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샨x레이첼] 작은 뱀과 여왕님의 하루

#관캐가_작아진다면_자캐는

조각 by P_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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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황스러운 사건은 예고없이 발생했다, 라고 레이첼은 회상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날부터 설명하자면 그 날은 유난히 운이 좋았다. 손해보는 것 없이 미팅도 훌륭이 끝이 났고,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최근까지 말썽울 부리는 부하도 없었고, 그야말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 착각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하루였다. 오랜만에 제때 저녁만찬을 즐겼고 잠드는 시간 마저 완벽했다. 제 방에는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되는 것 처럼 저를 기다리는 짐승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기꺼울 정도로 그 날은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 아침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짐승이 어려지는 일만 없었다면, 분명 오늘 아침에도 그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터였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것은 제 품에 다 들어오지 않은 덩치가 제 안에 온전히 들어온 것 같은 감각을 느꼈을 때 부터였다. 그저 꿈이겠거니, 싶었는데..

“레이첼, 저 몸이 이상해진 것 같아요.”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 목소리가 제 귓가를 속삭이는 일만 아니었다면 꿈이었다고 단정지으며 다시 잠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레이첼은 저를 부르는 어린 소리에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작은 머리통. 설탕가루마냥 고운 백발과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눈은 그대로인데 어떻게 몸만 이렇게 작아졌나. 꿈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꿈이라면 이 앳된 목소리조차 생생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머리회전이 빨랐다. 그래, 꿈은 아닐테지. 자신의 몸이 이상해진 것 같다 말하면서 제 품으로 파고들어오는 이 온기가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모습일 적엔 딱 맞았을, 그러나 작아져버린 탓에 헐렁해진 옷을 입은 샨을 두고서.

“일단 일어날까요?”

레이첼은 샨을 향해 다정히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하게.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것은 몸만 작아졌을 뿐인 제 짐승임을. 그러나 어찌되었건 겉은 어린아이가 되지 않았는가. 어린아이를 다루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레이첼은 그녀의 오른팔에게 연락을 했다.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전후관계를 명백히 따지기 전에 당장 수습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게 우선일 터다. 그 ‘당장 수습해야 할 일’이란 저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며 눈을 깜빡이는 짐승에게 맞는 옷을 챙겨 입히는 것이고.

그러나 샨의 입장은 달랐다. 갑자기 작아진 것도, 그래서 당황스러운 것도 본인일진데 그런건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제게서 먼저 멀어지려고 하는 행동이 조금은 야속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레이첼의 새로운 면이 흥미로웠다. 여전히 햇살같은 그 미소 조차도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건 분명 그의 착각이 아닐터다. 레이첼은 샨을 어색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장난거리였다.

“역시 몸이 작은건 싫나요?”

샨이 물어왔다. 어려져서 그런가 눈망울이 올망해 보이는 것이 그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제 오른팔과 짧은 통화를 마친 레이첼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가 이내 접혔다. 얇은 입술에 완만한 곡선을 그린 채, 그녀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앉아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칼 만큼은 변함이 없네, 그 순간 레이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햇살에 물들어 옅은 노란 빛을 띄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제 집으로 오면서 유난히 그의 머리칼이 마음에 들었다. 하늘의 빛에 따라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이 하얀 도화지 같은 머리칼을.

“…조금 곤란스럽긴 하네요. 어린아이는 조금, 어색해서.”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는 작은 거짓말도 쌓이면 불신이 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샨은 슬금슬금 레이첼에게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가 제 허리를 감싸안으면 품에 가둬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작은 곰인형이 저를 끌어안는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 어려진 것 뿐인데 이렇게 까지 생소할 수가 있나.

샨의 옷은 금방 도착했다. 그것은 그녀의 오른팔이 기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어린아이가 입을만한 옷’이라는, 충분히 당황스러울만한 지시를 들었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최대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선일 뿐. 레이첼이 명령하는데는 모두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였으므로. 레이첼은 자신의 방 밖에서 옷을 받아들고 안에 들어와 샨에게 옷을 건네고 뒤를 돌았다.

“일단 이걸 입죠.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에 관해서는, 당신도 짐작이 가는 바가 없겠죠.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저희쪽에서 알아볼게요.”

“독 같은 건 아닐거에요. 그런 종류에는 내성이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는 장난 같은 게 아닐까요?”

옷을 갈아입으며 샨은 말했다.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이라는 지령 뿐이었는데 어떻게 이리도 잘 맞는 옷을 가져왔는지. 됐어요, 하는 말과 함께 레이첼은 뒤를 돌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멜빵 바지를 입은 샨은 영락없는 꼬마신사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독에 관해서는 당신만한 전문가가 없으니 당신의 말이 맞겠죠.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언제 돌아오느냐, 인데…. 어쨌든 어린아이는 혼자 오래 둘 수 없으니까요.”

