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2 연성

[드림] 언어학

지고한 이해

* 데스티니 2 드림

* 등장인물 [까마귀]

새벽제비는 천천히 뒤돌아 낡은 다리를 이끌고 타박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까마귀는 실망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알 수 없었다. 그럴거면 관심이나 갖지 말지.

그래봤자, 그들은 몰락자다.

단편적으로만 보는 것 아닌가?

까마귀가 매섭게 쏘아붙였지만, 새벽제비는 그 정도로 깎이지 않았다.

몰락한 이들에게 도덕률을 바란 내 잘못이야. 그들에 관여하지 않겠다.

새벽제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늙은 수호자란, 얼마나 완강한 존재인지 까마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런 오해가 무슨 결과를 불러왔는지 까마귀는 알고 있어서, 새벽제비에게 희망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까마귀는 타박거리며 멀어져가는 새벽제비를 바라만 보았다. 실망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완전히 털렸다니까.

까마귀는 새벽제비의 의자에 앉아 툴툴거렸다.

말도 안 돼, 난 지는 내기엔 걸지 않아!

변명은 그만 두고, 얼마나 잃었는지 말하렴.

아니, 난,

얼마나 잃었는지 말하렴.

새벽제비는 침대에 반쯤 걸터누워있었다. 한쪽 눈이 거의 먼 상태였다. 그는 고개를 틀지 않고 까마귀를 쳐다보았다. 흐릿하면서도 총명한 그 눈동자에 까마귀는 시선을 돌리고 더듬거렸다.

많……. 많이.

새벽제비는 까마귀가 정확한 액수를 말할 때 까지 그를 바로 쳐다보았다. 꼭 그 모습이 자신을 아들로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까마귀는 견딜 수 없었다. 그가 금액을 실토하자 새벽제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그는 그 액수를 변제해줄 수 없었다.

조금이지만.

아니다, 슈, 이건 내 문제야. 내가 해결할 수 있다.

용돈이다 생각하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그러니.

까마귀가 자세를 바로하자, 새벽제비는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나에게 몰락자 말을 가르쳐주려믄.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너무나도 조용한 말씨였어서 까마귀는 순간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잠시 눈을 끔벅이다, 까마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별 것 아니지.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냥 심심해서.

그냥? 심심해서?

새벽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섬세한 부탁을 해놓고선 그냥, 심심해서, 가 이유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까마귀는 새벽제비의 부탁을 하나의 변화, 아주 섬세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새벽제비는 암흑기를 겪은 수호자이고, 그런 수호자들은 엘릭스니들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시대는 변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시작하자고. 먼저, 이것부터 하자.

까마귀는 새벽제비의 책장을 뒤져 이면지들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제 1장, 몰락자가 아니라 엘릭스니.

엘릭스니.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펜을 찾아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까마귀의 모습을 반으로 줄어든 시야로 쳐다보았다. 새벽제비는 까마귀가 무언가를 추모하는 것을 보았다.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추모란, 추모하는 자의 뒷모습이란, 그런 것이니까. 까마귀가 자리를 뜨자 새벽제비는 타박거리며 그 곳으로 갔다. 보랏빛 천이 있었다. 그리고 작은 양초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천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부드러웠다. 새벽제비는 오래된 경험으로 알았다. 질감도, 크기도, 모양도 다 달랐지만, 그건 아이를 싸는 포대기였다.

몰락자, 아니…….

엘릭스니.

엘릭스니. 그래, 엘릭스니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어. 내가 부활하고 처음 만난 적도 몰락……. 엘릭스니였고.

까마귀는 펜을 들고 새벽제비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한참 침묵했다. 그가 꺼내놓으려는 말은 죄악이었다.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새벽제비는 차선택을 택했다.

이유를 물었지.

새벽제비는 몰락자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끽끽거렸다. 푸른 눈들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몰락자는 적이다. 새벽제비는 오래된 경험으로 알았다. 그가 짚은 나무 지팡이가 위협적으로 타들어갔다. 으레 그렇듯, 섬광이 빛나고 굉음이 쳤다.

나도, 추모할 것이 있다.

까마귀가 추모하던 장소로 새벽제비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양초를 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천의 부드러운 촉감은 잊혀지지 않았다. 까마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제비가 사연있게 행동한 것이 한 두 번이어야지.

괜찮아. 남의 말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런가. 새벽제비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가? 그건 너무 거창한 것 같다고, 새벽제비는 생각했다. 까마귀는 분위기를 바꿔보려 종이에다 커다랗게 엘릭스니 인삿말을 읽기 좋게 적었다. 엘릭스니 언어를 알파벳으로 옮긴 것이었다. 새벽제비도 읽을 수 있게.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새벽제비는 발음이 멋지진 않아도 인삿말을 포함한 일상 회화를 대충 익혔다.

역시 언어는 실전이라고 생각한다.

