시계를 가져오진 않았지만, 보름달이 서쪽으로 기울여가는 것을 보니 새벽 3시는 진작 넘었으리라. 메이드의 하루는 4시 반부터 시작하니 오늘은 거의 자지 못한 셈이다. 어떡하면 낮 동안 다른 시종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가 투생의 이름을 불렀다.
“자니?”
“아, 아니요!”
“몇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더구나.”
또 역정을 들을까 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때, 그는 투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신사가 숙녀에게 에스코트의 허락을 구하는 모습에 하녀는 당황해 손만 빤히 쳐다보았다.
“이리 와 내 팔에 기대어 정원을 걸어주지 않겠니?”
“…….”
“그저 소꿉장난하고 싶은 것뿐이란다.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놀이 말이지. 걱정 마 렴. 희롱할 뜻은 없으니.”
투생은 한참이나 손을 바라보다 마주 잡았다. 노인의 피부는 제가 상상한 것보다 얇고 건조했으며, 가는 뼈에 비해 굳은살이 많았다. 옆에 붙자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향수 냄새가 났다. 들꽃, 혹은 정원의 꽃 중에서 맡아보지 못한 이국적인 향기. 마담은 먼저 걸으라는 듯 손을 펼쳐보았고 투생이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그는 익숙한 듯 그와 보폭을 맞추었다.
소녀는 눈을 들어 제 옆의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중을 맡은 지 1년 채 되지 못하였지만, 그의 소문은 하인들의 입을 통해 엿들은 적이 있다. 만인의 연인, 무대 위의 다이아몬드, 그리고 퇴물 예술가. 마지막 단어를 떠올린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쳐 소녀는 자신의 마음이 읽힌 것 같아 식은땀이 났다.
마담은 소녀와 발을 맞추며 정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설계했다는 이 정원은 저택의 부지의 10배가 넘는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택의 북쪽에는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동쪽 늪지에는 연꽃과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정자가 있었고 서쪽 뜰에는 수국과 동백나무 그리고 벚나무가, 남쪽 정원에는 장미와 분수가 있었다. 마담은 하녀를 데리고 정원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꽃에 얽힌 신화나 일화 등을 이야기하였다. 개중에는 하녀가 잘 알고 있는 설화부터 머나먼 동양의 전설도 있었다. 장미 화원에서부터 시작해 동쪽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니 어느새 주위가 밝았다. 하녀는 동녘을 바라보는 주인의 미소가 어쩐지 서글프다 느꼈다.
하녀가 감히 물었다.
“마담은 외로우신가요?”
그 물음에 주인은 저택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빛과 푸른 하늘빛에 비친 흰색의 벽은 하늘빛을 담은 주황으로 오묘하게 빛났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지.”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초대하면 되지 않나요?”
하녀는 자기가 이곳에서 일하게 된 이래로 파티는커녕 노인이 친구 한명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간혹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긴 했으나 변호사나 인편으로 물건을 배달하러 온 사람뿐이었다.
하녀의 의문에도 노인은 답할 생각이 없는지 손을 풀고 천천히 앞서 나갔다.
그리움을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잘 안다. 하지만 혼자만 품고 있어야 더 빛날 추억이 있음을 알기에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이 정원을 당신에게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목소리는 정원의 잎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산들바람 속에서 사라졌다.
지독한 시가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 깔린 용연향. 딸의 샤프론 자격으로 클럽에 참가한 리넷은 코르셋을 푼 상태로 나른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세기의 귀부인인 핀치 백작 부인이 여럿 신사·숙녀 앞에서 이런 망측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겠지만, 모두 자연스러운 모습의 그녀를 사랑하고 탐했다. 그녀의 딸 또한 어딘가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으리라 의심하지 않은 여인은 쿠션에 기대어 쉬기로 마음먹었으나 곁의 사람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담 드파르롱은 참으로 모습을 감춰버릴 생각인 것 같더군요.”
“트루와 부인의 말로는 선물은 받아도 편지의 답장이나 인사치레는 다 하인들을 시킨다는 모양이에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나 뭐라나.”
