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2 연성

[자캐] 광활한 우주에서 배를 젓는다는 것

가끔가다 끝내기 힘든 이야기가 있는 법입니다.

* 자살/살해/집단구타/따돌림/학대 가 낭만적으로 묘사되어있음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몇 시간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는지 모른다. 관절이 냉기에 굳어져 잘 움직이지 않았다. 원망도 슬픔도 분노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몸처럼 감정이 굳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천천히 얼어 죽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고향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시를 가르쳤단 이유로. 발 끝부터 햇빛이 닿았다. 신새벽의 흐린 열기는 점차 강해졌다. 손가락에 힘이 돌고 무릎이 삐걱이며 움직였다. 기다시피 일어섰다. 마을에서 한 아이가 달려왔다.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배움이 느린 아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만난 것이 들키면 마을은 아이에게도 매를 들 것이었다.

선생님 집에서 가져왔어요.

아이가 배낭을 질질 끌며 소리쳤다. 아이 앞에서 무너져있을 수는 없었다. 다리에 힘을 줬다. 휘청거리며 설 수 있었다. 아이는 나에게 책과 옷가지가 엉망으로 뒤엉켜 들어있는 배낭을 주고, 자신의 집에서 몰래 훔쳐온 말린 과일과 육포를 주었다.

정말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한건가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승천자가 말린 과일을 한 입에 털어넣고 물었다. 나는 모닥불을 쳐다보았다.

가끔 희망은 괴물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 희망을 갖지 않고 자기들과 똑같은 삶을 영위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죠. 어쩌면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한건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당신도 그 마을에서 자랐다며요.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했단 말입니까?

읽었죠. 그래서 더욱…….

옆구리가 아려왔다. 승천자의 드론은 갈빗대에 금이 갔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진단명만 있을 뿐, 의사는 없었다. 나는 자연적으로 금 간 곳이 붙기만을 기다려야했다. 승천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 세상을 구하러 되살아난거라는데, 그런 마을이 도처에 널렸다면, 난 무엇을 구해야하는겁니까?

나는 통증을 가라앉히려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심리적으로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나는 구부정하게 무너진 벽에 등을 기댔다.

당신은 초인이죠.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때 까지 그 사람들을 죽지 않게 보살피면 됩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이를테면, 그래요, 당신을 짓밟은 사람들을 응징한다거나!

그런건 탄산같은거에요. 탄산, 알죠?

승천자는 버려진 자판기에서 본 적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탄산은 속이 막힌 것을 내려주죠.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느낌일 뿐, 사실은 몸을 망가뜨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남이 구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어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야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되살아난거죠? 목숨이 하나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건 당신 스스로가 규정할 일입니다.

나는 아이가 준 봉투를 뒤져 마지막 남은 말린 과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종이 봉투는 모닥불에 던졌다. 불이 순간 타오르다 다시 잦아들었다. 승천자는 말린 과일을 물끄러미 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다친 몸 때문에 피곤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승천자의 손수레에서 담요를 내렸다. 먼저 자겠다는 말에도 승천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말린 과일을, 바라보며.

나에게 이름을 준 부모님은 내가 열 다섯 때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온화한 집안이었다. 부모님이 쌓아온 평판 덕분에 나는 따돌려지듯 마을 어른들이 돌봐주었다. 슬프고 쓸쓸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모아온 낡은 종이책들을 읽었다. 전자책도 많았지만, 우리 마을의 발전기로는 기기를 충전시키기 충분치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아르튀르 랭보의 글이었다. 랭보는 다른 삶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나는 다른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귀히 여겨주던 할머니가 충고했다.

그런 글을 자꾸 읽으면 생각만 많아지고 안된단다. 너도 농사일, 기계일을 배워서 혼자 살 방도를 찾아야지.

일어나요.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시야가 잘 잡히지 않았다. 오랫만에 달게 잤다.

지금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지키면서 괴물들과 싸워야 할 거에요.