샨은 생각했다. ‘어린아이는 혼자 둘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제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요새 눈코뜰새 없이 바빠 얼굴 제대로 보기 힘든 레이첼을 독식할 수 있는 기회. 어린아이를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아름다운 주인은 기꺼이 제 요구에 응해주리라. 그는 루비처럼 맑은 눈을 접어 샐쭉하게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저와 같이 있어주는거죠? 저는 연약하고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어린아이니까요.”

“그렇죠.”

레이첼은 당연히 그래야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어린아이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을 뿐. 그녀는 잠시 이 작은 아이와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옷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옷 사러 가요!”

깊은 고민에 빠지기 전에 샨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그 이후부턴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할 일이 정해졌다. 백화점을 갔다가 간단히 점심을 먹을 것. 그리고 아이를 위한 간식을 사서 돌아가는 것이 오늘의 스케줄이 되었다. 자택의 입구에서 차를 타기까지 샨은 레이첼에게 안겨 탑승했다. 몸이 어려져서 그런가, 옷이 얇아서 그런가 날이 너무 추우니 온기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백화점에 들어서면서는 손을 잡고 들어갔다. 레이첼에게 안기고 손을 잡으며 백화점을 누비는 것은 좋았지만 간혹 직원들이 레이첼에게 조카냐고 물어볼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역시 조카보다는 ‘연인’으로 오해를 받는게 기분이 훨 좋다고 샨은 생각했다.

“레이첼이 골라줘요. 어떤 옷이 예뻐요?”

샨은 아동복 코너에 들려 이것저것 옷을 가져다대며 그녀에게 물었다. 레이첼은 제 볼에 손을 올린 채 고민했다. 아무래도 어린이니까 단정한 옷이 좋겠지. 멜빵 정장도 예뻤고,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으니 니트나 후드같은 두꺼운 옷도 챙겨야겠다 싶었다. 이것저것 챙길 것을 고민하던 레이첼이 선택한 것은 ‘여기에서 저기까지 다 주세요’였다. 어찌 보면 현명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보다 다 사놓고 집에서 고민하는 게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샨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웃었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여자.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나의 주인. 나의 맹목.

“이제 식사하러 갈까요?”

레이첼은 웃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로. 백화점의 전등이 유난히 밝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밝은 시간에 그녀의 얼굴을 보아서 그런지 걸을 때 마다 살랑거리는 머리가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샨은 생각했다.

레이첼은 즐거워보이는 샨의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외출하는 것도 오랜만이지. 그동안 바빠서 얼굴조차 제대로 힘들었으니 말이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외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식사는 외출하기 전 미리 예약했던 레스토랑에서 했다. 음식이 나오고 샨은 약간 골몰하는 듯 싶더니 별안간 레이첼의 옆 자리에 앉아 작은 입을 벌렸다.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이니 먹여달라는 뜻이었다. 레이첼은 황당했다. 누가봐도 뻔한 흑심이 눈에 보이지 않은가. 그녀는 순순히 들어줄 것 같은 미소로 스파게티를 작게 말아 그에게 건네주다 제 입으로 쏙하고 넣었다. 아무래도 제 짐승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로 한 모양이지. 그녀가 잘 말린 스파게티를 제 입에 넣자 눈이 동그래졌다. 레이첼은 여유있게 웃었다.

“시도는 좋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사심조차도 구분하지 못할까봐요.”

그 말에 샨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작은 뱀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곳은 VIP 고객을 위한 프라이빗 룸. 음식이 나온 후에는 고객들이 부르기 전까지 올만한 사람은 없다. 그 판단을 끝낸 샨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곧 그는 작은 머리를 레이첼의 뺨에 부비다가 레이첼과 시선을 맞췄다. 작고 가여운 저를 귀여워해달라고, 예뻐해달라는 몸짓이었다. 평소의 샨 답지않았다. 레이첼은 보기 드물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짐승이 이렇게까지 애교를 부릴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 볼을 부벼오는 작은 머리에 레이첼도 자신의 볼을 부벼댔다. 적당히 시린 감각이 기분좋은건 제게 닿은 이가 당신이기 때문이리라. 지금으로선 몇 안되는 내 편인 당신이. 레이첼은 다시 스파게티를 말았다. 작게 말고나서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으로 먹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샨은 맑은 눈망울로 그녀를 보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작고 앳된 모습의 샨. 그가 작은 입을 벌려 스파게티를 입에 넣었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레이첼은 그의 모든 행동을 눈에 담았다. 가끔 이런 평화도 나쁘지 않지. 레이첼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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