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영결永訣

크로커다일 + 흰수염 / 크로커다일 과거 날조

원피스 by 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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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그래. 믿을 것이 못 된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위해 움직인다.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다.

당신이라고 예외일 것 같나? 아들? 가족? 웃기는 소리. 그런 걸 진짜로 믿을 만큼 순진한 남자일 줄은 몰랐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단지 당신이 강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압도적인 힘이 약해지는 날에는 당신도 현실을 알게 되겠지. 믿음은 무가치하다. 당신이 가족이라고 부르는 저 머저리들도 결국은 당신을 배신하게 될 거야.

장담하지, 흰 수염. 당신은 당신의 믿음으로 인해 몰락할 거다.

들끓는 저주의 말을 쏟아부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그런데도 자신이 뱉었던 그 말들, 그리고... 그런 저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만은 선명하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잠을 설치시는 것 같던데."

"...아아."

다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크로커다일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대답을 돌려주며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 말대로 그는 최근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임펠 다운에서 탈옥한 이후로 줄곧 그랬다.

계기는 분명하다. 원인 또한 잘 알고 있다. 정상전쟁, 이라고 불리우는 초유의 대사건. 그날 마린포드에서부터 따라붙은 옛 망령이 아직 크로커다일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매일 같이 기억 저편에 잠들어 있던 영락한 과거의 잔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사고가 불러일으키는 소란한 꿈이 불면의 밤을 반복게 했다.

사실은 그래. 꿈이 아니라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나날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이를테면 그에게 손 내밀던 사내의 눈부신 미소 따위의,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지금과 달리 턱없이 어리고 무모하던 시절의 자신에게 있어 가장 빛나 보였던 이가 바로 그 사내, 얼마 전 시대와 함께 저물고 만 그 남자라는 것을 크로커다일은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정말이지 어리석었다. 제 손으로 목을 거둔 옛 동료들의 곁에 두고 온 왼손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도 전에 칠무해의 칭호를 얻은 그는 오만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뼈저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독이 바짝 올라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강박과 아집에 사로잡힌 건방진 애송이. 그게 크로커다일이었다.

내 아들이 돼라.

그 말이 그토록 역겹게, 그리고 달콤하게 느껴졌던 건 그 때문이었을 터다. 흰 수염은 변함없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였으나 그가 가진 강력한 힘과 흔들림 없는 신념은 설익은 어린애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가족이니 믿음이니 하는 소꿉놀이마저도 선망하게 될 만큼, 흰 수염이라는 사내는 커다랗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 남자의 꿈은 진정 허상에 불과했다. 끝내 흰고래의 등에서 도망치면서 크로커다일이 내뱉은 저주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날에 비하면 턱없이 약해진 사내는 제 아들이라는 멍청이의 칼을 피하지도 못했다. 그깟 얄팍한 이간질만으로 깨어지고 말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신뢰라는 것은. 한 순간 뿐이라지만 동경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허망하고 무가치한 것.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흰 수염이 아닌 해군에게 칼 끝을 돌린 건 어째서였을까. 제 아들이라고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해 수없는 '자식'들을 잃고 자신 또한 형편없이 난도질당해 죽은 사내의 시신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크로커다일은 차마 웃지 못했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잖아, 흰 수염. 당신이 틀렸어. 결국 당신의 그 믿음이, 가족이 당신을 몰락시킨 꼴을 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다만 조금 숨이 막혀서 꽉 조여진 크라바트를 풀어헤쳐야만 했던 기억이 난다. 무너진 마린포드의 잔해가 일으킨 분진 탓일까. 가슴이 답답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배달된 '검은 수염'의 갱신된 수배서를 보고 나서야 크로커다일은 그것이 분노였으리라고 자각할 수 있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호하다. 흰 수염? 티치? 해군? 혹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결국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받았음에도 그가 결코 즐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웃음조차도 짓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떠오른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허탈감이다. 오랜 기간 그를 좀먹어온 공허와 닮은 꺼림칙한 감각.