승천자였다. 부스스 일어났다. 달게 잤지만, 옆구리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싶었지만 다친 곳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담요를 챙겨들고 손수레의 짐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승천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소처럼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아마 3시간을 더 가면 마을이 나온대요. 고스트가 그랬어요. 당신을 평생 짊어질 수는 없으니, 그 곳에 내려줄게요.

그 마을에서는 정착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발 끝을 내려보았다. 신발이 짝짝이었다. 급하게 집에서 끌려나오면서 아무거나 신었더니 그렇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사실, 이 멸망한 행성 위에 대학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 더 깊게 글을 공부하고, 언어를 공부하고, 그렇게 쌓은 지식 위에서 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눈치를 채기도 전에 눈물이 떨어졌다. 승천자가 끄는 수레 위에서 나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승천자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을까. 내가 그 승천자를 다시 만난 것은 오 년 뒤였다. 나를 내려준 마을은 고향보다 큰 마을이었다. 사실, 그걸 마을이라고 부르는게 좋을지는 모르겠다. 작은 병원에서 서툰 의사들이 자라고 있었고,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작지만 매주 목요일에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안녕.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나를 보고 승천자가 멋쩍게 웃었다.

이젠 괜찮아요? 옆구리.

그건 오 년 전에 다 나았어요.

우리 둘은 정겹게 웃었다. 나는 승천자에게 대추야자를 공짜로 한 줌 주려고 했다. 오랫만에 만난 은인을 위한 선물이었다.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황야에서 비참하게 말라 죽었을테니까.

기억나요? 내가 실신할 때 까지 얻어터진 뒤, 도와달라고 하자 사람은 서로 돕는거라며 댓가도 없이 날 여기까지 데려다줬잖아요.

손사래를 치며 대추야자를 거절하던 그는 그제서야 작은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 시간 동안, 승천자는 좀 더 멋진 방어구를 차려입고 그럴듯한 이름도 스스로에게 붙였다. 그 이름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날 가게를 일찍 닫고 승천자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향신료를 입혀 훈제한 햄을 볶은 밥 위에 얹은 것이었다. 나름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나에게는.

오 년간 어떻게 살았어요?

나의 질문에 승천자는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아니, 부탁이 아닌 강요였다.

당신이 마을 대표가 되어주세요. 나는 이 마을이 필요합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승천자들은 이제 전쟁군주라 불리고 있었다. “보호” 를 해주는 대신 물자를 징집하고, 사람들을 징용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마을은 우리 마을의 규칙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와서 갑자기 흩어놓을 수 있는게-

당신이 마음껏 아이들을 가르치게 해줄게요. 내가 뒤에 있으면 아무도 당신을 매질하지 못할겁니다.

아뇨.

지독한 슬픔이 몰려왔다.

당신은 나를 때릴 수 있잖아요.

저쪽의 성에서, 나는 한 군주를 보았어요. 그 자의 무력 덕분에 사람들은 스스로 계몽할 수 있게 되었죠.

무력은 필요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먹는 중인 그릇을 죄다 가져와 개수대에 처박아버렸다. 나는 희망을 잃은 마을에서 희망을 불러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 각목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이마가 깨지고, 비틀거리는 와중에 옆구리를 맞아 갈비뼈에 금이 갔다. 나는 쓰러졌고 사람들은 발길질을 했다. 한 아이가 나에게 짐을 가져다주었다.

선생님, 멀리 가세요.

아이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훔쳐온 먹을 것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야.

개수대에 한데 뒤섞인 음식을 보며 중얼거렸다. 승천자, 아니 전쟁군주는 내 집을 나서다 말고 현관에서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이렇게 끝인가요?

나는 답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분노가 섞여있었다. 전쟁군주는 문을 닫았다. 나는 그제서야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 칠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짐을 꾸렸다. 잘 말린 대추야자를 한보따리 챙겨 마을을 나섰다. 그렇게 나는 행상인이 되었다.