“어머.”
키스 백작 부인은 실소를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클럽에 있을 때부터 그를 특이한 웃음거리-혹은 광대쯤으로 생각하던 이였다. 본인이 있을 때는 부채 너머로 경멸의 시선을 겨우 감추는 정도였으나 이제 당사자도 없겠다 그녀는 맘껏 입을 놀리기로 하였다.
“예술가란 족속들은 종종 감상에 빠져 분수를 잊곤 하나 보네요.”
“선물을 받았으면 답을 해주는 게 도리일 터만.”
몇몇은 리넷 쪽을 힐끔 넘보며 눈치를 살폈다. 마담 드파르롱과 리넷 헬렌 핀치가 절친한 파트너, 아니 어쩜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키스 백작 부인의 대화가 리넷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카우치에 엎어진 리넷은 살갗으로 벨벳 결을 느끼며 얌전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은 그런 드파르롱의 태도에 질린 모양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종종 시종에게 모습을 지켜보라고 시키기도 하고요.”
“딱하기도 하여라.”
“그의 추종자들만 불쌍할 뿐이군요.”
“그래서 어떻다고 하던가요?”
리넷이 대화에 낀 것은 그때였다. 여전히 코르셋은 추스를 생각은 없는지, 어느 신사가 덮어준 은여우 색의 코트를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코트를 끌어당기자 늘씬한 발목과 발등의 맵시가 드러났다.
“여전하다던가요?”
좌중은 생글대며 웃는 리넷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처음 클럽에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숨 쉬는 방법을 잊게 만드는 마성을 지녔다. 물론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미소지을 때마다 왜 자신이 그녀를 미워했는지, 혹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곤 하였다. 말을 꺼낸 부인은 탄식을 흘리곤 겨우 그의 마력에서 벗어나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도 주워들은 거라 실제로 어떤지는…….”
“어머나, 그럼 상드린을 만나러 간 이는 모르시는 건가요?”
나긋나긋한 말투였으나 상대는 대영 제국의 대부호이자 백작 부인 지위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들은 역시 리넷 앞에서 드파르롱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수지 않았냐며 식은땀을 흘렸다. 리넷은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띤 이였으나 결코 좌시할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파리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라... 저는 잘...”
“그렇군요. 아쉬워라. 오랜만에 안부라도 묻고 싶었는데.”
리넷 본인이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좌중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차를 마시던 키스 부인이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다리를 놓아드릴 수 있습니다만.”
“친절하셔라. 하지만 괜찮아요. 그게 디오게네스의 규칙이잖아요. '클럽에서 일어난 일은 클럽 밖에서 입 밖에 내지 말 것,' 그렇죠? ”
흥미로운 볼거리라도 백작 부인이 수고를 들일 일은 아니잖아요? 리넷은 그리 덧붙이는 것 대신 웃어보이고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상상력이 얄팍한 이들과 그의 전원생활을 논하는 것도 지루할 것이다. 충분히 쉬었으니 남은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 더 현명하겠지. 그는 나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리넷이 일어나자 기회를 엿보던 금발의 청년이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며 그녀를 붙들었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피로하던 참이었는데.”
리넷은 그의 가슴팍에 안기며 새근히 숨을 내쉬었다. 코르셋이 없으면 무너질 몸이라지만 다시 매무새를 가담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신발 끈이 풀리면 하녀가 다가와 신발 끈을 매주고 걷다가 비가 내리면 풋맨이 대신 우산을 펴주는 삶에 익숙한 귀부인은 이번에도 신사들이 앞다퉈 그녀를 방까지 바래다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셔츠 너머에서 느껴지는 청년의 체취를 들이쉬는 숙녀는 몰락도 부끄러움도 영영 모를 것이다.
“아까의 이야기입니다만. 마담 드파르롱의 소식이 신경 쓰이나요, 핀치 부인?”
“그는 제 아끼는 친구인걸요.”
