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새벽제비는 로젠을 밀쳤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부석해진 머리는, 지금도 낙엽이 물들듯 한 올 한 올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로젠은 새벽제비를 향해 가려고 손을 뻗었다. 바람이 끝났다. 수많은 발이 달린 전차가 새벽제비를 들이박고 사라졌다. 전차가 달려가는 쪽으로 공기가 빨려가듯 움직였다. 로젠은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으면 좋으련만, 그 자리에는 스님 한 명이 서있었다.
당신이 이 일을 꾸민거야?
로젠이 쏘아붙였다.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은 모두 저 사람이 꾸민 것입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이여, 당신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로젠은 팔을 툭 떨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싫었다. 정말 싫었다. 연루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일은 이 지경까지 흘러왔고, 로젠은 자신이 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을 때의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두두두, 떼로 발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은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려 떠났다. 그를 따라가야할까? 다리에 힘을 주었다. 눈물을 닦았다. 저 길은 아니다. 저 스님을 따라가면 안된다. 로젠은 간신히 기억해냈다. 기분 나쁜 날이었다. 물론, 그 상사의 손을 꺾어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사가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은게 없던 일이 되는게 아니다. 그렇게 조용히 끝났으면 괜찮았을까? 상사의 손을 꺾은 것이 문제가 되어 되려 자신이 상사를 폭행했다고 인사과에 얘기가 들어갔다. 그 덕분에 윗사람, 윗윗사람들에게 불려다녔다. 로젠은 발을 구르며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로젠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보다도 쓸쓸함이 그의 마음 속을 맴돌고 있었다.
저기……!
어떤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로젠은 걷다 말고 뒤를 보았다. 그러다 다리가 꼬였는지, 균형을 잃고 휘청였고, 하필 그 곳에 있었던 작은 석상 하나 때문에 로젠은 대차게 넘어졌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흥건했다. 아파서 비명도 못 지르고 끙끙 앓다가 벌떡 일어나 석상을 노려보았다.
하다하다 이런 돌 까지 날 괴롭혀!
물론 그 석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로젠은 화풀이를 할 데가 필요했다.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그려진 석상을 발로 걷어찼다. 그렇게 세게 찬 것 같지 않은데 석상은 훌렁 뒤로 넘어갔다. 찝찝했지만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로젠은 절뚝이며 넘어간 석상을 뒤로 한 채 산을 내려갔다. 피 섞인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로젠은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산 초입부에는 어떤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다 로젠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거 난감한데.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등산로 입구가 조용해서 그런 것인지, 이상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로젠의 귀에 쏙 들어왔다. 로젠은 직장에서의 사건과 산에서의 사건 때문에 화가 나 있을 대로 나 있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뭐, 임마.
로젠도 이상한 놈팽이에게 으르렁거렸다. 아저씨는 익숙하다는 듯이 재떨이에다 담배를 비벼끄고 로젠에게 다가갔다.
너, 너 말이야 너. 석상을 건드렸지? 장난으로? 아니면 다른 이유로?
무슨 사기를 치려는 거야?
사기라니. 속상하다고. 이거 엄연히 있는 직업이야, 퇴마사라고.
그게 사기꾼이란 뜻이잖아?
무릎도 대차게 까지고.
로젠은 놈팽이의 말에 다친 쪽 다리를 살짝 뒤로 뺐다. 이런 것 까지 남에게 약점 잡히고 싶지 않았다.
새벽제비.
퇴마사 양반이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돌려 로젠을 가리켰다. 로젠은 손가락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코 끝이 찡해왔다. 로젠은 이런 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기꾼” 이라고 믿었다. 로젠의 양어머니께서는 그런 것을 믿으면 안된다고, 우리가 믿을 것은 과학과 철학이라고 얘기를 했지만, 천덕꾸러기였던 자신을 거둬 준 어머니마저도…….
사기꾼.
로젠은 생각이 더 흐르기 전에 입을 뗐다.
그래, 사기꾼 양.
나한테 접근할 생각 하지 마. 그리고 내가 사기꾼이겠냐? 네가 사기꾼이지.
새벽제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접힌 반창고를 하나 꺼냈다.
붙여.
새벽제비가 반창고를 흔들거렸다.
집에 많아.
로젠이 툭 던졌다.
아아, 아깝게.
새벽제비는 그걸 주우려고 하려다가 곧 그만 두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말했다. 이러면 위생상으로 좋지가 못하다느니, 멀쩡한 반창고를 다 버렸다느니, 그런 헛소리를 한동안 듣자니 화가 나서 로젠은 그럼 멀쩡한 반창고 네 이마빡에나 붙이고 다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원래 나, 이런 골치아픈 사건은 휘말리지 않으려고 하거든? 근데 난감하잖아.
로젠이 새벽제비의 말을 막기 전 새벽제비가 쭝얼거렸다.
너, 곧 죽어.
말도 안 돼. 로젠은 까르륵 큰 소리로 웃고 침을 뱉은 뒤, 절뚝거리며 길가로 걸어갔다. 여기서 몇 분만 걸으면 나름 번화한 동네가 나온다. 거기에 자신의 집도 있고 도움을 청할 파출소도 있다. 사기꾼 하나가 악질적으로 접근-, 그 때 새벽제비가 로젠을 끌어당겼다.
무슨……!
로젠이 빽 소리질렀다. 동시에 파란 트럭이 그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로젠은 놀라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트럭은 멈추지도 않고 달려갔다. 바람이 그 뒤를 따랐다. 새벽제비의 손가락이 트럭을 따라 궤적을 그렸다.
뒤로 와. 한 대 또 올거야.
로젠은 얼결에 뒤로 몇 걸음 걸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트럭 한 대가 더 지나갔다.
바퀴 부분, 봤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안 보는 게 좋아. 저게 신이야.
신이 트럭을 몰아?
신의 힘이 저 모습으로 의태하여 나타나는거야. 네가 건드린 석상이 신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뭐……. 네가 더 잘 알겠지.
트럭에 치일 뻔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새벽제비는 쪼그려앉아 우는 로젠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같이 앉았다.
비슷한 일이 있었구나.
로젠은 새벽제비를 밀쳤다.
아는 척 하지 마. 사기꾼 주제에.
죽기 싫으면, 뭐.
새벽제비는 로젠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여기서 만나자고. 혹시 모르니 며칠 동안은 여기 계속 있을게.
로젠은 새벽제비를 밀치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이도, 돌아가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젠은……. 자신이 본 것을 잊으려고 집 근처 마트에서 청주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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