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에 로터스] 은혜와 은총의 차이


은총과 은혜라 이 얼마나 다른 말인가?

 

“아그네스 D. 파버. 너의 핏줄의 영예를 잊지 마라.”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가?

 

“먼 방계라고 해도, 우리의 선조는 황족이란다.”

 

 

귀족과 평민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그 핏줄에 흐르는 역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귀족들은 자신의 선조가 일궈낸 모든 영예를 기억할 테니.

 

다만, 내가 속한 ‘파버’는 그 정도가 심했다. 현 황제가 기억한다면 그것이 신기할 정도로 먼 방계인 파버는 남은 것이라고는 밀빛 금발밖에 없는 주제에 콧대가 높았다.

그렇게 최고가 아니면 취급하지 않던 파버는 비루한 준남작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릭시온 윌슨은 그 비루먹은 준남작이었다.

 

본래 약혼자가 있었던 어머니를 꾀어낸 남자, 어머니의 본래 약혼자는 고고하기로 유명한 로터스가의 후계자라고 하였다.

이제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이 남자와 같은 먼지 같은 회색이 아닌 서부에서만 나는 푸른 백합과 같은 찬란한 머리색의 남자였다고.

나의 첫 살인이자

언제나 신사답고, 자식을 때리지 않으며, 음주를 즐기지 않는 고귀한 귀족.

황금빛으로 빛났을 나의 일대기.

 내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완벽한 아버지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지만, 그랬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로터스는 나의 꿈이었다.

 

리아트 A. 일리야. 일리야 백작가의 장녀. 자애로운 성품과 뛰어난 외모로 유명했던 사교계의 인사. 로터스 백작부인은 스스로도 빛을 낼 수 있는 이였다. 파버와는 달리 밤하늘의 별처럼 빛이 났다. 아들 하나를 그것도 결혼한 지 몇 년 만에 낳았는데도 그 누구도 로터스 부인을 무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들을 조사하며 불공평함을 느꼈다.

 

어째서, 나의 인생만 이리도 처참한가에 대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차피 떨어질 나락, 별 하나 더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남편을 다시 꾀어내는 것.

샬로메 로터스를 꾀어내기는 무척이나 쉬웠다. 어머니가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하며 다가가자 그는 바로 마음 한 편을 내주었다. 지나치게 쉬운 일들에 허무함마저 들었지만, 친절한 그의 행동과 정부를 허락하겠다는 로터스 후작부인의 말에 괜히 빈정이 상했다.

 

내가 원하는 건 리아트 A. 로터스와 그녀의 아들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였으니까.

 

그녀의 아들들은 아주 어렸고, 그 중에 한 명은 머저리 같게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 황족이야?”

“저리 꺼져.”

 

그 중에서 큰 놈은 계속 내 앞에 얼쩡거렸다.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되는 듯이 내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머저리처럼 굴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머저리처럼 구는 동안에도 나는 꾸준히 리아트 후작부인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 내 어미는 이미 정부에 만족한 것 같았으므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아그네스.”

“또, 뭐야?”

“너, 어머니 음식에 독 넣었지.”

“······.”

 

그걸 이 머저리가 어떻게 알아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셔.”

“...무슨 소리야? 알면서도 독을 먹고 있다고?”

“아니, 독은 섭취하지 않고 계시지.”

“저리 비켜.”

 

그의 어깨를 밀치자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그만 둬, 아그네스.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돼?”

“이대로? 너는 아들로 받아들여졌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 펜틸!”

“그런 게 아니고 난······.”

“그게 아니면?”

“어머니는 이미······.”

“그만!”

 

어머니, 어머니 지긋지긋했다. 하녀의 출생인 주제에 고고한 은발이 눈에 너무 거슬렸다. 후작부인의 진짜 친 아들이라도 된 듯 구는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겠다는 그 눈빛이

“네 말 알아들었어.”

“...! 아그네스.”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이걸, 부인의 차에 넣어줘. 로젤리아 풀이야. 차의 향기를 돋우곤 하지. 너도 이 정도는 알지? 후작부인도 분명 널 칭찬하실 거야.”

“이건······.”

“왜, 이 정도도 못해줘?”

거슬렸다.

펜틸은 그 풀을 가지고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그 뒤의 일들은 쉬웠다. 펜틸의 말이 거짓이었는지, 후작부인의 몸에서는 꽤 오랫동안 독을 섭취하고 있었던 흔적이 나타났다고 했다.

 

“거짓말쟁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후작부인의 장례식장에서 후작은 제 아들들을 챙기지 않고 세상이 무너진 듯 울었다.

사실 후작부부 관계는 멀쩡했고,

아직 어린 아이도 제 어미가 죽은 걸 아는지 어머니를 찾으며 울었다.

후작부인의 몸이 무척이나 약해져 있어,

그 장례식에서 웃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정부도, 나도 허용했고, 죄책감을 가질 제 아이를 위해 사인을 숨겼다는 것을.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살인이었다.

그녀가 먹은 독은 오직 하나, 제 아들이 준 로젤리아 풀 뿐.

후작 부인이 죽고 난 후, 집안의 사람들은 우리를 벌레 보듯이 보았다. 그들의 주인을 죽인 것이 나라는 것을 안다는 양, 항상 다정하게 굴던 유모도 둘에게서 나를 떼어놓았다. 물론,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래보았자 이제 사실상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고, 난 이 집안의 장녀였으니까.

 

“무슨 소리냐?”