새벽제비의 몸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을 때, 까마귀는 산책을 가자고 새벽제비를 꾀어냈다. 바깥 활동을 좋아하는 새벽제비는 그 꾐에 기꺼이 빠져주었다. 까마귀가 새벽제비를 데리고 간 곳은 빛의 가문이 둥지를 튼 봇챠구역이었다.

실전이라고 해도, 갑자기 이런…….

새벽제비는 답지 않게 겁에 질렸다.

엘릭스니의 문화와 언어를 체험해볼 수 있는 귀중한, 뭐, 그런거다.

까마귀가 짓궂게 말하며 새벽제비를 끌고 봇챠구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까마귀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하더니 차츰차츰 엘릭스니들과 말을 섞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까마귀는 선생님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새벽제비가 더듬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엘릭스니는 새벽제비의 말을 유심히 듣다 서툰 인간 공용어로 새벽제비에게 말을 걸었다. 서툰 엘릭스니 말과 서툰 인간 말이라니. 그 대화가 끝나고 새벽제비는 까마귀에게 돌아왔다.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까마귀는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렸다. 어쩌다보니, 새벽제비는 서툰 인간 말을 쓰던 엘릭스니에게서 부탁을 받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될 일인가. 봇챠구역에서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될 일인가?

무슨 부탁이었는데.

전언을…….

전령의 기운이라도 있는 것인지, 전령이라 그 부탁을 지나치지 못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까마귀는 새벽제비를 이해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 엘릭스니의 말을 옮겨준 것을 계기로 서로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새벽제비가 말을 전해줘야 할 상대는 탑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 까지 만나기로 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지난번 경기는 열성적이었다” 는 다소 문법에는 안 맞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뭐야? 저번 결과에 불복하는거냐?

참새에 앉아있던 타이탄 하나가 까마귀를 보더니 덩치를 으시대며 일어섰다. 그 뒤에서 시시덕거리던 다른 타이탄들도 위협적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까마귀가 한숨을 내쉬면서 새벽제비에게 속삭였다.

잠깐, 내가 해명할 수 있어.

새벽제비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까마귀는 그를 막으려 했다. 새벽제비는, 두 발 앞으로 나섰다.

전언이 있소.

안중에도 없던 사람이 나서자, 화력팀장으로 보이는 타이탄은 당황했다.

전언?

“여기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지난번 경기는 열성적이었다.”

세 명의 타이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타이탄 화력팀장이 자신의 데이터패드를 켰다.

뭐, 일을 했으면 돈을 받아야지.

받지 않겠소.

새벽제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까마귀.

그리고 새벽제비는 돌아섰다. 까마귀를 불렀지만, 그와 걸음을 같이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새벽제비는 홀로 자리를 떴다. 까마귀는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았다. 새벽제비는 병들고 지친 사람이라 그를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말 좀 해. 내가 해명할 수 있어.

까마귀가 새벽제비의 어깨를 잡아 그를 멈춰세웠다. 새벽제비는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틀지 않고 바로 쳐다보았다. 희게 뜬 한쪽 눈이 유난히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래봤자, 그들은 몰락자다.

새벽제비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이 당황스러웠겠지, 그 타이탄들이 경기를 조작했는지 난 몰랐어, 슈. 믿어줘. 그리고 그 조작에 엘릭스니가 껴있는지도 몰랐-

빛의 가문은 범죄와 거리가 먼 몰락자들을 받아들이는 것 아니었나? 아니면, 좀도둑 집단이 빛의 가문인가?

말이 심하지 않아?

그들은 몰락자다.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마!

새벽제비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들을 수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 낡은 다리를 이끌고 타박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까마귀의 눈빛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필경 실망했겠지. 새벽제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이해하고 싶었던건지. 무엇을 추모하고 용서받고 싶었던건지. 새벽제비는 천둥과 번개를 땅에 내렸다. 몰락자 무리는 저항도 못 하고 모두 죽어버렸다.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그들에게 무기가 없음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그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 새벽제비는 무장하지 않은 몰락자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민간“인” 이란 말인가? 거기에 생각이 닿자, 새벽제비는 그럴 리 없다고 소리치며 몰락자 무리를 미친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했다. 조막만한 몰락자를. 새벽제비는 무릎을 꿇었다. 그 작은 몰락자의 눈은 힘없이 반짝이다 사그라들었다. 새벽제비는 까마귀가 추모하던 몰락자 아이를 추모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몰락자……. 의 아이를 데려왔다는건가?

디어가 등을 보이고 누운 새벽제비에게 물었다. 몰락자에게도 “아기” 가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은 디어와 새벽제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벽제비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네.

그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몰락자 아기의 시체였다. 디어는 새벽제비가 거짓말을 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강철군주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했다 몰락자에게 정보를 넘기려는 첩자로 오해받았다. 새벽제비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친구를 곤경에 빠뜨린 채 썩어가는 몰락자 아기의 시체를 가져온 곳에 돌려놓았다. 그 때 만큼 사후세계가 있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몰락한 이들에게 도덕률을 바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그는 몰락했다. 그는 도덕적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믿는 잘못을 범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편안하기를 바란 이기심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악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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