리넷은 애틋하게 서로를 탐하다가 마차에 오르던 시절을 떠올렸다. 안녕의 인사, 반가움의 비쥬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을까. 한번은 리넷이 상드린에게, 한번은 상드린이 그녀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했을 때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제안을 하나 드리죠. 제가 그의 안부를 알아올테니 오늘 밤은 핀치 부인을 독점할 수 있을까요?”
청년은 수줍게, 그러나 열망을 담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리넷은 모든 것이 즐거워 웃음을 터트렸다.
음탕함을 숨기고 순수함을 연기하는 설익은 청년의 미련함이며, 그 귀엽기만 한 조건을 내걸면 자신이 넘어갈 것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음까지. 그러나 여자는 딱한 이를 골리기보단 귀여워하는 것을 즐기는 성미였기에 손을 뻗어 청년의 귀밑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런 제안은 필요 없답니다. 그저, 제게 입을 맞춰주기만 하면 되어요.”
“아아, 핀치 부인...”
"리넷이라고 불러주겠어요?”
“…리넷…….”
둥글게 혀를 굴렸다가 혀끝으로 입천장을 문지르는 발음. 청년은 수줍은 듯이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애완견에게 상을 주듯 굽실거리는 금발을 넘기다 둥근 귓바퀴를 쓸으니 청년은 제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 모습조차 딱하고 어여뻐 리넷은 즐거이 입꼬리를 올렸다.
귀부인은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기가 숨을 쉬는 방법을 알듯이 리넷은 부와 지위를 누릴 줄 아는 이였다. 향기로운 꽃이 아무 의도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벌과 나비를 모으는 것처럼 ‘타고났다는’ 말 그대로 타인의 호의를 불러일으키는 영혼은 원하는 것을 참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그녀가 절로 옛친구의 행방을 알게 되는 모두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상드린 드파르롱은 파리에 있는 사업과 재산을 처분하고 지금은 남부 시골의 와인 농장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그를 마주쳤다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무대에 서도 될 만큼 건장하다고 하더군요. 대부분의 시간은 저택 안에서 나오지 않지만 장이 열릴 때마다 하녀들과 꽃이나 의상 부자재를 사러 시내에 나온답니다. 여기 그가 자주 가는 가게나 카페의 주소에요.”
청년을 옷을 걸치며 주소가 적힌 쪽지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아무리 호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들 리넷은 순진하지 않았다. 제게 가져와달라는 듯 손을 뻗자 청년은 아직 침대에 누워있는 리넷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잘 알고 계시는군요. 견문이 밝은 친구가 있으신 가 봐요.”
그리 묻자 청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드러났다. 리넷은 그의 안색을 살피다 싱긋 웃으며 청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나. 제가 곤란하게 해 드렸군요.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믿을만한 정보니 의심치 않아도 됩니다, 부인. 그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한명에게 들었다고만 해두죠.”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손가락을 움츠러트리며 빼냈다. 황급히 등을 돌리는 어리숙한 사내로부터 수상함을 눈치챘으나 리넷은 태연하게 베개에 몸을 기대었다. 거울을 보며 재킷을 걸치던 청년이 거울에 비친 리넷에게 물었다.
“만나러 갈 건가요?”
“글쎄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친밀하던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시골에를요?”
“견문으론 어떨까요? 그 지역에는 매년 초여름에 마을 전역의 양 떼들이 산으로 향하는 기나긴 행렬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머나.”
“다녀온 사람의 말로는 구름의 폭포가 산을 향해 올라가는 광경 같다고 하더군요.”
수십 년동안 사교계에 발을 담근 경험과 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분명한 함정이었다.
일면식 없는 반반한 청년이 들고 온 주소가 적힌 쪽지. 굳이 꺼낼 이유가 없던 상드린에 대한 화제, 유난히 자신의 태도를 떠보는 듯한 백작 부인의 시선까지. 청년이 어리숙하게 바람을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의혹은 심증으로 굳어져만 갔다.
