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김서연_01

그녀는 누구인가?

조각 by P_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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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벽지와 바닥, 정면에 탁 트인 통유리 너머로 내려앉은 햇살. 서연은 그 햇살을 맨얼굴로 받아낸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따뜻하네. 제 감상을 덤덤히 놓던 서연은 별안간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일 제 노트북을 쳐다보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화면 속 깜빡거리는 텍스트 커서를 바라보며 서연은 이 모든 행위가 부질없음을 느꼈다.

"아…, 그냥 다 때려치워버릴까."

대화할 상대 없이 내뱉아진 말은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바라보며 느리게 감기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래, 할 수 없다면 때려치우면 된다. 눈 아래로 짙에 내려온 검은 그림자의 무게는 그녀의 판단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생각의 정리가 끝난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먼저 찾았다. 물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이쯤되면 그녀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슬럼프다. 그것도 꽤나 지독한.


28살, 어린 나이에 그녀는 나름의 성공을 경험했다. 아니, 지금의 나이에 베스트 셀러를 다수 뽑아낸 추리소설작가라고 한다면 꽤나 대단한 성공일지도 모르겠다.

'seo_'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얼굴없는 천재 작가. 그것이 세간에서 그녀를 수식하는 단어였고, 그녀 역시 세간에서 떠드는 자신에 대한 칭송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는 24살에 등단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글을 쉬지 않은 열정이 있었고, 그 열정의 기반이 된 아이디어들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다. 서연은 그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언제까지고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스스로의 천재성만 믿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왔고, 새로운 소재를 기록하고 메모하는 등의 노력으로 제 재능을 뒷받침하고 있으므로 슬럼프따위 올 일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 물론 이것은 서연이 자신의 현 상태를 '슬럼프'로 정의한 순간부터 모두 과거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인정해야만 했다. 과거의 그녀는 과하게 열정적이었으며 또 오만했다. 밤을 새우면 어떻게든 한글 파일을 무겁게 만들어오던 과거에 비해, 그저 하얗기만한 지금의 노트북 화면을 보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서연은 1.5L짜리 생수통을 하나 꺼내 시원하게 물을 들이킨 뒤 거실쪽에 덩그러니 놓여진 노트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더 보고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결국 그녀는 꼴도 보기 싫은 노트북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슬럼프인 것을 인정한 마당에 원고에 매달리며 골머리를 썩힐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 당장 원고에 매달리는 것은 낭비된 행동이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것이 오늘의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었던 서연에게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의 수면이었다.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지면서 서연은 언뜻보면 글을 쓰는 것과는 멀어보이는 생각을 주마등처럼 늘어놓았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이나 다녀볼까, 해외여행도 나쁘지 않겠다. 당분간은 글 보다는 경험에 집중해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친구랑 연락이라도 해볼까, 라는 생각들. 그녀가 잠이 들면서 너저분하게 늘어 놓은 생각들은 등단이후 지금까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미뤄왔던 것이기도 했다.

일단 자자. 이것저것 방향성 없이 생각을 늘어뜨리던 서연은 모든 생각들을 수면욕으로 덮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을 자는 것만이 이 순간 자신이 행동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편이라고 믿었다. 모든건 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서연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할 뿐인 합리화를 되뇌이며 서서히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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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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