이 마을에서 대추야자를 팔고, 물건을 판 돈으로 지필묵을 사 저 마을에서 팔고, 물건을 판 돈으로 과자를 사 다른 마을로 떠돌기를 한 해 동안 했다. 나는 그렇게 튼튼한 사람은 아니라 많은 물건을 살 수도 없었고, 많이 걸을 수도 없었다. 버는 돈은 많지 않았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으면 다행이었다. 몸이 지쳐갔다. 몸이 지치니 마음도 지쳤다. 다행이 나와 면식이 있는 전쟁군주는 나를 쫓지 않았다. 그렇겠지, 나에겐 그에게 대항할 수단도 힘도 인망도 없었다. 그 자에겐 죽일 가치도 없는 그런 벌레였다.

안녕.

나는 한 마을에서 멍하게 깃털을 들고 앉아있는 아이를 보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배낭을 던지듯 내려놨다. 배낭에 메달아 놓은 야영용 물자들이 부딛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거, 말똥가리 깃털이네.

나는 아는 척을 했다.

색을 보니 알비노 개체겠구나. 희귀한데, 어디서 봤니?

그냥 있었어. 몰라.

아이는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아무렇게나 자른 단발머리에 땟물이 흐르는 맨발. 심하게 낡아 구멍이 뚫린 옷.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랍 에야스.

나의 손을 아이는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덧붙였다.

악수하자고.

아이는 내 손 끝을 두 손가락으로 집고 흔드는 척을 했다. 나는 아이에게 군것질거리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마을 안내를 부탁했다. 아이는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깃털을 들고 팔짝팔짝 뛰었다. 나는 베낭을 대충 짊어지고 아이를 앞세워 마을로 들어갔다.

네 이름은 뭐니?

엔리케.

아이는 입 안에 사탕을 두 개 집어넣고 웅얼거렸다. 입가로 들쩍지근한 침이 흐르는 것을 아무렇게나 슥슥 닦고 이곳저곳을 알려주었다. 행상인인 나에게는 쓸모없는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넓은 정원이 딸린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나는 저 곳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엔리케는 도서관이라고 말했다. 지하는 엄청 튼튼해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저 곳으로 피신한다고 했다. 도서관은 처음 봤다. 어딘가가 울렁거리는 느낌이라 나는 엔리케를 재촉해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물건을 파는데.

응.

장사를 하려면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하니?

음……. 몰라.

이 마을의 대장은 누구?

우리 엄마랑 아빠…….

아이는 자신없이 말했다. 나는 픽 웃었다. 일단 어른들이라면 말이 잘 통하겠지, 엔리케를 앞세워서 부모를 찾아갔다. 장사 수완이 좋지는 않았지만, 여러 인간들을 만나면서 사람 보는 눈이 대충 생겼다.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엔리케와 속닥이면서 몇 마디 나누더니 곧 그들이 마을의 수장인 것 처럼 굴며 나에게서 “수수료” 를 떼어가려고 했다. 집은 썰렁했다. 마치 곧 떠날 사람들 처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받아주다 일단 여독을 풀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엔리케가 달려왔다.

나, 그…….

엔리케는 수줍게 웃었다.

대장 보여줬으니까 단거 더 주면 안돼?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겐 죄가 없다. 나는 설탕이 든 과자 말고, 말린 과일을 엔리케에게 쥐어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존댓말 써야한다. 응?

왜?

그게 사람간의 예의야.

너도 존댓말 쓰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말린 과일을 한 입 먹더니 사탕같이 단건 없냐며 칭얼거렸다. 건강을 이유로 말렸지만 듣지 않아서, 존댓말을 안 했기 때문에 덜 단 군것질을 준거라고 혼냈다. 나는 다행이 머물 민가를 찾을 수 있었다. 방 한 칸을 빌리는 대신에 얼마간의 돈을 냈다. 엔리케의 부모는 뻔질나게 내 방을 찾아왔다. 집 주인이 내 귀에 대고 속닥였다.