그러나 함정이면 어떠한가. 단순히 상드린과 만나 인사하는 장면을 잡아낸다 해도 그것이 크게 제 명예를 깎아내릴 일인가? 만일 그럴 방법이 있다해도 리넷의 입장에선 한갓 여흥 이상의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빼앗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지닌 숙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남자의 옷을 입는 모습을 감상했다.
청년이 방으로 나가려 하자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와 마주쳤다. 중년의 남자는 청년이 리넷의 방에서 나오는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팔을 벌리며 리넷을 맞았다.
“못 본 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군, 우리 어머님은. 잘 지냈어?”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을뿐더러 리넷보다 연상인 남자는 단둘이 있으면 리넷을 그리 불렀다. 문이 닫히자 남자는 제 어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리넷을 끌어안았다. 달려드는 남자를 밀어내지도 않고 리넷 또한 익숙히 가벼운 금발을 넘기며 타이르듯 속삭였다.
“엄마 품이 많이도 그리웠나 보구나. 불쌍하기도 하지. 동생은 어디 있니?”
앨런은 ‘동생’─정확히는 그녀의 딸─과 함께 있었을 테다. 같이 방에 돌아오지 않아 리넷이 묻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심기를 거슬렀는지 도중에 그만하자 하더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저런. 동생을 소중히 다루어 주어야지, 앨런. ”
“그 애가 어머님의 배 속에서 자랐을 때를 생각했더니 질투가 나서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는 내 손바닥만 했을 텐데 언제 저런 까탈스러운 숙녀가 되어선.”
이제 막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소녀에게 새치가 군데군데 섞이기 시작한 중년의 손길은 어쩌면 불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취향에 안 맞다니 서운하구나. 리넷은 앨런이 자기 딸에 손을 댄 것에 분노는커녕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자신이 제 자식 중 누구를 품었을 때 그와 몸을 섞었는지조차 기억해낼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모성에 환장한 것을 감추려고조차 하지 않는 남자는 금세 손을 리넷의 배에 올렸다. 리넷은 그 손길에 역정은 커녕 뭉근히 살결을 어루만지는 감촉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많이 서운했겠구나. 그래도 귀엽게 보아 주렴. 너는 그 아이를 기억해도 그 애는 널 처음 만나는 자리잖니. 더군다나 그 아이는 타고나길 더욱 섬세하니 말이지.”
“그 나이대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보단 다른 이를 더 닮은 걸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듣고 앨런은 처음 그의 딸, 루이즈 알렉산드라 핀치를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칠흑 같은 흑발 고수 단발머리와 하얗기보단 창백한 피부. 보통 여인들보다 한 뼘은 더 큰 키, 또렷한 눈썹과 무심히 다물어진 얇은 입술. 날렵한 턱선. 리넷의 피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듯한 외모에 그녀와 유일하게 닮은 것은 희미한 금색을 품은 눈동자뿐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낯이 익어 파티에서 가끔 얼굴을 들이미는 핀치 백작의 얼굴을 떠올려봤지만 고리타분함과는 다른 분위기였기에 의문이 계속 남았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떠올린 의문을 금세 잊고 리넷을 탐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른 목을 축이듯이 그에겐 어머니의 손길이 더 급했으므로.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던가. 함정이라는 것이 분명해도 리넷은 휴양하며 친척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남부 프랑스로 떠났다. 런던의 날씨와 다른 맑은 하늘, 그 아래서 이제 막 돋아난 새싹들이 푸르게 빛났다. 마차 창문으로 밖을 들여다보던 중 이번 여행의 동반자인 딸이 리넷에게 물었다.
“계속 초록색만 보는 거 질리지 않아?”
신사복을 입은 숙녀는 어머니의 여행에 끌려온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아 보였다. 리넷이 싱긋 웃기만 하자 루이즈는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소녀 시절, 세기의 신붓감이라는 말이 나돌았던 리넷과 달리, 그의 딸은 못 말리는 말괄량이라고 불렸다. 블루머가 드러나는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루이즈를 보고 사람들은 핀치 가의 돌연변이가 아니냐는 말을 뒤에서 수군거릴 정도였다. 여행 도중 블루머를 입고 다닐 구실인 자전거가 사라지자 루이즈는 파니에를 입을 바에야 남장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사랑하는 딸이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장도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여겼는지 리넷은 흔쾌히 허락했다.