그가 밤마다 먼지 쌓인 추억의 면면들을 마주하는 것은 모두 그 탓이다. 바로 얼마 전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그러나 그보다 한참 앳된 얼굴을 한 그들은 여전히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의외인 점은, 그 꿈에서 흰 수염의 모습은 그리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보이는 건 제 선장을 닮은 얼빠진 머저리들이다. 흰 수염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뒤 그 배에서 보낸 몇 주간 크로커다일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흰 수염의 자식'들.

'불사조'보다 마르코가, '화검'보다 비스타가 익숙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했다는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다. 적어도 향수를 느낄 만큼의 호의는 있었으리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이들에게 휩쓸리는 건 꿈이라도 피곤한 일이다.

더욱이, 전날 꾸었던 꿈은 개중에서도 질이 나빴다. 어쩌면 얼마 전 전달받은 우편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흰 수염이 묻힌 곳 따위를 제게 알리는 이유가 뭔지 그로서는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제 아비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머리였다. 이쯤 되면 차라리 감탄스러울 지경이라고, 크로커다일은 진력이 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소식이 그의 안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지명과 함께 짤막한 부고 문구가 적힌 종이는 순식간에 한 줌도 되지 않는 모래알로 화했으나 저도 모르게 해도로 향하는 눈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선이 닿는 지점은 당연하게도 흰 수염의 고향섬이자, 이제는 그의 무덤이 되었다는 섬이었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흰 수염과 얽혀서 저답게 굴 수 있던 적이 언제는 있었던가.

그렇다고 애도니 뭐니, 같잖은 흉내를 낼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크로커다일은 그저 서재 안에 비치되어 있던 모든 해도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내심 비웃으며 잠에 든 것이 고작 한나절 전의 일이다.

그 밤의 꿈에는 간만에 흰 수염이 등장했다. 그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사내의 주변에는 크로커다일과 안면이 있는 대부분의 선원들- 심지어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애송이마저 있었다. 그의 꿈은 늘 과거의 기억을 재연하는 데에 그치곤 했으므로, 임펠 다운에 갇혀 있을 적에 짧게 대화를 나눈 것이 인연의 전부일 상대를 마주하게 된 건 상당히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다른 선원들의 모습에도 위화감은 있었다. 언제나 20여 년 전, 크로커다일이 모비딕에 머무르던 시절에 멈추어 있던 그들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는 듯한 외향으로 변해있었다. 익숙하기만 하던 배의 갑판은 이제 낯설기만 한 장소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 풍경은 여전히 기이하리만치 생생했다.

갑판 위의 소음이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그는 어쩐지 멍한 기분으로 언제나와 같이 정신 없는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응시했다. 소란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그늘 아래에 숨은 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기에, 누군가 크로커다일을 찾은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여, 크로커다일."

지난 며칠간 반복되었던 꿈속에서 들어보지 못한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익숙한 듯 생경한 얼굴이 보였다. 간간히 갱신된 수배서에서 본 기억이 있음에도 20여 년전의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은 앳된 청년. 그는 음식이 가득 든 커다란 접시를 양손에 들고 웃는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삿치."

"뭘 그리 멀뚱히 서 있어? 벌써 지친 거야?"

친밀한 관계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귀찮게 여겼던 기억이 났다. 몇 번을 거절해도 넉살 좋게 음식을 건네던 요리사. 그저 그 뿐이었다. 4번 대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전쟁 중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의 행방을 알게 된 뒤에도 형편 없는 최후라고 이죽거린 게 전부일 만큼 아무런 의미도 없을 남자. 하지만 어쩐지 목이 메인 듯 답이 나오지 않았다. 크로커다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젓고 갑판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삿치를 뒤따랐다.

