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레이첼x샨] 168시간의 일상

조각 by P_윰

구룡에서의 일이 있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레이첼은 다친 다리를 회복했고,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은 분명 짧으나 긴 시간이라고, 레이첼은 생각했다. 분명 그녀에게는 단 이틀동안 수없이 많은 일이 있었을진데 돌아오고 나니 제게 있었던 '특별한 경험'은 없는 것 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아버지를 도와 문서를 정리하고, 조직 산하에 있는 회사들의 경영을 배우는 일. 이는 분명 제게 필요한 업무였지만 지루한 의무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지루함 속에서 과거의 자극을 찾았다. 종종 구룡에 머무르며 소식을 전해주는 이에게 '구룡의 소식'을 진해 듣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곳에 있을, 저를 찾고 있을 붉은 눈동자를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제게 사랑을 말하며 터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를 원망하던 당신을.

'원망'? 그녀는 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알 수 없었다. 구룡은 조용했고, 그의 소식조차 들릴 일이 없었으니까. 당신은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굴욕적인 상황에 분노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피식, 웃으며 눈 앞에 있는 칵테일을 한모금 들이켰다.

그는 '사랑'을 말했지만 그것은 금방 소멸할 감정이라고 레이첼은 확신했다. 이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칵테일 바에서 제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는 이들처럼. 거절을하거나, 또는 거절하지 않아서 이대로 하룻밤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이들 처럼.

연인이 되어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건 없겠지. 한때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을 하다가 결국 돌아섰던 과거의 연인이 그랬듯이. 헤어지자,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사랑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으로 보냈던가. 고통이 눈물이되고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서 애꿎은 가슴만 치고 있었던 시절은 이제는 과거의 일이었을 뿐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몇 안대는 흉터이기도 했다.

"..다르지 않겠지."

칵테일 글라스를 그러쥔 채 그녀가 중얼였다. 그래. 그도 다를바 없을 것이다. 메말라 죽어가라며 그를 저주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설령 정말 그런 기분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찰나의 감각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가 딱 그정도의 고통만 받기를 원했다. 아주 찰나의 고통.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사무치도록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통을.

그녀가 그것을 원했던 데에는 그를 동정했거나 사랑하게됐다거나 그런 시시한 감정이 기반되지는 않았다. 당시 그녀는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고, 그는 그녀를 포식했을 뿐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 역시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자신의 구역에서 저를 사냥하려던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당장의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방법은 달랐겠지만.

레이첼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아마 그가 찰나의 감정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영영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었겠지. 그가 그녀를 사랑했던건, 그것이 진심이 되었던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괘씸한건 괘씸했다. 감히 네가, 나를. 내 위에서 명령하려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로 나를 꿇리려고 했다는 그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충분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을 포함한 그 누구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다면 그녀는 명백한 포식자였고, 포식자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녀는 살아있을 의미조차 없다고 여기고 있기에. 그래서 잠깐, 그 건방진 짐승에게 길지 않은 형벌을 준 것 뿐이다. 이정도면 충분한 명분이지 않은가.

그녀는 마지막 순간 샨을 무릎꿇린 순간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웠지.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새겨졌다.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굴종하지 않고 반항한다. 죽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꺾이지않는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것들을 사랑했다. 꺾이지 않을 수록 길들였을 때의 재미가 충분하므로. 만약 그대로 샨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했다면 그대로 쇠파이프를 들어 내리쳤겠지. 평소의 레이첼이 그랬듯이.

그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그를 죽이는것 만큼 시시한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려두고, 제게 기어오르는 것을 구경하며 서서히 길들여가야겠다. 그렇게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런 정복욕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를 살린 것이다. 그만큼 그녀도 신선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제발 그 건방지고 사랑스러운 짐승이 오랫동안 버텨주길, 그리고 말라가길 바랐다. 언젠가 사그라질 감정일지언정 그 감정이 살아있을 때만큼은 충분히 고통스럽길. ..그리고 너무 분노하지 않길.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했지만, 최소한 그날 보냈던 밤. 황홀하리만치 갈구하고, 갈구하고 또 갈구했던 그날 밤 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그가 제게 안겨올 때,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제가 매달려 오던 그 때 만큼은 누구보다 그를 원했다. 적어도 그 잠깐의 순간만큼은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랑과는 의미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잘못하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해독제의 위치와 출처를 알려줬다면 우린 적어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터였다.

..나중에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날 때는, 당신이 나와 지금보다 더 지독히 얽히게 되겠죠.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그것을 원하는 이상은.

그리고 그 마지막엔 내가 당신의 목줄을 쥐고 있겠지.

그렇게 사랑스러운 나의 짐승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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