“대신 신사 차림을 한 만큼 이 어미를 에스코트해야 한단다.”
루이즈는 남들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으므로 리넷 옆에 선 그가 딸이라는 것을 알아본 이가 없었다. 리넷은 오해한 사람들에게 사실을 일러주기는커녕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를 제 아들이라며 소개했다. 대책 없는 어미의 발언에 루이즈는 처음엔 난감해했지만 남장하게 된 경위를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보단 남자인 척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였는지 그 장난에 맞춰주었다.
그렇게 프랑스에 도착한 지 벌써 나흘째. 이동하는 내내 자는 것도 지쳤는지 루이즈는 창틀에 턱을 괴고 제 어미를 바라보았다.
“왜 나까지 끌고 온 거야.”
“네게도 보여주고 싶었단다.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리넷이 마차의 창을 열자 따뜻한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사촌을 만나러 몇 번 다니던 길이었지만 지금처럼 들떴던 적은 없었다.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 보이는 어미의 모습에 루이즈는 불평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축제 전날의 마을은 왁자지껄했다. 목수들은 단상 설치와 깃발 장식을 지붕과 지붕 꼭대기에 연결하느라 바빴고 아낙네들은 축제 날 먹을 요리 준비를, 소녀들은 춤출 때 입을 드레스를 만들고 화환을 엮으며 즐거워했다.
양몰이 축제라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축제인가. 위대한 누군가를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 높은 철학이 담긴 것도 아니다. 노동과 유리된 귀부인은 그것을 그저 소박하고 천진한 전원의 아름다움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 리넷은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긴 여정 중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들린 생 레미에서의 일정은 고작 두 시간 여 남짓. 기대하는 사람과 마주치기엔 짧은 시간이었으나 리넷은 그 이상 머물진 않기로 했다. 애초에 자신과 상드린의 작별은 클럽에서 이미 나누지 아니하였던가.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아도 눈물 섞인 작별 대신 축복이 담긴 입맞춤을 나누는 게 그이고, 자신이었다. 마주치지 못한다고 아쉬울 것이 있나. 이것은 말하자면 여흥이었다. 리넷에게 이것은 막이 내린 무대의 커튼을 들춰 운을 시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배우와 눈이 마주친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글세. 그러겠다고 끝난 무대에 앉아 고집부리는 것만큼 조야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모르는 루이즈는 하얀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돌담에 피어난 찔레 장미를 감상하는 리넷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어쩜 이리 태평하고 무구한 여자한테서 자신 같은 애가 태어난 걸까. 제 나이보다 배나 많은 나이를 가졌건만 둥그런 얼굴선 덕분에 제 나이보다 스무살은 어려 보이는 외모, 굽실 이는 얇은 금발도, 살냄새와 은은하게 섞여 풍기는 사향 냄새가 햇빛을 받아 감미로운 것이 그를 수식하는 단어인 ‘천사’에 모자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천사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여유 있게 자라 서두를 줄 모르는 숙녀의 마음가짐이란……. 신사들이 하는 일이란 무조건 따라 해보고 승마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은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해가 지기 전에 아비뇽에 도착해야 오늘 밤 푹신한 침구에서 잘 텐데. 왜 이런 시골 동네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누군가 뒤를 밟고 있다.
루이즈는 따라붙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예고 없이 뒤를 돌아보니 남자 두 명이 고개를 돌렸다. 혼자라면 둘에게 달려들어 무슨 짓이냐고 따졌겠지만 미행을 눈치챘는지도 모를 태평한 리넷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늘 코르셋을 조여맨 몸은 자신이 받쳐주지 않으면 금세 무너지고 말테니까. 어떻게 나서야 할지 고민하던 중 리넷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산디? 계속 뒤를 신경 쓰는구나.”
“누군가 우리를 뒤따라오는 것 같아서.”
