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마리] 황금빛 노을에는

“항상 감사합니다.”

 

수녀님의 인사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전부, 신의 뜻인 것을요.”

 

내 말에 그녀는 성호를 그은 뒤, 미소를 짓고 나를 건물 밖으로 배웅하였다. 건물 밖은 벌써 태양이 서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고, 운동장 어딘 가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따라 나왔던 수녀님이 말했다.

 

“참, 좋으신 분이시죠.”

 

그 뒤로도 그녀는 그에 대하여 무언가 칭찬을 더 말하였지만, 내 시선은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을 잊은 듯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야기가 끝을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저를 쳐다보고 있던 시선들을 눈치챈 것인지 목소리가 뚝 끊기며 그는 우리 쪽으로 시선을 마주해왔다.

 

“같이, 가실래요?”

 

습관,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심이었을까. 내 입에서 멋대로 나온 친절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요.”

 

그가 지나가는 발자국 뒤로 황금색의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날렸다.

 

내가 봉사를 다니는 곳은, 천주교 교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조금 외진 곳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약 30분을 걸어야 하는 곳이라, 학교에서 오는 이들 외엔 또래 사람을 볼 일이 드물었는데, 그는 그 몇 없는 또래 중에서도 더 보기 힘든, 같은 나이대의 여자아이였다. 그의 이름은, 마리아. 마리아 W 화이트 우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성모와 같은 이름이네. 딱 그 정도의 생각만 들었었다. 그야, 그 이상의 생각이 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수녀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 텅 빈 운동장에서 마리아를 기다렸다. 이제 가을이 오려는지, 차가운 바람이 슬쩍 피부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곧 입김도 나려나, 그와 나는 그때까지도 아는 사이일까?

 

잠시 후, 마리아가 미안해 보이는 얼굴로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제가 너무 늦었죠?”

“아뇨. 괜찮아요.”

 

마리아와 나는 서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앞으로 걸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약 30분. 함께 있는 곳의 산소마저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죄악감이 들었다. 우리의 양옆으로 난 밀밭의 초록빛이 마지막으로 흩뿌리는 태양 빛을 받아 황금으로 보이고, 마리아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오렌지빛에 물들었다. 자꾸 엇박자로 뛰는 심장 탓에, 잘못 나아가는 손발을 의식적으로 흔들며 천천히 걷자, 마리아의 발걸음도 덩달아서 늦춰졌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의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묵직한 공기가 우리를 가로질러 갔다. 나는 애써 모르는 척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고 웃었다. 그는, 내 웃음에 시선을 피했다.

그 사이에 태양은 아예 넘어가고 잘 익었던 밀이, 까만 물감에 하얗게 질려갔다. 우리는 딱 그만큼 달랐다. 너는 잘 익은 황금빛 밀밭이었고, 나는 추수를 잊은 밀밭의 밀이었다. 같은 시간을, 공간을 공유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한순간 뿐일 것임을 나는 알았다. 이제 막 추수 때를 기다리는 황금색 밀밭의 밀의 미래와 추수 때가 지난 밀밭의 밀의 미래는 다르니까. 무엇으로 끝날지 모르는 너와 이미 끝이 정해진 나는 달랐다. 잠시 멈춰 선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멈춰 서 있었던 내 앞으로 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태양이 져 버린 하늘에 황금빛 햇살이 흩날리며 비춘다. 내, 어찌 거기에 입 맞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입술에 닿는 햇살에, 닿지 못할 입맞춤을 허공에 내버렸다. 그 순간 우리를 지나치는 차갑지 않은 바람을, 나는 살이 에워싸는 바람이길 바랐다. 나는 그 바람도 너와 함께 맞이하기를 바랐었나 보다. 불확실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때, 네가 뒤를 돌아 멈춰 서 있는 나를 보았을 때, 그런 나에게 늦겠다며 손을 내미는 너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아. 사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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