저 사람들, 평이 안 좋아요.

그럴 것 같네요.

아이도 약간 모자라다 하고.

나는 집 주인을 매섭진 않게 노려보았다.

아이는 잘못이 없죠.

집 주인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엔리케를 깔보는 말투를 거두진 않았다. 엔리케는 부모와 함께 와 나에게서 군것질을 뜯어내려 했다. 존댓말은 꼬박꼬박 썼지만, 효과가 좋지 않은 것 같자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은 안됩니다, 엔리케.

달래다 달래다 안 돼, 내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진짜 아파서 단걸 먹어야해요.

아프면 단걸 먹으면 안되지, 왜 자꾸 단걸 찾아요. 이제부터 나한테 와도 단건 못 먹습니다. 알았나요?

싫어!

엔리케가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이 때 봐주면 아이의 버릇이 나빠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완강히 굴었다. 결국, 지친 엔리케는 씩씩거리며 내 발치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광경을 저 멀리서 엔리케의 부모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나와 엔리케를 쳐다보다 발걸음을 돌려 멀리 사라지는 것도. 그렇게 엔리케의 부모는 영영 사라졌다. 엔리케를 두고.

엄마 아빠는 필요 없어.

엔리케는 잔뜩 화가 나서 벽을 쳐다보고 앉아있었다.

나 혼자 이 집에서 살 수 있어.

나는 옆에서 엔리케와 함께 같이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엔리케는 쫑알거렸다. 자기는 혼자서 씻을 수도 있고, 혼자서 이도 닦을 수 있고, 밥도 데울 수 있고, 물도 물컵에 따라 마실 수 있다고. 자기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나열하는 엔리케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는 눈물을 터뜨렸고, 나는 그 애의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정말 나 안 찾으러 올까요?

엔리케가 내 품에서 물었다.

나도 엄마 아빠가 영영 안 왔어요.

나는 엔리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 부모님은 파종할 씨앗을 구하러 가다 봉변을 당했다. 저 먼 마을에서 수확량이 더 많은 씨앗을 가지고 있다기에, 온화하시고 일을 도맡아하는 부모님은 서로를 의지하며 여정을 떠났다. 하지만 씨앗은 귀중한 자원이라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부모님은 그 마을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마을의 사람 하나가 부모님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우리 마을로 가져왔다. 나는 열 다섯살이었다.

다시는 종자를 넘보지 마시오.

마을 사람들은 그 뒤로 새로운 모험을 하지 않으려 했다. 남의 씨앗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씨앗을 몇 년이 걸리든 개량하면 되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그렇게 고여만 갔다.

엔리케. 우리 가족할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엔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엔리케의 부모가 버린 집에서 둥지를 틀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되었다.

그래요, 그 승천자를 칠 또 다른 승천자들이 나타난거군요.

나는 중얼거렸다. 디어는 별 생각없이 그 말을 넘겨들으려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자를 아나?

고개를 끄덕였다. 내쉬는 숨이 떨렸다. 매맞고 버려진 나를 구해준 자. 나를 안전한 마을까지 옮겨준 자. 나를 다시 마을에서 밀어낸 자……. 무엇으로 그를 설명해야할지 몰라 나는 디어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사연이 있나보군.

엔리케가 아직 살아있을 때, 저쪽 마을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승천자 하나가 마을 하나로는 자신의 향락과 사치를 감당할 수 없자,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을 공격하려 한다고. 덕분에 상단의 왕래가 끊어져 나는 음식 가격을 올려야했다. 단골 손님들의 투덜거림을 재치있게 받아넘기기도 힘들었다.

정말로 승천자가 우리들을 점령하러 올까요?

나는 화제를 바꿨다.

글쎄, 우리도 제법 든든한 아군이 있지 않나.

손님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 마을도 승천자 한 명이 버티고 있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엔리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고 했다. 다들 말했다. 그는 다르다고. 여러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 마을을 뜨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가 걱정하던 폭정이나 폭압도 없어 어영부영 마을에 엉덩이를 붙이고 음식점을 열기까지 했다.