“어머. 하지만 걱정하지 마려무나. 이런 대낮에 감히 우리를 덮치려 할까.”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때야? 당하고 나선 모른다고.”
루이즈가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뒤 따라오는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이자 리넷은 방긋 웃었다.
“여기서 빼앗기게 되더라도 고작 몇 푼이란다. 쥐어주고 보내면 그만이야.”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리넷은 오히려 들떴다. 잘 준비된 함정에 미끼가 없을 리 없다. 자신의 추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서든 이 자리에 상드린을 불러다 놓았을 것이다. 단골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든,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포목점에서 예약해둔 부자재를 사고 있든. 이 작은 마을 어딘가에 상드린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리넷은 발걸음을 정했다.
“기억하렴 산디, 누군가가 네게 거짓말을 할 때에 진실은 그다지 의미가 없단다. 그 자의 의도를 들여다보는 것이 항상 더 중요하지."
리넷은 그리 말하곤 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루이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 못 말린다며 한숨을 쉬었다.
생 레미에서 시작해 알프스산맥까지 이어지는 양들의 대규모 이동은 며칠간 이루어진다. 그 말은 즉 마을의 도로는 양들로 꽉 막혀 사람이 마차나 수레가 오갈 수 없다는 의미다. 장장 일주일에서 길면 이 주 동안 이어지는 기간 동안 필요한 부자재가 없어 애꿎은 막내 하녀를 괴롭히는 주인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상드린의 하녀장은 몇 주 전부터 필요한 물품을 포목점에 예약해두었다. 상드린이 이 마을에 도착한 이래로 제 가게처럼 들락날락하며 귀한 부자재를 구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은데다 주인 마르탱에게 재단 노하우를 가르쳐준 덕분일까? 처음 상드린을 보고 괴짜라고 수군거리던 포목점 주인과 도제들은 어느새 그를 이 마을에 없어선 안될 위인이라며 떠받들게 되었다.
저택에도 제 아틀리에를 가진 상드린이었으나 여러 개의 재봉틀, 색색의 천과 레이스를 보면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애정이 어린 습관이었다. 드베즈 부인의 시동 시절부터 화려한 드레스와 아기자기한 자수들을 사랑했다는 그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하녀장 메이는 그의 감상이 끝나기 전까지 벽에 서 있었다.
“이야, 마담 덕분에 저희도 이런 천은 처음 봅니다. 모자이크 문양이 들어가 들어간 터키산 실크와 동양의 매듭단추라니. 조개껍데기의 안쪽을 벗겨 칠 장식을 낸 이 단추도 말입니다. 쇤네는 이런 작품이 이 세상에 있었는지도 몰랐지요. 이걸 가지고 또 어떤 드레스를 만들지 기대되는군요.”
“그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카바레 무대의 의상실을 보았다면 더 좋아했겠군요.”
“참으로 아쉽군요. 그나저나 당시의 무대 의상은 전부 경매로 부쳤다는 게 사실입니까?”
“백댄서의 옷은 전부 태우고 메인 뮤즈의 의상은 팬들을 상대로 한 경매에 부쳤지요. 혹시나 빼돌린 의상이 있을까 하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태운 의상은 전부 내 손으로 세어서 던져 넣었으니까.”
아아. 마르탱이 탄식하는 그 순간 가게 문이 맑은 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실례합니다. 혹시 모자를 맬 천을 볼 수 있을까요?”
좌중의 시선이 모두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게 쏠렸다. 타국의 억양이 섞여 있지 않은 유창한 프랑스어. 나비 날개처럼 얇은 천을 여러 겹 모아 셔링을 잡은 드레스와 흰 레이스 장갑. 새하얀 옷감 위에는 흙먼지 한점 얹혀있지 않았다. 그녀가 한 발자국 딛자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귀한 사람임을 눈치챘다. 가게의 주인인 마르탱은 서둘러 벨벳 의자의 먼지를 털곤 깨끗한 천을 깔았다. 숙녀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가다 문득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황으로 물든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자에 자리 잡은 리넷이 물었다.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군요.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아…….”