 

그런데, 일은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네가 왜 로터스의 이름을 잇지?”

 

샬로메 로터스는 정말 의문이라는 듯 내게 되물었다. 이제 후작부인이 될 어머니의 자식이니 로터스의 이름을 달라는 내 앞에서.

 

“내가 너에게 로터스의 이름을 내릴 일은 없다. 후계자 자리를 흔드는 일을 할 수는 없지.”

 

내 꿈은 그렇게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었다.

 

“내 자식은 오직 리아트와의 자식 하나 뿐이야.”

 

아주 확실하게.

 

리아트 A. 로터스. 그녀는 죽은 이후에도 나를 괴롭혔다. 아침에는 얼음이 잔뜩 든 세숫물이 나오고, 로터스家 사람들과 먹지 않는 만찬에는 푸석한 빵과 상한 스튜가 나왔다. 하녀들은 내가 지나가면 수군거렸고, 그 누구도 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리아트 A. 로터스가 죽은 이후로 시작되었다.

 

“후작부인이 그동안 보살핀 것도 모르고... 이래서, 천한 핏줄이란...”

 

그들의 수군거림에도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다녔다. 이 집안의 장녀로 군림하기 위하여.

 

나는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했다.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죽여서라도.

세 번째 살인의 결심은 쉬웠다.

그걸 말린 것은 또 다시 펜틸이었다.

 

“아그네스, 그만 둬.”

“너도 다를 거 없잖아?”

 

그 때쯤의 펜틸은 루미에와 사이가 멀어져 있었다. 루미에의 첫 방학식. 나는 용병을 하나 의뢰해서 호위로 데리고 다니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루미에는 몰랐다. 아니 그 아이는 아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제 어미가 어찌 죽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죽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호의적인지도.

제 어머니를 닮아 영리하고 아름다운 내 동생 루미에.

 “아그네스!”

“이게 내가 사는 방법이야.”

이제 이별을 고해야할 때로구나.

오랜만에 만난 본가에서 펜틸과의 다툼 후, 펜틸은 나가 버렸고 나는 암살자를 불러들였다.

그 뒤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

제 일부를 잃은 루미에는 드디어 제 적을 알아 본 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랑 속에서 루미에 홀로 살아남았다.

마치 어린 새끼 동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보며 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그런 때도 있었다.

나는 루미에가 내 밑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돌아 온 그를 보기 전까지는.

 

16살의 루미에는 샬로메 후작을 더 닮아있었다. 이미 독은 통하지 않았고, 상업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 얻어냈다.

17살의 루미에는 리아트 후작부인을 떠올리게 하였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충성을 하였고, 그의 말이라면 죽기라도 할 셈으로 보였다.

18살의 루미에는 이미 고고한 한 송이의 푸른 백합이었고, 19살의 루미에는 내가 모르는 인맥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으며, 20살의 루미에는 내 팔다리를 잘랐고, 21살의 루미에는 펜틸을 죽였다.

 

그래, 그는 허무하게도 제가 사랑하는 동생의 손에 가버렸다.

 

나를 사랑했다면서 나에게 처음도 끝도 주지 않은 채 바보같이 스스로 스러졌다.

 

저 멀리 말에서 떨어지는 펜틸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커튼을 쳤다. 그 사람의 마지막은 보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바보같이 죽긴.”

“글쎄요, 은혜를 안다고 하는 게 맞는 거죠.”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형식상 동생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미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니?”

“혹시 누님도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 해서 와봤습니다만, 헛수고였군요.”

“왜, 나도 저리 죽이려고?”

 

내 말에 루미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그리 잔인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흐응.”

 

그래. 아마 죽이면, 난 더 잔인하게 죽일 것이다. 내가 제 유모와 호위 기사들을 눈앞에서 죽였으니.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팔다리는 이미 잘려있었고, 나에게 남은 건 광산업으로 시작한 보석 산업뿐이었으니까, 그 마저도 루미에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아야할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루미에는 약혼식을 올렸고, 유명 인사들을 제 약혼식에 초대했다.

 

나는 여러모로 끝에 몰려 있었지만, 그 아이는 이제 막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머리가 아파서,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해버렸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

 

벨을 울리고, 수면초를 부탁한 일.

 

최소한 펜틸이 살아 있었을 때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까?

 

이미 죽어버린 그에게는 묻지 못할 일이다.

 

나의 죽음은.

 

숨이 막히기에 눈을 떴을 때에는 어스름한 푸른빛이 방 안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베개로 내 얼굴을 꾹 누르고 있었다.

 

“야, 어떡해? 깼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면초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해봤지만 뒤늦게 도는 감각은 이미 손발이 결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람으로.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나의 죽음을 장식하고 있었다.

 

“젠장! 끝까지 골치 아프게 하는 군. 도련님은 모르게 해야 해.”

“완전히 정신 차리기 전에 조용히 죽여.”

 

숨이 다시 막혀 온다.

 

“그러게, 부인을 죽이고 도련님을 괴롭히지는 말았어야지.”

 

아, 이제는 알 것 같다. 이들은 이 집안의 사용인들이었다.

 

“주인님의 명령이시다. 너도 얌전히 죽어.”

“네 용병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야.”

 

발버둥을 쳐봤자, 수면 하나도 울리지 못한 채, 나는 그렇게 죽어갔다.

 

“모든 것은, 은혜의 총아를 위하여.”

 

그 언젠가 내가 죽이려고 했던 푸른 백합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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