승천자라는 것은 왜 생겨났을까요.

한탄처럼 내쉰 말에 손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행자께서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되살린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듣자하니 의로운 승천자들이 모여 저쪽 마을의 독재자 따위를 무찌르고 있다는데.

강철군주 말씀이신가요. 뭐, 우리 편이 저쪽 편 보다 더 강하길 바라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력이 개인에게 집중되어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블랙홀은 주변의 빛을 빨아들인다. 그래, 그런 느낌으로 나는 승천자들이 불길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손님의 접시를 치우고 가게를 닫고 있을 때,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이 곳은 물줄기가 흐르고 멀쩡한 동력원이 많아 곳곳에 마을이 있다. 그 말은, 마을을 습격하고 다니는 몰락자들도 곳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언제 습격해야 가장 많이 뺏어갈지 알고 있다. 지금은 습격 철이 아니었다. 와도 뺏어갈 것이 없을텐데.

엔리케!

나는 멀리서부터 외치며 집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이 대피하다 나를 잡아챘다. 나는 대피 장소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놔요, 저 쪽에 우리 집이 있어요, 아들이 아직 집에 있을거에요,

사람들은 대피소에 이미 가있을거라며 대피소에서 아들을 찾으라고 날 끌고갔다. 푸른 눈빛이 일렁이는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괴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골목에서 엔리케가 튀어나왔다. 나는 팔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디어, 저 좀…….

어지러웠다. 나는 작전 테이블로 쓰는 낡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많이 안 좋나?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디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머리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비강에서 녹슨 물 냄새가 났다. 우리 마을은 수도 시설이 낡아서 쇳물이 나온 다음에야 맑은 물이 나왔다. 나는 부모님께 물어봤다.

수도를 갈면 안되나요?

부모님은 슬프게 웃었다. 가끔은 해야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고.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냥 어디 가서 관을 사온 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수도를 갈면 안되는 것인가. 물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나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언젠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북돋는 시간이 올까. 내 손은 엔리케에게 닿지 못했다. 엔리케는 점점 멀어져갔다. 짐승처럼 도살당했다. 나는 대피소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그 때의 기억이 없다.

사랍.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내가 일어나 앉자 디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처를 옮겨보는 것이 어떤가?

싫어요!

디어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으니 그럴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때로는 흔적을 뒤로하고…….

당신이 뭘 안다고, 당신이 뭘 잃어봤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해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고 날카롭게 튀어나와 나는 놀라 입을 막았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손을 입에서 떼고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디어는 사과를 듣고도 한참 말이 없더니,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도 무언가를 잃어본 적 있으니까. 자세히 말 할 수는 없네만…….

엔리케가 보고싶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의 이사는 결정되었다. 디어와 다른 사람들이 도와 엔리케와 살던 집을 비웠다. 아들의 물건을 정리하다 휘청거리며 오열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용케 졸도하진 않았다. 막바지가 되어선 울다가 너무 지쳐 집주인이면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짐이였다. 넋을 빼놓고 앉아있는 내 곁을 디어가 지켰다.

정말로 상처가 치료될까요? 집을 옮기면?

내가 물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디어는 잠시 생각했다.

일단 출근은 쉬워졌다는데 의의를 두세.

아르튀르 랭보는 다른 삶은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을 잃고 나는, 그것이 가능할거라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렇게 믿어야지 친지도 없이 홀로 세상에 버려진 내 삶을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 광활한 우주에서 배를 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고 믿으며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온 몸을 투신했노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만나고 더 이상 정신을 잃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맨정신으로 아들에게 갈거에요.

그 때 새벽제비는 뭐라고 답해야했을까. 무슨 답을 하던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계획은 차질이 없도록 다 마련해두었으니, 이제 나만 결심을 하면 됐다. 광활한 우주에서 배를 젓는 것도 좋지만, 배 밑의 별바다로 헤엄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