“호호, 저는 이미 계산을 다 끝내고 가게를 나서려던 참이었답니다.”
마르탱이 난처해하며 상드린을 바라보기 직전, 마치 가면을 쓰듯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파문에 일렁이던 호수가 갑자기 잔잔해지듯이 그의 시선이 고요해진 것을 하녀장은 놓치지 않았다. 들어온 손님과 상드린의 관계를 아는 하녀장 또한 건조하게 풋맨에게 조심해서 물건을 다룰 것을 일렀다. 상드린이 가게를 나서려 하자 리넷이 말을 걸었다.
“근사한 드레스네요.”
상드린은 그 한마디를 무시하지 못했다. 다시 시선이 마주하자 리넷이 빙긋 웃으며 들고 있던 모자를 보였다.
“여행 도중에 아끼던 끈이 끊어져 난처하던 참이었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같이 골라주실 수 있으실까요?”
“얼마든지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이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디오게네스 안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해 일절 함구하던 상드린을 잘 알기에 메이는 서글서글하고 조금 주책맞은 타인을 연기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애정 어린 연인인 마냥 비쥬를 하고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한 자 한 자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겠지. 허나 남자는 분수를 아는 자였기에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상드린은 리넷에게 레이스와 연하늘색 실크를 덧대며 어떤 색이 더 잘 어울리는지에 대해 연설을 했다.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기까지한 몸부림이었다.
“이게 누군가요? 핀치 백작 부인 아닌가요?”
“어머나.”
리넷이 상드린이 골라준 실크로 정할 무렵 가게에 또 다른 손님이 등장했다. 백작 부인이라는 말에 마르탱은 들고 있던 꽃 장식을 떨어뜨렸다.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일면식 없는 이가 자신을 알아보는 말을 건네는 무례를 그냥 넘길 정도로 핀치 백작부인의 지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무례를 지적하는 리넷의 말에도 웃어넘기며 말을 계속했다.
“저야 기억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죠. 파리의 파티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듯이 했으니까요. 생 비뉴 극장의 오너, 에디트라고 해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그러셨군요. 이렇게 맑은 날 다시 만나게 된다니 근사한 우연이군요.”
리넷은 사근사근하고 친근하게 미소 지었다. 대화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으레 그랬듯이.
세상엔 많고 많은 우연이 있다지만 이 시골에 리넷이 자신을 찾아오고, 자신과 리넷이 마주쳤을 때 리넷이 영국의 귀족 출신임을 아는 이가 마주할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될까. 우연의 일치는 불길하기만 했다. 상드린은 얇은 숄자락을 여매며 문 앞으로 나섰다.
“작은 가게에 사람들이 붐비다니. 볼 일을 다 본 손님은 나가는 게 좋겠군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저 때문에 급하게 가시는 건 아닌가 미안해지네요. 참, 여기 오는 길에 근사한 찔레 장미 덩굴을 보았답니다. 흰 벽 너머로 폭포처럼 흐르는 붉고 새하얀 꽃의 물결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시간이 난다면 들려보셔요. 분명 마담도 좋아할 것 같네요.”
상드린이 골라준 실크로 모자 리본을 매며 리넷이 말했다. 지나가는 듯한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밀회의 약속. 상드린은 자신을 흘겨보는 시선을 통해 에디트 또한 의미를 눈치챘음을 알아차렸다.
상드린은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찰랑이는 종소리가 나고 문이 완전히 닫힌 걸 확인한 뒤 그가 하녀장에게 말했다.
“메이, 짐을 부탁해. 난 잠시 주변을 둘러봐야겠어.”
이 근방에 흰 벽을 타고 난 찔레 장미 덩굴이 자란 곳은 플렁드흐 거리의 초록 지붕 저택밖에 없을 것이다. 마차에 짐을 실을 십여 분 간. 상드린은 마르탱의 아틀리에 뒤편에 있는 거리로 향했다.