삿치가 그릇을 내려놓은 곳은 흰 수염의 앞이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면면들과, 불주먹이 함께 있었다. 떠밀리듯이 그 사이에 낀 크로커다일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지켜봤다. 정말이지 생생한 광경이었다. 문득 꿈이 아닌 현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자, 빼지 말고 한 잔 더 하자고! 이번에 이스트블루 산 술이 잔뜩 들어왔거든."

"그러다 또 갑판에 토하지나 마요이."

"내가 언제 토했다고 그래! 너야말로 저번에 수영하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었던 주제에!"

이제는 거물이 되어버린 이들이 어린애처럼 날뛰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그는 몇 번인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거나,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꿈의 의미도,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 수 없는 주제에 단지 흘러가는 대로 어울렸다.

정신이 든 것은 연회가 끝물에 다다르고 모두가 술에 취해 나가떨어졌을 무렵이었다. 크로커다일은 문득 자신을 내려보는 흰 수염과 눈을 마주쳤다.

"정말 배웅해주지 않을 셈이냐?"

아직 긴 금발이 남아있던 시절의 사내는 그러나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흰 수염은 이미 죽었고 꿈은 단지 제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크로커다일은 잘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그런 꿈을 꾸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사고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문은 껄끄러운 존재감을 보이며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그 결과, 한심하게도 부하에게까지 이상을 들켜버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간 자신이 느낀 것은 명백한 애상이고, 향수였다. 이것을 애도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크로커다일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즈, 배를 띄워라.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예, 보스."

함께 하려는 다즈를 돌려보내고 홀로 크지 않은 배에 몸을 실은 크로커다일은 지침 대신 하늘과 파도만을 보며 배를 몰았다. 항해는 길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신세계에서 해일이 몰아치는 난폭한 해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나운 비바람이 금방이라도 배를 뒤집을 듯 달려드는 한 가운데에서, 그는 배를 멈추어 세웠다.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적셨다. 강풍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이 눈을 가리고, 품에 안긴 꽃다발은 금세 초라한 꽃잎 덩어리로 전락했다. 악마의 열매를 먹지 않았더라도 불쾌하게 여겨졌을 날씨다. 모래 인간이 된 뒤로 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조차 잘 하지 않던 크로커다일에게는 더욱 끔찍하게 느껴질 날씨임에도 그는 갑판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꽃다발을 조금씩 모래로 말려 날려 보냈다.

사내가 묻혔다던 스핑크스 섬과는 아마 가깝지도 않을 장소였으나 크로커다일은 이곳이야말로 진정 흰 수염이 잠들 무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지의 무덤 따위를 찾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어리석고 한심한 사내라고 하나 이 바다의 주인이었던 자다. 그런 이가 땅 위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을 리 있겠는가. 그저 남겨진 자들이 위안을 받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을 장소에 발을 디디고 싶지는 않았다.

"하, 나도 늙었나 보군."

쓸데없이 감상적이 된 자신이 기막히게마저 느껴진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가를 매만졌다.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수다스러워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듣는 이도 없는 자리다. 이왕 바보 같은 짓을 한 김에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겠지. 크로커다일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사내를 생각했다.

그 날, 흰 수염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단순한 고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십수 년이 걸렸다. 당시의 자신은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흰 수염을 긍정해서는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아집. 그는 자신이 겪은 실패가 모두에게 동등한, 당연한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이 온전히 자신만의 잘못이며 불행이 될 거라는 바보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열등감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진정 크로커다일이 바랐던 것은 달랐다. 자신이 느낀 기대를 그는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사실은 흰 수염을 믿고 싶었다. 그의 믿음을, 그 또한 인정하고 싶었다. 만약 누군가를 따른다면 당신 뿐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는 여전히 인간을 믿지 않지만... 흰 수염을 향한 감정만은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내의 믿음은 배반당했다. 결국 그는 틀리고 말았다. 그래. 그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크로커다일은 씁쓸한 기분을 갈무리하며 바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내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시끄러운 바람에 떠나보냈다.

즐거웠어, 흰 수염.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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