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다
최비연 (@paranoiri) 글 커미션 작업물
찬란한 바다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는 잡히는 대로 사람을 쥐어 터뜨려 그 피를 묻혀야 하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마저도 살인자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꿈이었던 걸까. 총 끝이 향한 대상은 언제나 악이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되뇌다, 결국 긴 밤이 끝나고 몽롱한 정신으로 깨어 있는 순간이 오면 총구를 자기 머리에 들이대고 한참을 떨고야 말았다.
바다에 가자, 이 일만 끝나면 바다로 가자. 하늘을 비추어 새파랗고 태양을 머금어 찬란한 바다로 가자. 세상이 품은 물 가운데 가장 넓고도 깊은, 그곳에 뛰어들 수만 있다면 나는.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바다는 검게 얼었고, 꿈을 품던 청년은 없다. 남은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날의 쓸쓸하고 쓸쓸한 파편뿐이다.
“손 줘 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검게 그은 피부가 붓 자국의 모양으로 찢어져 있었다.
“미뤄서 더 좋을 것도 없어, 손.”
“가볍게 긁힌 것뿐입니다.”
흐음, 벙커의 의료를 담당하는 책임자, 오스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청년의 말대로라면 반창고 몇 조각으로 회복될 상처여야 했다. 오스티아는 한참 동안 청년의 까무잡잡한 손을 붙들고 돌려가며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의료 책임자가 내린 결론은 청년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꿰매야겠는데.”
오스티아가 의무실의 한편으로 향했다. 온갖 의료 도구들이 꼼꼼하게 정리된 가운데, 졸면서 남긴 듯한 메모도 몇 장 보였다. 그 정도인가. 청년이 속으로 읊조렸다. 약품도 제대로 없는 이곳에서 부분 마취가 잘 이루어지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그래, 이 침침한 공간은 지구가 아니다. 은하계 외딴곳, 꽁꽁 얼어붙은 행성에 존재하는 벙커. 외투 없이 바깥으로 나가면 삽시간에 살이 얼어붙고 외계인이라고 규정하기에도 애매한 생명체들이 떠돌아다니는 곳이다. 청년의 의심 어린 눈길을 의식한 듯 오스티아가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수술용 도구 대신 갈색 병에 담긴 피로회복제를 하나 들고, 오스티아가 청년의 곁에 앉았다. 이제 보니 의무실 한쪽에 유리문으로 된 조그마한 냉장고가 보였다. 청년은 살짝 몸을 뒤틀어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온통 피로회복제에 커피였다.
“먹어. 물론 이따가.”
오스티아는 청년의 멀쩡한 손에 피로회복제를 쥐여주려 했다. 청년이 한사코 거부하자, 그녀는 잔잔한 미소가 띄워진 얼굴을 움직여 눈썹을 까딱하더니 피로회복제를 청년의 곁에 놓아두었다.
“어쩌다 그랬어.”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약간의 경계와 약간의 떨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십니다. 이런 곳에서… 저희를 살려주시는 일이 당신에게 무슨 이득입니까?”
오스티아는 대답 대신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한 보라색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청년이 눈을 피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 내게는 힘이 있으니까… 도울 수 있는 만큼은 도와야지.”
오스티아의 손이 청년의 상처에 가 닿았다. 피가 묻어났어야 했을 자리에서 지직하고 보랏빛의 사각형이 나타났다. 사각형, 사각형, 그리고 또 사각형. 수십 개의 탁한 사각형들이 상처를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 반투명함 너머에서 상처가 오래된 텔레비전 화면처럼 요동치더니, 이내 사각형의 파동이 가라앉자 깔끔하게 사라졌다. 꿰매야 한다던 깊은 자국은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손 자체가 상처를 입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청년은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꾹 눌렀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으응…”
조금 피곤했던지, 오스티아가 말끝을 흐렸다. 냉장고와 그녀를 번갈아 보던 청년이 잠시 눈 좀 붙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오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아직 버틸 수 있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뚝뚝한 어조에 걱정이 묻어났다. 오스티아가 눈을 살짝 굴려 청년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항상 그랬다. 오가며 몇 마디씩 툭툭 던져놓는 사이인데도 의무실을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았다. 상처를 입었을 때도 자가 치료를 하거나 숨기기 급급했다. 분명 그를 말하게 하는 원동력은 걱정에 가까웠는데, 말의 내용은 놀랍도록 건조했고 신경 쓰지 말라는 생각을 내포했다. 아니, 그건 부탁에 더 가까웠다. 제발 나를 신경 쓰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
“너는…”
오스티아가 운을 떼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의료 담당자로서 너에게 못 해준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피할 이유가 있어?”
청년이 작게 읊조렸다.
“바다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으음, 그랬던가. 기억이 없네.”
“저는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지구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곳에서 눈을 떠버렸습니다. 이곳의 바다는… 검게 얼어 있습니다.”
연관이 없는 듯한 문장 넷이 손을 잡고 차례대로 튀어나왔다. 청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변을 들쑤시는 이유가 그거야? 이곳의 진실을 아는 거?”
“정확한 진실에 대해서는 책임자님도 모르고 계신다는 것, 압니다. 괴물로 들끓는 이곳을 탐사하는 게 소름 끼치도록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요. 목숨 내놓는 일은 익숙합니다. 다만…”
캄캄하게 얼어붙은 의무실. 청년의 목소리도 주변 환경만큼이나 차가웠지만,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당신을 가까이하면 바다에 함께 가고 싶어질까 그렇습니다.”
오스티아가 말에 내포된 의도를 읽기도 전에, 청년은 의무실을 떠났다. 피로회복제도 챙기지 않은 채로 급하게.
청년은 어느 정도 안다. 오스티아의 능력은 기억을 대가로 한다. 그녀가 한번 잠들면 이전의 모든 것은 잊혀 끝없는 망각 속에서 사라진다.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할 사람의 따스한 온정은 그 온기만큼이나 고통스러워 데일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을 가까이한 얼음처럼 속절없이 녹아버리고야 마는 것이 그였다.
바다에 가자, 나와 함께 바다에 가자. 달콤한 대사를 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날 중얼거려 봐야 그녀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고, 닿았다 한들 최후에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뿐일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아픔이 퇴색될 때까지 묻어두고 언젠가는 이루지 못한 꿈들의 틈새에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
다만 그는 잊지 못했다. 그라는 사람의 인격이 존재하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이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 온기란 쉬이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온기를 준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그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바다는 검고 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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