5분 여간 골목 사이를 걸으니 리넷의 말대로 흰 벽돌담에 페인트를 들이 부은 듯 피어난 찔레 장미들이 보였다. 마치 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처럼 장미들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농후한 장미 향 아래로 깔린 사이프러스 나뭇잎의 은은한 향.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햇빛 그림자가 푸르게 빛이 났다.
상드린이 넋을 놓고 감탄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말했죠? 당신도 좋아할 거라고.”
산들바람에 나뭇잎이 사각이었다. 예의 모자 아래서 리넷의 옆머리가 흩날리는 것을 보곤 상드린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비천한 거리 출신에서 마담 드베즈의 관심을 끌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썩은 과일을 주워 먹고 배탈로 거리에서 죽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던 자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환호와 열망 속에서 살았는가. 그러나 막상 리넷을 마주하니 지금까지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던 욕심이 미련으로 남아 울렁거렸다.
“오랜만에요, 마술사님.”
리넷이 그의 뺨을 가볍게 끌어당겨 비쥬를 했다. 누군가가 둘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마저 잊고 오로지 그 감촉에 매달리고 싶어질 정도로 상냥한 손길이었다.
어째서 여기 있는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인지. 이곳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묻고 싶은 것투성이였지만 상드린은 자기 뺨에 닿은 하얀 손을 소중히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보다니 꿈만 같아.”
황홀하게 접은 눈꼬리와 그가 활짝 웃을 때만 드러나는 보조개를 보며 리넷은 장난스러운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어쩌면 여기가 아테네 숲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꼭 꿈을 꾸는 것 같거든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재회의 기쁨만큼 이제는 정말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실감이 밀물처럼 밀어와 둘을 덮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운명의 파도에 허우적거리기보단 손을 마주 잡고 잠기기를 택했다. 둘만이 공유하던 보물들이 바다 저편에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며. 그러기에 리넷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한결같았고 상드린은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허나, 남자는 새벽마다 그를 찾아오는 사신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 세상 모두가 그를 잊는 꿈을. 초라해진 몸뚱이 속에 갇혀 주저앉아 숨이 멎기만을 바랄 날을. 끝내 자신이 눈을 감는 순간에는 그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애정과 비탄 속에서 자라난 망령은 여전히 그를 마술사라 불러주는 이의 손을 영영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 마디의 외침이 두 사람의 단잠을 깨트렸다.
“헬렌-!”
여성의 목소리 치곤 거친 소리. 리넷의 미들네임을 함부로 부르는 그 외침에 상드린은 몸을 튕기며 일어섰다. 리넷 또한 딸의 애칭을 무심코 부르려던 것을 참고 상드린을 올려다보았다.
볼록 튀어나온 광대뼈와 단단한 얼굴선을 미려한 화장으로 가린 얼굴. 비록 세월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으나 이 역시 그가 친애를 가득 담아 사랑하던 이었다. 늘 여유와 열정이 가득하던 눈에 우수가 차자 눈물을 닦듯 리넷이 그의 눈가를 덧그리며 말을 걸었다.
“안녕이란 인사는 예전에 나눴지요. 작별 선물로는 다른 걸 주시겠어요?”
그리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부드러운 입술이 속삭였다.
“키스해 주세요.”
지근거리에서 서로의 살갗을 간질이던 한숨이 포개어진다. 남자의 어두운 눈은 나뭇잎 사이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 그림자의 수나 그녀의 속눈썹 수를 제대로 셀 수 없었으나 또렷하게 그 눈매를 기억하고 있었다. 눈꼬리 쪽으로 둥글게 쳐진 눈꼬리나 가는 속눈썹 아래 반짝이던 눈동자나, 애교 있게 짓던 눈웃음 등을. 젊은 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볼 수 없을 테지만,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유년 시절의 꿈처럼, 현재는 또다시 과거가 되어 흐릿한 상은 거울을 여러 겹친 만화경처럼 몽롱한 환상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 믿기에 남자는 품 가득한 향기를 만끽했다.
장미와 사향, 사이프러스 나뭇잎 향, 그리고 입술의 감촉으로 어우러진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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