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특강 독서 지문과 꿈의 해석 편
2024. 2. 19. 오늘 읽을 만한 글
펜 딸깍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는 학교 자습실, 나는 방학에도 꼬박꼬박 출석을 나오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공부 중 쉬는 시간을 아이패드에 설정해두고 짬짬이 글을 적고 있노라면 고 3 아직 할 만 한데? 싶다가도 이렇게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해이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반증 같다. 아니라고 변명할 거리도 없어서 더 짜증이 난다.
공부 습관이 덜 든 탓이라고 서투르게 변명해 본다. 이실직고하자면 나는 중 3 2학기 때부터 공부에 손을 놓은 사람이다. 그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끝도 없이 길고 우울해지는데다 내 실명과 얼굴을 아는 주변인들마저 8할은 모르는 이야기까지 치고 내려가야 하니, 대강 죽다 살아났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엄마는 내가 약한 사람이랬다. 지금보다 더 큰 시련이 밀려오면 그냥 쓰러져 버릴 애라고. 맞는 말인 것도 같다.
그래도 허투루 놀지만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기술을 몇 개 배워서 고입 직전이었던가 취직도 한 번 됐었다. 거의 아르바이트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 당시의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죄송함에 빠르게 그만두었다. (다만 그때 그만둔 곳이 엄청나게 성장해버려서 가끔 땅을 치고 후회도 한다.)
갑갑하다. 이 공간에서는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도 신경쓰이는 일이고 펜을 세 번 이상 딸깍이면 중범죄다. 하늘에 지독히 낀 먹구름이 오전 아홉 시를 밤 아홉 시로 보이게 만든다. 뭐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개학하면 오전 아홉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종일 이 건물에 죽치고 있을 테니. 제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헬리콥터 착륙하는 소리로 들린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장에 나와 있으면 머리 위로 그렇게 헬리콥터가 지나갔더란다.
슬슬 스케쥴러를 펼쳐본다. 종이 위에 털퍽 주저앉은 시간표의 네모 칸 한 개 반 정도가 형광펜으로 꼼꼼히 칠해져 있다. 몇 번 안 그은 것 같은데 노란색이 선명한 게 단무지 저리가라다. 역시 열 자루에 이천 원 하는 다이소 형광펜이랑 한 자루에 이천 원 하는 서점 문방구 형광펜이랑은 다르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다가 지금 문제집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내 신세가 다이소 형광펜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컨디션이 바닥, 최하, 나락이다. 이는 단순히 오늘 새벽 세 시에 일어났기 때문만은 아니고 다만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어지럼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험생이라면 어련히 거쳐갈 무언가이거나 보기 흉한 수능특강 표지와 눈을 마주친 후유증이리라 짐작하고서 무던하게 넘기는 연습을 하고 있다.
비문학 문제를 풀었다. 푸는 시간도 결과도 썩 나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지만, 주관적으로는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거창한 대학을 노리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 내 주제에. 어디라도 붙여만 주신다면 교문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을.
아무튼 첫 번째 지문을 읽는데 독서를 즐기는 나로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발췌했다. 지문은 개인에게 적절한 책을 선정하는 전략에 대한 내용으로, 우츠와 웨드윅이라는 사람들이 제안한 ‘북매치’ 방식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북매치는 9가지 책 선정 요소로 나뉜다.
- 책의 길이 (Book length). 독자가 읽기에 적합한 책의 분량.
- 언어의 친숙성 (Ordinary language) 글의 의미가 이해되는 것과 관련.
- 글의 구조 (Organization) 역시 글의 의미가 이해되는 것과 관련.
- 책에 대한 선행 지식 (Knowledge prior to book) 주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과 관련.
- 다룰 만한 텍스트 (Manageable text) 책에 사용된 단어의 수준과 관련.
- 장르에 대한 관심 (Appeal to genre) 독자의 선호도와 관련.
- 주제 적합성 (Topic appropriate) 주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과 관련 두 번째.
- 연관 (Connection) 책을 보고 어떤 내용이나 인물을 독자가 떠올릴 수 있는지.
- 높은 흥미 (High-Interest) 책의 내용에 대한 흥미.
이를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북매치(BOOKMATCH) 가 된다니, 이름 참 잘 지었구나 싶다. 북매치 전략에서 독자는 위 9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책을 점검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책을 선정한다. 상기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독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독서에 성공함으로서 다음 독서에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된다. 일찍이 이 내용을 알았더라면, 싶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끝판왕을 잡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최근 어떤 계기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의 ‘꿈의 해석’에 도전한 적이 있다. 흥미를 이유로 수강했던 고전 읽기 수업 시간에 다룬 책인데, 두께도 난이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고전 읽기 과목을 그렇게 도전했듯 꿈의 해석에도 가벼운 마음이었고 완독에 처참히 실패했다.
전체 책 800페이지 중 내가 읽은 분량은 236쪽. 내 수준을 과대평가한 탓이다. 하루에 어린이 책을 몇 권씩 삼키다시피 하고 마음에 썩 들지 않아도 되풀이해가며 읽었던 초등학생 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래도 그 책에서 얻어 간 것은 있다. 프로이트 박사의 문체, 특히 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문체다.
프로이트 박사는 꿈을 해석할 때 특이한 기법을 사용한다. 꿈에서 수능특강을 구입하러 서점에 갔다가, 수능특강이 없어 다른 책을 사들고 돌아왔다고 쳐보자. 프로이트 박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꿈은 아무리 모호하더라도 결국에는 소원 성취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나의 저러한 꿈은 못생긴 수능특강을 구입하고 싶지 않았던, 혹은 입시 자체를 피하고 싶었던 소원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꿈은 때때로 여러 개의 소원을 동시에 이루어주기도 한다. 전부 해석하기 위해서는 꿈을 가만히 곱씹으며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조합해야 한다. 박사는 자신의 꿈을 직접 해석하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꿈은 그 전날의 체험에서 근거한다. 내가 저러한 꿈을 꿨다면 전날에 수능특강을 구입했을 수 있다. 프로이트 박사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늘어놓는 그의 하루 체험은 어딘지 모르게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하나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다른 사고로 전환되며 페이지를 수놓는 과정에서 나는 매력을 느꼈고, 그 결과 어지럼증을 피하기 위해 휴식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장문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지럽다. 여기가 차 안이었다면 멀미로 규정했을 것이다. 다만 이곳은 학교이므로 의자가 흔들리는 탓이거나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일 수 있다.
역시 머리를 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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